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73)화 (174/582)

제173화. 발아 發芽 (9)

냉정하게 판단하면 도현이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건 사실이나, 베니스 영화제 최연소 수상자와 퍼니 비디오에 나온 줄리엣이라는 타이틀은 인기 시트콤에 초대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시트콤에 초대되는 유명인들은 대부분 대중성이 있는, 이름을 꺼내면 열에 여섯 정도는 알 만한 스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계산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일단, 는 전 국민적인 인기와는 별개로 십 대를 대상으로 한 시트콤이니만큼 게스트를 초대할 때 십 대의 스타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도현은 엄밀히 말하면 미국에서는 9살이지만, 몇 달 뒤면 10살이었다. 애매한 나이기도 하고, 10대는 아니더라도 미성년자 스타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여 아슬아슬하게 우선 사항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여전히 도현을 부를 만한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특수한 상황이 겹쳐졌다.

바로 최근 휩싸인 불명예스러운 인종 차별 논란이었다. 시트콤에서 등장한 유머가 인종 차별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져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해당 논란에 대해서 시트콤 측은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여전히 비난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도현을 게스트로 부르는 것이었다.

일종의, 반성의 사인이자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과시적인 제스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그것만의 이유는 아니었다.

유명 스타들처럼 인지도가 엄청 높은 건 아니더라도, 도현은 나름 화제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최근에 퍼니 비디오와 <랜디 쇼>에 나오며 알음알음 이름이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트콤의 다른 말은 코미디 드라마였다. 드라마, 즉 서사적 구조가 배우의 수행으로 전달되는 것. 시트콤이 가지는 가벼운 이미지에 배우의 연기력이 간과되는 경우가 있는데, 자연스러운 연기가 선행되지 않으면 웃음을 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베니스에서 이미 연기력이 차고 넘치게 입증된 도현은 안정적인 카드였다.

이 모든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도현은 줄리엣으로 분장한 모습이 ‘세계에서 제일 예쁜 소녀’로 인터넷을 돌아다닐 정도의 외모였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요소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에서 도현은 강력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도현이 인지도가 없으면 어떤가. 시트콤에 출연하면 사람들은 저 소년이 대체 누군지 궁금해질 텐데?

이게 시트콤 측의 계산이었다.

한마디로, 시트콤 측에서는 도현을 불러서 득을 보면 봤지,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매니저인 오스카에게서 출연 제안을 전해 듣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아 매독스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낸 사실이었다.

매독스는 설명을 해주면서도 도현을 걱정했다. 지난번에 인종을 이유로 출연 취소를 당했으니, 이 출연 제안을 굴욕적으로 여길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딱히 불쾌하지도 않았다. 다만, 역시 좀 더 인지도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단순히 도현을 이용만 하려는 거면 모를까, 도현이 직접 알아보니 시트콤 측에서는 나름 정성 어린 사과문도 올리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깔끔하기까지 한 대처였다.

거기다가 현재 미국 사회에서 동양인을 게스트로 부르겠다는 건 파격적인 행보에 가까웠다. 보통 넓게 보아야 흑인 정도를 바운더리에 넣어주지, 동양인은 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시트콤 중 하나인 만큼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논란이 가라앉을 거란 걸 시트콤 측에서 모를 리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니 의 사과문과 도현의 초청은 순전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행위라고 보기 어려웠다.

도현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도현이 보기엔 이거야말로 윈-윈 관계였다. 거절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트콤 출연 제안을 승낙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촬영은 언제야?”

“…아.”

니콜라스의 물음에 도현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진과 다비드도 궁금한 눈초리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다다음 주라는 것 같아.”

“엑. 이 주나 기다려야 해?”

니콜라스가 실망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급작스럽게 결정한 촬영치고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게다가 지금이 목요일이니 더욱이.

“거긴 따라가면 안 되겠지?”

“응, 아무래도.”

도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리암이랑 촬영할 때야, 도현이 주연인 데다가 촬영장 분위기도 자유로워서 괜찮았다지만… 시트콤에는 게스트로 참여하는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니콜라스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현은 낙심하는 니콜라스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가서 사인받아다 줘야겠다.’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니 혼자서만 생각했다. 나중에 사인받게 된다면 깜짝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니콜라스는 금방 기운을 되찾고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세 사람의 수다를 들으면서, 도현은 에 나오는 배우들의 정보를 습득했다.

* * *

“집 정말 좋다. 아, 고맙습니다!”

오스카가 케일리가 건넨 음료를 받아 들고 인사했다.

현재 오스카와 도현은 거실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본 상태였고 테이블 위에는 대본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매니저라 그런지, 우편으로 부쳤던 매독스와 다르게 오스카는 직접 대본을 가지고 도현의 집에 방문한 참이었다.

“한번 읽어볼래? 내가 먼저 봤는데 재밌더라!”

오스카가 기대로 반짝이는 눈을 하고 도현을 보았다. 도현도 대본이 궁금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펼쳤다.

팔락-

하얀 손가락이 불규칙적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때론 한 페이지를 유심히 보았고, 다 읽은 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넘길 때도 있었다.

남은 페이지가 얇아질수록, 도현의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자리 잡았다.

시트콤에 초대받은 후, 도현은 게스트가 출연한 에피소드를 모두 찾아보았다. 그로 인해 도현이 나눈 게스트 유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게스트의 현실을 그대로 시트콤에 가져오는 것. 예를 들어, 유명한 가수인 헨리 오프릭이 게스트로 나왔을 당시, 멤버들이 정말 헨리 오프릭이라며 좋아한 경우였다.

두 번째는, 게스트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것. 말 그대로 새로운 역할을 주어서 연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도현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도현이 충분한 인지도를 갖춘 인물이 아니니만큼 예상했던 일이었다. 도현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결국 도현이 원하는 건 연기하는 것이니까.

“어때? 마음에 들어?”

대본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기 무섭게 오스카가 질문을 던져왔다.

탁.

테이블에 대본을 내려놓은 도현이 오스카를 보며 웃었다.

“네. 재밌을 것 같아요.”

도현이 나올 에피소드의 제목은 ‘Little Rival’.

사실상 모든 에피소드에 Little이 붙으니 집중해야 할 건 뒤에 있는 ‘Rival’이었다.

도현에게 주어진 역할은 화가를 꿈꾸는 막내 에이미의 라이벌로, 미술에 재능이 있는 초등학생 남자아이 ‘유진’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초등학교에서 실시한 미술 대회였다. 이 미술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은 에이미가 강력한 라이벌인 유진을 갖은 수를 쓰며 방해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에피소드였다.

시트콤과 같은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어서, 유머 감각이 다소 낯설긴 해도 꽤 재밌는 내용 같았다.

이후에 변화하는 에이미와 유진의 관계도 상당히 흥미진진했고 말이다.

“다행이네! 내가 봤을 때도 괜찮더라고. 내 생각에 이거 아주 반응 좋을 거야!”

오스카는 도현의 일을 자신의 일인 것처럼 설레 했다.

“연습하는 데 뭐 필요한 거 있을까?”

“아니요. 괜찮아요.”

필요한 거라면 집에 차고 넘친다.

도현은 물욕이 없는 편이었는데, 가끔은 자신이 정말 물욕이 없는 건지 아니면 물욕이 생기기도 전에 엄마가 이것저것 사다 주어서 생길 새가 없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오스카가 몇 마디를 더 나누더니 이만 가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현이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이후에 일정이 있다면서 사양했다.

“다음에는 그냥 우편으로 보내주셔도 돼요.”

“그럴 수는 없지. 네가 대본 읽고 문제가 있으면 내가 바로 알아야 하니까.”

내심 오스카가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마음에 쓰여 꺼낸 말에 오스카가 단호히 답했다.

도현은 더 말을 꺼내지 말고 수긍했다. 자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오스카의 직업관에 말을 얹고 싶진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는 오스카를 배웅하면서 도현은 생각했다.

‘이것도 익숙해져야겠지.’

누군가 자신을 일일이 챙겨주는 것. 도현이 대본을 읽기 전에 먼저 읽고, 필요한 설명을 해주는 것. 도현의 편의를 봐주는 것.

아직은 무척이나 낯선 감각이지만 적응해야 할 일이었다.

“다음 주에 보자!”

“네, 촬영 때 봐요. 조심히 들어가시고요.”

“그래, 잘 있어!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궁금한 거 있어도 연락하고. 아무 때나 해도 되니까, 알았지?”

밝은 얼굴로 말을 늘어놓던 오스카가 멈칫했다.

“아, 밤 10시 이후만 좀 피해주면 돼.”

도현은 장난으로 받아들였지만, 오스카는 나름 진심이었다.

에이전트나 매니저 같은 직업은 일과 삶의 영역이 분리되지 않는 직업이다 보니 주말에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은 잠을 자다가도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나마 오스카가 아역 배우 담당이라서 그런 경우는 적은 편이었다. 밤은 아이들이 자는 시간이니까.

물론, 눈앞에 있는 얌전하고 똘망똘망해 보이는 소년은 오히려 너무 매니저의 도움을 바라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지만.

도현이 옅게 웃으며 답했다.

“알겠어요. 유념할게요.”

오스카가 활짝 웃고선 한번 인사한 후 차에 올라탔다.

그의 차가 멀어지는 걸 보다가 도현은 도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대본을 한 번 더 읽어야겠다.

* * *

대략 일주일 정도.

도현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적절한 시간 분배가 중요했다.

첫 이틀은 배역을 분석하는 데 투자했다. 완벽하게 분석한 건 아니었지만, 더 시간이 없었기에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부족한 건 연기 연습을 하면서 보완해가면 될 일이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연기 연습에 집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도현은 꽤 오랜만에 붓을 들었다.

도현이 맡은 유진이라는 캐릭터는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재능도 있고 흥미도 있는, 그런.

그리고 운이 좋게도 도현은 미술을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도현은 캔버스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 순간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의 감정에 집중했다.

그게 유진이 느끼는 감정일 테니까.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리니, 정말 즐거운 것 같기도 했다. 도현은 진심으로 몰두해서 그림을 그렸다.

이런 창작 활동은 비단 집에서 그치지 않았다. 도현은 학교에도 스케치북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답지 않게 교과서에 낙서하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 크로키로 아이들을 그려주기도 했다.

도현이 배역을 준비하는 걸 안 진과 니콜라스는 상당히 재밌어하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왜 자꾸 쳐다보는데?”

“음… 아니야, 미안.”

다비드가 환장하겠단 표정을 지었다.

틈만 나면 힐끔대서 모르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왜 쳐다보냐고 물으면 자꾸 미안하다는 소리나 해댄다.

진이 쳐다보는 건 좋았지만, 진이 아닌 애는 사양이었다. 진을 신경 쓰기도 바쁜데 도현이 자꾸 쳐다보니 신경이 분산됐다.

답답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야!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

“딱히 불만은 없는데….”

“그럼 왜 자꾸 쳐다보냐고! 신경 쓰이게!”

다비드가 도현의 옷자락을 잡고 탈탈 털었다. 도현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흔들리면서 진정하라고 그를 다독였다. 물론 다비드는 더욱 화가 나 도현을 털었다.

간신히 다비드가 분노를 내리누르고 나서야 도현은 풀려날 수 있었다. 머리와 옷을 정돈하는 도현을 노려보던 다비드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진짜 왜 그러는데? 이번에도 아니라고 말하면 죽인다.”

“그게….”

도현이 곤란한 낯으로 어색히 웃었다.

에이미와 유진은 –일방적- 라이벌 관계였지만, 사건이 진행될수록 점점 관계가 변하기 시작하며 묘한 기류가 흐르게 된다.

그러니까, 로맨스의 기류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