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발아 發芽 (10)
깊은 감정이 요구되는 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이 필요했다면 자신이 느낀 감정부터 가지를 펼쳐 나가 연기를 하는 도현에게 참 난감했을 텐데,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연기를 할 수는 없었다. 감정이 선행되지 않은 연기는 알맹이 없는 모방일 뿐이니까.
그래서 찾은 방법이 바로 주변으로부터 배우는 것.
그중 직접적인 경험이 감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누군갈 좋아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행히, 직접적인 경험 말고도 감정을 이해할 방법이 있었다. 사람은 때론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감정의 파동을 겪으니까.
슬픈 영화를 보고 울거나, 로맨스 드라마를 보고 설레는 것처럼.
즉, 지금 도현이 해야 할 것은 간접적인 경험, 공감이었다.
한마디로 도현은 다비드의 감정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도현의 장황한 연설에 다비드의 목에 핏줄이 섰다.
“그러니까 날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하고 있다는 거 아니야!?”
“동물원 원숭이라니. 아무리 나라도 원숭이 감정에 공감하는 건 좀 어려워.”
“하…?”
다비드가 할 말을 잃은 채로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말똥거리는 도현을 보았다.
에이전시 사건 이후.
다비드와 도현 사이에 있던 어떤 벽이 사라졌다. 그건 다비드도, 도현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비드는 그 후로 깨달은 게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일단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니콜라스 같은 애랑 어울리나 싶었는데, 끼리끼리였던 것이다.
역시 끼리끼리는 과학이었다.
다비드가 유사 과학을 신봉하는 사이, 도현이 은근슬쩍 눈치를 보았다.
“…혹시 불쾌해?”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다비드가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진을 좋아하는 걸 네가 왜 공감해?”
말하고 나니 더 소름이 끼쳤다.
“…알았어. 이제 안 할게. 미안해.”
목소리는 분명 담담한데, 아까보다 머리카락이 조금 더 처진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인데 실망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아니, 이게 어째서 보이는 건데?’
이도현의 표정을 읽는 능력 따위는 조금도 필요 없었다.
정말 신경 안 쓸….
다비드가 마른세수를 한번 하다가 미치겠단 표정을 지었다. 단번에 삼 년은 늙은 얼굴이 되었다.
“야.”
“응, 왜?”
“나 말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되잖아.”
도현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주변에 확실한 예시가 있으니 이쪽이 더 효율적이겠다고 판단했을 뿐.
여전히 아쉽긴 했지만, 당사자가 저리 기겁하니 어쩔 수 없었다. 도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깐의 소동이 지나가고.
도현은 다비드의 말처럼 로맨스 영화 몇 편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오후 여섯 시 전에는 케일리가 도현의 옆에서 같이 영화를 시청하고, 저녁 먹은 후에는 서혜나가 도현과 같이 영화를 보았다.
그 후.
도현은 대본을 가지고 연습실로 향했다. 대본은 이리저리 써놓은 글씨가 꽉 채워져 검은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도현은 틈틈이 의 지난 화들을 시청했는데, 도현이 파악한 캐릭터는 이랬다.
일단 첫째 매그.
그녀는 원작에 나온 것처럼 상당한 미인이었다. 배우를 꿈꾸며 다양한 오디션을 보는 꿈 많은 소녀이기도 했다.
그녀의 가장 특이한 부분은 바로 상당한 바람둥이라는 것이었는데, 금방 사랑에 빠지고 금방 마음이 식는 편이었다.
그러나 바람둥이라는 속성과 다르게, 진정한 사랑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으며 사랑이면 그 외의 조건을 보지 않는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다.
둘째 조.
조는 과격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인데,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마이웨이적 면모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매그와는 반대로 사랑보다는 친구가 중요한 타입이며, 특이 사항은 불같은 성격 탓에 소년원에 다녀온 이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거칠긴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단연코 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셋째 베스.
베스는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마치가의 대표 천사를 맡고 있었다. 공감 능력도 뛰어나고 상냥하지만,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어 4차원적인 행동을 종종 벌였다.
호기심이 많아 이상한 물건을 구매하는 걸 좋아하며, 네 자매 중에서 예술가적인 기질이 제일 강했다.
넷째 에이미.
에이미는 오만한 성격의 철부지 막내였다. 허영심이 있고 가끔 못되게 굴 때도 있지만, 솔직한 성격인 데다가 본성은 선했다. 다만 아직 철이 많이 없어서 이기적인 행동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가끔가다 보이는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에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도현이 맡은 유진은 여기서 넷째인 에이미와 얽혔다.
유진은 캐릭터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시트콤에 일회성으로 출연하는 조연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이보다 분량이 적은 캐릭터도 분석해본 적이 있었다.
도현은 빈 여백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유진.
미술에 재능이 있고 성격이 다정다감한 동양인 남자아이. 외모도 뛰어난 축에 속해서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편. 부모님의 해외 전근으로 미국에서 사는 중.
이게 주어진 정보.
나머지는 자신의 상상으로 채워 넣었다.
유진의 부모님은 해외 전근을 스스로 지원할 정도로 자유로운 성향일 것이다. 여행도 좋아해서, 유진네 가족은 여행도 자주 다닌다.
부모님의 성향을 물려받은 유진은 자유로운 걸 좋아했다.
그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데 빠진 이유는 하얀 공간에 마음껏 자신을 펼치는 것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유진은 시간에 얽매이는 것도 싫어한다. 그렇기에 미래보다는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성격이다.
이 부분이 중요했다.
도현이 보았을 때, 미국 시트콤은 등장인물들이 어딘가 하나씩 핀트가 나가 있었다. 그런 독특한 면모가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유진은 극단적으로 순간적 즐거움에 몰입하는 인물이었다.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머릿속이 순수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유진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었다. 황당한 전개는 시트콤 특성이라지만, 도현은 ‘시트콤이니까’라는 말로 캐릭터의 행동을 납득하고 넘어갈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황당한 전개가 납득될 수 있도록 유진이라는 캐릭터를 구상했다. 그로써, 곧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상황에서 관심이 가는 여자애에게 호감을 표현한 유진의 행동을 개연성 있게 만들 수 있었다.
도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연기를 시작했다.
* * *
“당신을 사랑해요.”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고백했다. 절절한 고백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오늘도 영화를 집중해서 보고 있는 도현이었다.
그때, 오스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현이 시트콤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뭘 하고 있냐는 질문에 도현은 영화를 보고 그림을 그린다고 답했다.
- 그래? 열심히네! 그럼 연기 연습은 언제 해?
“영화 보고 그림 그리고 남은 시간에요.”
- …응?
도현은 그가 못 들은 것 같아 친절히 다시 말해주었다.
“영화 보고 그림 그리고 남은 시간에 연습해요.”
- 그게 언젠데…?
“보통 아홉 시 정도요. 아홉 시부터 열 시까지 연습해요. 그리고 보통 자투리 시간은 연기 연습에 쏟아요.”
그 자투리 시간이 평소 여섯 시였던 기상 시간을 당겨, 아침 다섯 시에 기상해서 일곱 시에 아침을 먹을 때까지, 아침을 먹고 9시 10분에 차를 타고 등교를 할 때까지, 영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사이사이 삼십 분 정도라는 설명이 생략된 걸 오스카는 몰랐다.
도현은 그걸 정말 자투리 시간으로 생각했다는 게 둘 사이의 비극이었다.
참고로 기상 시간을 당긴 건 서혜나에게 비밀이었다.
저번에 오디션 준비 때 늦게 자는 걸 들킨 후로, 도현은 시간이 필요할 때마다 취침 시간을 늦추기보단 기상 시간을 당기곤 했다.
- 그,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오스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보이진 않지만, 순한 갈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동요하고 있을 것 같았다.
“글쎄요. 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연습하는지 잘 몰라서요.”
도현은 진실만 얘기했지만, 그게 오스카를 더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았다.
도현은 뒤늦게 한마디를 붙였다.
“음, 걱정하지 마세요, 오스카. 괜찮을 거예요.”
-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진 않아?
효과는 없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괜찮다는 말 여섯 번을 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양한 어휘력을 사용해 말한 후에야 오스카의 걱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전화를 끊은 도현이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오스카는 끝까지 조금 더 연습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말했다. 연기도 연기지만, 대본을 외우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지 않냐면서.
오스카가 대본을 가져왔을 때 처음 읽고 나서 대부분의 대사를 모두 외운 도현에게는 조금 의아한 말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연기 방식에 있어서 도현은 기계적 연기와 거리가 멀었다.
도현의 연기는 대부분 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배운 적도 없고 남들의 도움을 받은 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이런 표정을 하고, 이런 억양으로, 이런 동작을 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한다.
체계적인 방식이 없는 연기는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연기에 대한 재능,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하는 재능’을 가진 도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현에게는 동작의 연습보다는 감정의 이해가 더 중요했다. 감정을 알아야 거기서 어떤 행동을 할지 감이 오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이렇게 연기하는 게 익숙하고, 당연했다.
도현이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생각했다.
‘오스카는 걱정이 많은 편이구나.’
아무래도 믿음을 주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도현이었다.
* * *
열린 창문 사이로 산들산들 바람이 불었다.
도현이 괜히 옷차림을 한번 점검했다. 청바지에 흰 맨투맨. 모난 데 없이 깔끔했다.
때마침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도현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앞에서 오스카가 서혜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도현을 발견한 오스카가 반가운 낯을 했다.
“안녕, 도현! 오늘 컨디션은 어때?”
익숙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처음 전화를 건 이후, 도현이 못미더웠는지 오스카가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던 탓이었다.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다행이네. 그럼 가볼까? 아, 혜나 씨. 도현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잘 다녀오겠습니다.”
의욕 가득한 얼굴에 서혜나가 한번 웃고는 알겠다고 답했다. 도현을 돌아본 얼굴에는 살짝 미련이 남아 있었다.
“도현아. 나는 정말 안 따라가도 되겠니?”
“네. 오스카가 있잖아요.”
“그렇지….”
서혜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쉬워하는 걸 알았으나 도현은 단호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생길 텐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따라오면 엄마의 생활은 엉망이 될 것이다. 매니저가 생긴 이유가 없었다.
“잘 다녀 와.”
“네, 잘하고 올게요.”
서혜나가 도현을 한번 꼭 안아주었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그 포옹을 받아들이고는 오스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스카의 차는 커다란 다인승용 차였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탑승했다.
“대본을 보고 있거나, 눈을 좀 붙이고 있어도 돼. 편하게 있어. 혹시 멀미하면 말하고.”
“알겠어요.”
도현은 대본을 펼쳐 들었다.
도현을 흘긋 쳐다보던 오스카는 대본에 빼곡히 들어찬 검은 글씨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스카의 시선을 모르는 도현은 그저 대본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아무래도 동양인들이 좀 겸손한 편이라고 하던데, 도현도 겸손하게 말했던 거였나 보다.
도현을 맡고 나서 첫 일정이니만큼 꽤 긴장했던 오스카였다. 오스카는 걱정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그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차가 출근하는 인원으로 붐비는 도로를 내달렸다.
대본에 눈을 고정하던 도현이 잠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침의 번잡함이 그대로 보이는 도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트콤 촬영이 오전에 있어서 도현은 피치 못하게 학교를 결석한 상태였다.
아이들은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시각.
도현은 매니저의 차를 타고 촬영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