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발아 發芽 (11)
“도착했다.”
오스카를 따라 내린 곳은, 커다란 학교였다.
‘학교 결석해서 학교를 오네.’
아이러니한 상황에 도현이 조금 웃었다.
학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올라가는 곳으로, 각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 덕분에 도현이 다니는 델마 아카데미보다 학교 부지가 훨씬 넓었다.
지금은 수업 중인지 학교는 조용했다. 도현과 오스카가 들어서자 학교 관리인이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다. 촬영 때문이라고 말하자 익숙한 일인지 심드렁한 얼굴로 손짓하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도현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아마 스태프인 것 같았다.
“네가 도현 리 맞지? 오늘 게스트로 온다던.”
“네, 맞아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태프가 도현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도현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그 덕에 촬영장은 굉장히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건물 밖에서는 소음이 안 들렸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자, 얘들아! 조용!”
한쪽에서 스태프들이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촬영장은 처음이었기에, 도현은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주변을 구경했다. 그리고 도현이 구경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도현을 구경했다.
“감독님! 게스트 왔어요!”
“어, 왔어?”
실내인데 선글라스를 낀, 굉장히 개성적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잘 왔어! 줄리엣! 아, 이게 아니지. 이게 입에 착 붙어서 말이야. 도현 리. 도현이라고 부르면 되지?”
“네, 그렇게 불러주세요.”
“좋아.”
이름은 소개해주지 않는 걸까?
도현이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자, 오스카가 작게 그녀의 이름을 속삭여 주었다. 디에나 도슨.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다.
디에나는 도현을 요리조리 쳐다보더니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보니 더 괜찮네. 바네사가 칭찬한 이유가 있었어.”
어딘가 익숙한 이름에 곰곰이 생각하던 도현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바네사 올슨 감독님이요?”
“기억하고 있구나? 응. 맞아.”
바네사 올슨.
베니스 영화제에서 봤던, 에드워드 녹스가 출연한 영화 의 감독이었다.
할리우드에 여자 감독이 많아지는 추세라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비율로 따져보았을 땐 압도적으로 적었다.
그리고 은근히 좁은 이 업계에서 나름 이름을 날린 감독인 디에나와 매일같이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바네사는 친분이 꽤 깊었다.
아무래도, 도현이 게스트로 온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대본은 잘 숙지해 왔어?”
“네. 문제없어요.”
“좋아. 마음에 드네.”
도현의 시원시원한 대답이 그녀의 취향에 들어맞은 것 같았다.
잠시 후, 도현은 스태프를 따라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옷은 교복이었는데, 흰색의 긴팔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긴 바지였다.
와이셔츠의 가슴팍에 있는 주머니에는 학교 엠블럼도 그려져 있었다.
사실, 미국의 사립학교는 대부분 교복을 입도록 했다. 사립학교이면서 교복이 없는 델마가 조금 특이한 편이었다.
도현은 처음 입어보는 교복에, 엄마가 보았더라면 굉장히 좋아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스태프를 따라 메이크업실로 이동했다.
메이크업은 별거 없었다.
몇 번 피부 위에서 쓱쓱 하더니 끝이 났다. 도현은 눈썹이 조금 진해진 것 같다는 감상 이외에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머리카락은 조금 정성스레 손봤는데, 가르마를 살짝 내고 고데기로 앞머리를 쫙쫙 폈다. 왠지 전교 학생회장을 할 것 같은 느낌의 머리였다.
오스카도 도현을 보더니 굉장히 공부 잘할 것 같다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때였다.
“줄리엣!”
한 아이가 도도도 뛰어왔다. 도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안녕! 네가 줄리엣 맞지? 반가워!”
아마도 이 촬영장에서 도현은 줄리엣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도현은 생글생글 웃는 소녀를 보았다.
금발을 돌돌 말아 새침데기 같은 인상을 한 소녀. 약간 다람쥐처럼 부푼 볼이 사랑스러우면서 오만한 성격을 가진 에이미의 이미지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에이미 역할의 배우, 새디 로스였다.
“응, 안녕. 이도현이야. 도현이라고 부르면 돼.”
도현은 이름을 정정해 주었다. 줄리엣이라고 불리는 건 학교로 충분했다.
“도현? 발음이 좀 어렵네.”
도현, 도현.
몇 번 반복해서 말하던 새디가 활짝 웃었다.
“난 새디 로스야!”
“응, 새디. 알고 있었어.”
“정말? 너 우리 시트콤 봤니?”
“다 봤어.”
촬영 때문에 본 거지만, 어쨌든 다 보긴 했다. 새디는 도현의 말에 기뻐했다.
“사실 나도 네 영상 봤거든! 영화는 나이 때문에 못 봤지만 말이야.”
시트콤의 주연과 게스트가 나란히 떠들고 있으니 아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새디가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도현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내가 친구들 소개해줄게!”
쟤는 에비가일, 얘는 로니…. 도현은 새디가 소개해주는 족족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도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다 도현을 반기는 건 아닌지, 조금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거나 불만스러운 낯으로 훑어보는 애들도 있었는데 도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새디! 촬영 시작해야 해!”
“앗! 알았어요!”
새디가 사라지자 도현은 아이들 틈바귀에서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때 스태프가 와서 도현에게 조금 더 대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근히 이 상황이 불편했던 도현은 스태프에게 감사하며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 후 자연스럽게 오스카에게로 다가갔다.
계속 만날 거라면 모를까.
이번 촬영이 끝나면 다시 만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친분을 다지고 대화하는 건 피곤했다.
그러기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도현이 멀어지자 아이들이 웅성웅성 떠들어댔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진 않아, 도현은 대신 촬영장을 둘러보는 걸 택했다.
‘그러고 보니 에이미밖에 없네.’
오늘 촬영은 에이미만 하는 것 같았다.
오스카가 촬영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도현에 ‘촬영장이 신기한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정작 도현은 노라의 사인을 받는 계획은 조금 미뤄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도현이 오스카와 서 있으니, 스태프들이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걸었다. 게스트의 입장으로 온 거라서 홀로 놔두기엔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우물우물.
도현이 스태프가 건네준 과자를 먹다가 목이 좀 막히는 것 같아 음료수를 홀짝 마셨다.
“오스카. 이거 맛있어요.”
“응? 그래?”
우물우물우물.
오스카와 도현이 과자를 우물거렸다. 어떠냐고 묻자 그가 엄지를 치켜올렸다.
과자를 먹으러 온 건지 촬영을 하러 온 건지 헷갈려질 만큼 대기를 하고 난 후 에이미의 촬영이 끝났다.
몇 번 모니터링을 하던 디에나가 도현을 불렀다. 도현과 오스카는 감독이 부르는 대로 그 옆에 가서 섰다.
“줄리엣! 대본은 숙지했다고 했지. 리허설 필요해?”
다시 호칭이 줄리엣으로 돌아갔다.
도현이 미묘한 불만을 느끼며 대답했다.
“한번 맞춰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유진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 장면부터 찍을 건데, 그러면 첫 번째는 리허설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해.”
왜 물어본 걸까라는 의문을 느끼며 도현이 순순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감독의 말이 끝나자 스태프가 다가와 도현에게 이런저런 지시 사항을 알려주었다. 다른 스태프는 미술용 앞치마를 도현에게 입혀주었다.
유진의 첫 등장은 바로 교실.
에이미가 유진을 염탐하러 오는 장면이었다.
유진은 에이미가 훔쳐보는 것을 모르니 그림을 그리는 척을 하며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대화하면 되는 장면이었다.
잠시 후.
도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캔버스를 쳐다보았다. 이미 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진 캔버스. 여기에 그림을 덧대는 척만 하면 된다.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아쉽긴 했지만….
“레디, 고!”
도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객관적으로 캔버스를 응시하던 눈동자에 순식간에 온기가 들어찼다. 사인이 떨어진 순간부터, 이 그림은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유진’이 그린 그림이었다.
유진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림.
유진은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좋았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때처럼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하얀 캔버스 위에서 붓을 놀릴 때면 아무런 제약도, 제한도 없었다.
그건 드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도현은 캔버스 위에 붓을 놀렸다.
디에나는 저도 모르게 작게 감탄하고 말았다.
‘눈빛이 달라졌어.’
꼭 저 앞에 있는 캔버스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다. 그건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베니스 최연소 수상자.
그 위명을 운으로 얻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 세계가 얼마나 치열한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 자신도 이 위치까지 고생스럽게 올라온 만큼, 남들의 노력과 성과를 깎아내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
“유진! 미술 대회에 낼 그림이야?”
옆에서 구경하던 아이가 물어보았다. 도현이 캔버스에 그려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응. 그러려고 생각 중이야.”
“와! 우승은 네가 하겠다!”
“그래? 괜찮아 보여?”
“완전! 이렇게 예쁜 그림 처음 봐!”
호들갑을 떠는 친구에 유진이 겸양을 떨었다. 그리고 뒤편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에이미가 분한 기색으로 씩씩대다가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우승은 내 거야. 절대 아무한테도 못 줘!”
코를 씰룩.
어깨를 들썩.
눈은 희번뜩.
완전히 돈 자의 표정이었다.
“컷!”
디에나가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줄리엣! 내가 리허설처럼 하라고 했는데 한 번에 끝내면 어떡해!”
감독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긴장으로 어깨가 굳었던 오스카도 힘을 풀고는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들리는 오케이 사인이 유독 귀에 박혔다. 도현은 드디어 자신이 촬영장에 돌아왔다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
수많은 조명과 카메라, 사람들이 도현을 주목하고 있었다. 열기 때문에 뜨거울 지경이었다. 모순되게도 그 열기에 숨통이 트였다.
아, 그래.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야.
다음 촬영도 금방 이어졌다.
와 <불량경찰>에서 연이어 오케이를 따내던 도현은 에서도 여전했다.
오스카는 완전히 인정했다.
도현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저게 한 시간 연습으로 될 리가.’
뒤늦게 도현이 말한 ‘자투리 시간’의 진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오스카였다.
“좋아! 아주 좋았어! 방금 표정 정말 완벽했어!”
감독의 입에서 연신 칭찬이 쏟아졌다.
촬영장 내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촬영장 분위기를 결정하는 건 감독이었는데, 디에나는 상당히 유쾌하고 장난기 많은 인물이었다. 는 10대들이 주역이었으니 의식해서 빡빡하게 굴지 않는 것도 있었다.
게다가 도현이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주며 진도가 쭉쭉 빠지니, 분위기가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에이미와 유진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대부분 교실 주변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도현은 교복을 입고 몇 번이나 자연스럽게 헤어스타일을 손봐 가며 교실과 복도에서 촬영했다.
그렇게.
에이미가 이상한 행동을 하며 유진과 부딪치는 장면의 촬영이 거의 다 끝났다.
이제부터 찍을 장면은, 도현이 다비드를 관찰하다가 한 소리를 듣게 만든 문제의 장면이었다.
에이미와 유진 관계의 변환점이기도 했다.
“자 준비됐지? 줄리엣! 스크린 너머에 있는 소녀들을 모두 설레게 만들겠단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지?”
집중하던 도현이 순간 헛손질을 했다. 새디가 도현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디에나는 좋은 감독이었지만, 아이들을 놀리는 걸 너무 좋아해서 문제였다.
도현이 손에 얼굴을 한번 파묻고는 고개를 들었다. 깔깔 웃던 디에나가 손을 들어 사인을 보냈다.
감독의 놀림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소년이 눈을 한번 깜빡하는 찰나의 순간, 엘리몬드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10살의 소년, 유진으로 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