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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76)화 (177/582)

제176화. 발아 發芽 (12)

도현은 에이미의 반 옆 복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문가를 바라보는 눈에는 미묘한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현재, 유진이 에이미의 반 친구에게 에이미를 불러달라고 말한 상태였다.

드륵-

문이 열리고.

돌돌 만 금발이 보이자 도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응?”

새디가 당황한 얼굴로 얼음이 되었다. 새디의 반응에 도현이 웃음을 삼킨 후, 벽에 기댔던 등을 떼며 인사했다.

“안녕.”

“어? 넌… 네가 왜?”

새디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도현이 손을 들어 올렸다. 도현의 손에 들린 편지지에 새디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이거. 너지?”

도리도리도리.

새디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아닌데? 내가 너한테 고백할 리가 없잖아!”

눈을 깜빡이던 도현이, 이내 천천히 웃었다. 정답을 맞혀서 기뻐하는 아이처럼 눈이 반짝였다.

당혹감에 패닉 상태가 된 새디는 몰랐지만, 유진의 볼에 옅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

“고백 편지라고 한 적 없는데.”

낭패다!

새디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살짝 틀고는 미치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태연한 척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물론 목소리가 떨려 실패했지만.

“포도 주스 흘렸더라.”

도현이 팔랑이는 편지지에 있는 동그란 보라색 자국이 유독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의 연기를 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웃음을 흘렸다.

시트콤은 장면 도중에 유머 포인트가 나올 때마다 웃음소리를 삽입하는데 이 장면도 편집 과정에서 웃음소리를 집어넣을 예정이었다.

“이제 이름 알려줄 거야?”

“에, 에이미야.”

“에이미.”

간신히 이름을 듣게 된 도현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살짝 굳히곤, 흠흠, 헛기침했다.

살짝 굳은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어, 묘했다.

‘이게 뭐지?’

연기일 뿐인데, 이상한 느낌에 새디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마치 진짜로 고백을 받기 전 상황처럼… 일 초가 일 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 때였다.

“에이미.”

반 박자의 침묵 이후.

“나는 너를 더 알고 싶어. 너만 괜찮다면… 이번 주에 내 홈 파티에 오지 않을래?”

도현이 관찰한 다비드는 그랬다.

도현이 보기엔 진도 다비드에게 끌리고 있는데, 심지어 니콜라스마저 눈치채고 있는데 다비드만 그 마음을 확신하지 못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그런 거였다.

한없이 자신감에 찼다가도 한없이 불안해지는 것. 그렇게 사람을 위태롭게 만들지만 붙잡고 싶은 마음.

하지만 유진은 불안함에 안주하기보다는 그 후에 얻을 수 있는 즐거움에 걸어보는 성격이었다.

조금은 수줍고 조금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불쑥 치고 올라오는 일말의 감정에 어쩔 수 없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그렇게 똑바로 직시하는 시선에 새디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응.”

소녀의 대답이 떨어지자, 꽃이 만개하듯이 도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서렸다.

“컷! 오케이! 완벽해! 완벽하다고!”

곧바로 디에나가 환호의 외침을 내질렀다. 그녀는 거의 감동하는 중인 것 같았다.

“맙소사, 내가 영화감독이었다면 널 데리고 로맨스 영화를 찍었을 거야!”

디에나는 방금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열 가지 정도는 지나간 느낌이었다.

리암도 그렇고, 박민호도 그렇고. 리액션이 큰 사람은 아니어서 디에나의 과도한 리액션에 도현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도현이 부담스러워하는 걸 눈치챈 새디가 큭큭 웃었다.

“감독님은 원래 저러셔. 너무 그렇게 당황스러운 표정 짓지 마.”

“아….”

“뭐, 나도 처음엔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근데 저렇게 보여도, 화날 땐 엄청 무서워.”

뒷말은 목소릴 낮춰 소곤소곤 얘기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디가 문득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줄리엣이면 난 로미오인가?”

촬영하면서 금방 도현과 친해진 새디가 농담을 건넸다. 새디는 구김살이 없고 유쾌한 성격이라 도현도 금방 그녀를 편하게 여길 수 있었다.

도현이 가볍게 대답했다.

“결말까지 비슷한데?”

“어? 그러게?”

새디가 어깨를 쫙 펴더니 말했다.

“좋아, 그럼 나를 지금부터 로미오라고 부르도록 해.”

“나는 그냥 도현이라고 불러주면 안 돼?”

“왜? 줄리엣이 싫어?”

“학교에서 모든 애들이 날 그렇게 부르거든. 그래서 좀 다르게 불리고 싶어.”

“음… 그럼 줄리는 어때?”

“…….”

도현은 알파벳 몇 개 줄어들었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줄리 좋다! 여자 친구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야! 넌 날 로즈라고 불러! 어때, 어때?”

로미오가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로즈가 된 걸까?

“자! 다음 장면 찍어야지, 아가들!”

도현은 감독의 부름에 그 호칭 좀 별로인 것 같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가자! 줄리!”

“…응, 로즈.”

도현은 꼼짝없이 줄리가 되고 말았다.

* * *

첫 촬영은 문제없이 끝났다.

촬영 분량이 많아서 나머지 장면은 다음 날 이어서 찍기로 했다.

“오늘 어땠어?”

“아주 좋았어요. 사람들도 친절했고요.”

“다행이네. 피곤하진 않아?”

“음… 조금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졸릴 만도 하지. 자고 있어. 집에 도착하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아, 혹시 배는 안 고파?”

“저는 괜찮은데 오스카는요?”

“나는 촬영장에서 군것질을 너무 많이 해서 배불러.”

“그러면 그냥 바로 집으로 가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오스카의 차가 도로를 달려 집으로 향했다. 도현은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다 문득, 뒷좌석에 놔둔 종이봉투가 눈에 들어 왔다.

‘아, 사인.’

노라를 만나면 사인을 부탁하려고 가져온 건데, 오늘은 노라가 안 와서 만나지조차 못했다.

도현은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내일 그녀와 만날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 * *

“잠깐! 나 할 얘기 있어!”

새디가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도현이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자 아예 복도 바닥에 드러누웠다.

“잠깐만! 진짜 잠깐이면 돼!”

“뭐,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그러니까 대화 좀 하자니까!”

주변에 지나가던 아이들이 등으로 바닥을 쓰는 새디와 드러누운 여자애를 달고 걸어가는 도현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현은 새디가 바지를 잡고 늘어지는 통에 바지가 벗겨질 것 같아 죽을 맛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얘기할 테니까 이것 좀 놔 줘!”

도현의 바지를 쥔 채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던 새디가 고개를 들어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진짜지?”

“진짜야.”

그제야 바지에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새디에 도현이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

“컷!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도현은 한쪽에서 머리카락을 정리 중인 새디에게 물었다.

“새디, 등은 괜찮아?”

“새디가 아니라 로즈! 등은 괜찮아. 완전 문제없음!”

“그렇구나….”

새디가 너무 강하게 바지를 잡아당기는 통에, 진짜로 바지가 벗겨질까 봐 연기하는 내내 마음을 졸였던 도현이 아련히 웃었다.

그때였다.

“어? 노라!”

“노라?”

익숙한 이름에 도현이 반응했다. 새디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진짜로 거기에 노라가 있었다.

감독과 이야길 하던 노라가 이쪽을 보았는지 환하게 웃었다.

‘진짜 노라다.’

한동안 니콜라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적 친밀감을 쌓게 된 도현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노라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굵은 웨이브를 넣은 갈색 머리카락. 진하게 한 스모키 화장. 다 풀어 헤친 와이셔츠 단추와 짧게 수선한 치마. 단정한 엘리몬드 사립학교 교복을 개성적으로 차려입은 모습을 한, 십 대의 소녀.

웃을 때 한쪽으로 씩 올라가는 입매가 매력적인 그녀는 의 주연이자 원작 ‘작은 아씨들’의 주인공인 조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안녕, 음 그러니까… 에이미 남자친구?”

인상적인 인사말이었다.

“안녕하세요, 노라. 도현이라고 불러주세요.”

“도히연? 도현? 그래, 도현. 난 노라야.”

“알고 있어요. 유명하시잖아요.”

“그래? 너도 유명하잖아.”

노라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노라는 도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히트 친 시트콤의 가장 인기 있는 주연이니 당연했다.

‘지금 말해도 될까.’

도현은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노라와 같이 촬영하는 장면은 단 한 개뿐이었다. 아마 노라는 그 장면 촬영을 위해 온 것 같았다.

지금 놓쳤다가는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었다.

도현은 결정했다.

“저… 노라.”

“응?”

“사인 하나만 받을 수 있을까요?”

“어? 줄리! 너 노라 팬이야?”

“내 팬보이였어?”

도현은 잠깐 그렇다고 할까 고민했다.

“제 친구가 노라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제가 여기 나온다고 하니까 며칠 동안 노라 얘기만 했어요.”

도현은 노라가 혹시 기분 나빠할까 걱정했으나, 그녀는 별 신경을 안 쓰는 눈치였다. 노라는 조 캐릭터만큼이나 쿨한 성격인 것 같았다.

“좋아. 친구 이름이 뭔데?”

“니콜라스요. 잠시만요.”

도현이 오스카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그에게 부탁해 맡겨 놓았던 종이와 펜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노라를 언제 만날지 몰라 미리 준비한 도현이었다.

“준비성이 철저하네.”

“니콜라스가 노라를 정말 많이 좋아하거든요.”

도현의 말에 노라는 기분이 좋은 눈치였다. 자신을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노라가 능숙하게 사인했다.

“자, 여기. 친구한테 전해줘. 한 장이면 돼?”

곰곰이 생각하던 도현이 말했다.

“…몇 장 더 해주실 수 있어요?”

노라가 씩 웃었다.

“물론.”

도현은 노라의 사인이 담긴 봉투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친구들이 좋아할 걸 생각하니 벌써 뿌듯했다.

“이거 좀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응, 당연하지.”

“…그, 종이라, 구겨지지 않게 조심해 주셔야 해요.”

오스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 아주 조심조심 모실 테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요….”

도현이 머쓱한 얼굴로 뺨을 긁다가,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새디와 몇 장면 더 찍은 후, 노라가 등장하는 장면 차례가 되었다.

* * *

도현은 새디와 복도 계단에 앉아 시시덕대며 놀았다. 도현이 무언가 얘길 하면 새디가 꺄르르 웃었다. 새디가 어깨를 툭 치며 장난을 치자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몽글몽글 간질간질.

막 풋풋한 감정이 싹트는 관계 사이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이가 있었으니.

“…쟤 뭐야?”

라이벌을 재기 못 하게 밟아 놓으라고 했더니, 아주 신나서 어울려 놀고 있었다. 노라의 어이없는 눈초리가 새디를 향했다.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을 느낀 새디가 고개를 들었고-

“조!?”

당황한 새디가 벌떡 일어났다. 노라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황급히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유진, 미안! 이따 다시 보자!”

“어… 에이미?”

도현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새디가 노라를 질질 끌고 반대편으로 향했다. 도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새디와 노라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반에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현은 문득 바닥에 떨어진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어… 저건.”

실리콘 재질로 된 무언가를 집어 든 도현이 새디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았다.

“컷! 좋아!”

도현은 손에 들린 치발기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를 정주행하고 다른 시트콤도 몇 개 정도 찾아본 도현은 알고 있었다. 시트콤에서는 유독 황당하고 어이없는 물건이 자주 등장했다.

콩콩 뛰는 신발이나, 쓸데없이 반짝이는 목걸이나, 피자를 주스로 만드는 기계 등등….

지금 도현이 들고 있는 치발기도 같은 맥락이었다.

“응? 그거 계속 들고 있었어? 이리 줘.”

스태프의 말에 도현은 떨떠름히 치발기를 건네주었다. 도현을 제외한 사람들은 저런 황당한 전개에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

도현은 애써 치발기에 관한 생각을 덜어내고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서 지나칠 뻔했는데 이제 한 장면만 더 찍으면 학교에서 찍을 촬영분이 모두 끝이 난다.

때마침 새디도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계속 같이 촬영하면 재밌을 텐데, 아쉽다.”

“둘이 벌써 친해졌어?”

“응. 우리 완전 베스티야! 그치, 줄리?”

노라의 질문에 새디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Bestie.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만 문맥상 베스트 프렌드를 칭하는 말인 것 같았다.

도현은 새디와 베스트 프렌드가 된 기억은 없었으나, 당당히 물어오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배짱은 없었다. 

도현 대신 노라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만났으면서 무슨 베스티야?”

“만난 시간은 중요하지 않은걸. 우린 벌써 애칭도 있다고!”

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도현을 보고 씩 웃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노라의 웃는 얼굴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왜 십 대들이 그녀를 닮고 싶어 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될 정도로.

“네가 이해해줘. 얜 모든 애들이 베스티거든. 저기 촬영하는 애들 다 얘 베스티야.”

새디는 진보다 한층 진화된, 극강의 친화력을 가진 것 같았다. 사람을 엄청 좋아하는 게 할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딱히 싫은 건 아니라서 도현은 새디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잠시 후.

디에나 감독의 외침에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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