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77)화 (178/582)

제177화. 발아 發芽 (13)

“레디, 고!”

팔짱을 낀 노라가 벽에 비딱하게 기대어 섰다. 그리고 특유의 업신여기는 무표정으로 새디를 내려 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치워 버리겠다며?”

“치울 거야! 지금 작전 중이라고!”

노라가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물었다.

“무슨 작전?”

“음… 으으… 아!”

방황하던 새디가 감탄사를 터트리더니 두 손을 꽃받침처럼 턱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커다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미인계야!”

노라의 얼굴이 단번에 썩어 들어갔다. 그건 ‘썩었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극도로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본 양, 노라가 새디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새디가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그들의 연기를 보고 있던 도현은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왜 이 시트콤이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

자매들의 티키타카와 케미가 너무 재밌었다.

“…에이미, 잘 들어. 걔가 눈이 멀어버리지 않는 이상 네 허니트랩에 걸릴 일은 없어. 절대.”

새디가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열자 노라가 선수 쳤다.

“Never.”

쓸데없이 진지하고 단호한 노라에 새디의 얼굴이 구겨졌다. 쯧, 입으로 소리를 낸 노라가 말했다.

“그냥 내가 도와줄게. 걔 그림 위에 페인트만 부으면 되는 거잖아.”

지금이다.

스태프가 신호를 보냈다.

도현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신경 쓰지 마. 그냥 내가 알아서….”

“웁스.”

노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감탄사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새디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새디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유, 유진…!”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슬금슬금 멀어지는 노라와 동공 지진이 일어난 새디, 그리고 당황한 얼굴의 유진.

어느 막장 드라마 못지않은 구도였다.

“어, 어디부터 들은 거야?”

“허니트랩부터…?”

“다 들은 거잖아!”

새디의 얼굴에 절망이 들어찼다.

도현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목소리는 묘하게 힘이 없었다.

“…그, 일부러 들은 건 아니야. 네가 이걸 떨어트리고 갔길래….”

“유진, 이건…!”

“받아. 다음부터는 잘 들고 다녀. …음, 내가 한번 깨물어 봤는데 꽤 괜찮더라.”

도현이 새디의 손에 치발기를 쥐여 주었다. 치발기에는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새디가 황망한 얼굴로 치발기를 받아 드는데, 도현이 뒤돌아서 새디에게서 멀어졌다.

“유진, 잠깐만!”

새디의 외침에도 유진은 멈춰 서지 않았다. 유진이 사라진 쪽을 보던 새디가 절망적으로 외쳤다.

“나 치발기 안 써! 졸업한 지 삼 년은 넘었다고!”

어느새 다가온 노라가 그만하라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새디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망했어!”

울상이 된 새디가 치발기를 던져버렸다.

“컷! 오케이! 아주 잘했어! 자, 박수 한번 치고 갑시다!”

짝짝짝짝!

디에나의 말에 스태프와 배우들이 박수쳤다. 도현도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디에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노라는 오늘도 완벽하고, 새디랑 줄리엣 표정 연기도 최고였어! 이번 에피소드 반응이 벌써 기대되는데?”

스토리를 짜면서 재밌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괜찮아서 에피소드를 한 편이 아니라 두 편으로 구성했어도 좋았을 것 같았다.

“수고했어, 줄리엣.”

디에나가 도현에게 가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도현이 감사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제 학교 신은 다 땄고, 홈 파티 장면은 이틀 후에 찍을 거야. 그때 다시 보겠네. 혹시 촬영 구경하고 싶으면 내일도 와도 돼.”

도현은 혹했지만 거절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안 될 것 같아요. 학교에 가야 해서요.”

“보이는 것처럼 모범생이구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만나서 반가웠어.”

노라가 도현에게 와서 인사했다. 이틀 후에 찍을 홈 파티 장면에 노라는 등장하지 않으니, 지금 보는 게 마지막이었다.

“저도요. 아, 사인 정말 고마워요.”

“뭘. 나중에 너도 더 유명해지면 나한테 사인해줘.”

“당연하죠.”

“줄리! 잠시만, 너 핸드폰 있지?”

“응.”

손을 내미는 새디에 도현이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새디가 무언가를 입력하더니 도현에게 돌려주었다.

“내 번호야! 연락해야 해! 이틀 후에 보자!”

“알았어. 다음에 봐.”

도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이튿날 촬영도 끝이 났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핸드폰을 열어 확인해보던 도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B.F 로즈♡]

도현은 이름을 깔끔하게 저장해두는 편이라 전화번호부가 상당히 삭막했는데, 유독 하트가 눈에 띄었다.

도현은 이름을 다시 수정했다.

[새디 로스]

역시, 이게 보기 편했다.

연기라는, 무척이나 감성적인 일을 하면서, 의외의 부분에서 감성이 메마른 도현이었다.

* * *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

도현은 오늘따라 쨍쨍한 햇빛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도현의 자리가 창가와 가까운 탓인지 유독 햇빛이 강했다.

도현은 이틀 만에 오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교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몬드 사립학교도 좋았지만, 역시 델마 아카데미가 더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교실에 앉아 있으려니, 스쿨버스를 타고 온 아이들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도리토스!”

도현을 발견한 니콜라스가 금방 달려왔다. 친구한테 이런 감상이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귀를 팔락이며 달려오는 브로콜리가 생각났다.

“오늘은 왔네? 촬영 다 끝난 거야? 어땠어? 노라는 만났어? 누구 봤어?”

질문이 순식간에 몰아쳤다.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하나하나 답변해 주었다.

“촬영은 아직 안 끝났어. 내일 수업 중간에 가야 할 것 같아. 촬영은 재밌었어. 다들 친절했고. 노라는 만났어. 노라랑 새디 봤어.”

“진짜?! 실제로 보니까 어때?”

“굉장히 멋지더라.”

니콜라스가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노라는 의 조와 실제 성격도 비슷했는데, 시크한 얼굴과 쿨한 성격이 정말 멋있었다.

“실제 성격도 조랑 비슷해.”

“정말?”

니콜라스가 더 얘기해 달라며 졸랐다. 도현이 그녀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말하고 있는 사이, 진과 다비드가 등교했다.

“도오리야!”

진이 달려왔다. 다비드가 그 뒤를 따랐다.

이틀 만에 만난 건데, 이 주일은 못 본 것처럼 반겨주는 진에 도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뺨을 살짝 붉히고 웃는 얼굴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니콜라스에게 얘기해 주었던 것처럼, 도현은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에이미와 조 역할의 배우를 만났다는 얘기에 무척 신기해하던 진이 물었다.

“그럼 로리는? 혹시 로리는 못 봤어?”

로리.

본명은 시어도어 로렌스, 애칭은 로리 혹은 테디. 원작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장난기 많고 유쾌한 이웃집 소년.

원작에서도, 에서도 주 남주인공 느낌인 인물이었다.

다만, 원작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러브라인으로 엮이는 인물이었다.

원작에서 조와 어릴 때부터 친구 관계로 지내며 단순한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었던 로리는 조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장녀인 매그가 결혼해서 경제적으로 가장이 되었고 셋째 베스가 성홍열을 앓아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상황에서 조는 로리의 청혼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 문제 때문에 로리의 청혼을 거절한 조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로리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 조는 로리를 다시 찾지만, 로리는 이미 넷째인 에이미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전개이긴 하지만, 에이미는 사실 오랫동안 로리를 짝사랑해 왔다. 한평생 조에게 밀려 로리에게 뒷전이었던 에이미의 마음을 알게 된 후, 도현은 <작은 아씨들>의 내용이 새롭게 보였다.

여기까지가 원작의 이야기.

원작과 달리 에서는 에이미와 로리가 엮이지 않는다. 이유는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원작에서는 에이미가 성장하지만, 시트콤에서는 상당히 어린 나이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17세 설정인 로리와 11세 설정인 에이미의 러브라인을 밀기에는 디에나 감독이 제정신이었다.

그래서 로리의 러브라인 상대는 주로 매그와 조였다.

에이미가 주인공인 에피소드에서 로리의 비중이 적은 건 필연적이란 소리였다. 도현이 그를 만나지 못한 것도 말이다.

“로리는 못 봤어. 나랑 촬영 장소가 겹치지 않아서.”

“정말? 아쉽다….”

아이들은 잠시 로리와 이어질 사람이 누굴지 제각각 의견을 내며 떠들어댔다. 진은 매그-로리 파였고 니콜라스는 조-로리 파였다. 그리고 다비드는 놀랍게도 가장 팬덤이 적다는 베스-로리 파였다.

도현은 이를 흥미롭게 듣다가, 이야기가 노라를 주제로 흘러가자 한 가지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맞다.”

도현이 가방에서 무언갈 꺼냈다.

“뭐야?”

니콜라스가 관심을 보였다. 도현은 내심 아이들의 반응을 기대하며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니콜라스는 어리둥절하게 종이를 받아 들었다.

“이게 뭐….”

니콜라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사, 사인…?!”

심지어 밑에는 ‘To 니콜라스’라고 쓰여 있었다.

“선물이야.”

“너, 너…!”

니콜라스가 잔뜩 감동한 얼굴을 했다. 도현은 니콜라스의 울 것 같은 얼굴을 지금 처음 보았다.

울망거리는 눈동자에 도현이 뿌듯해했다.

니콜라스의 감사와 찬양 어린 말을 듣던 도현이 종이 두 장을 더 꺼내서 진과 다비드에게도 주었다.

“내 것도 있네?”

“나도…?”

진은 기뻐하며 받았고, 다비드는 조금 얼떨떨한 눈치였다. 도현이 자신을 챙겨준 게 어색한 것 같았다.

그래도 노라의 사인은 반가운지, 다비드는 사인지를 만지작거리며 은근히 기뻐했다.

* * *

다음 날.

도현은 마지막 촬영까지 성공적으로 끝냈다.

홈 파티이기 때문에 그동안 촬영했던 학교 부지가 아닌 다른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는데, 아역 배우들이 많아서 그런지 파티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파티 분위기였다.

그래서 연기하기도 수월했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나서 디에나가 도현에게 다음에 유명해지면 한 번 더 출연해 달라고 말했다. 도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좋다고 대답했다.

새디는 도현과 헤어지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한 채, 도현은 새디와 헤어졌다.

오스카의 차에 탄 도현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아쉬워?”

얼굴에서 티가 났나 보다.

도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오랜만에 한 촬영이었으니까요.”

“천생 배우구나.”

짧게 웃던 오스카가 말했다.

“시트콤이 나가고 나면, 여기저기서 연락이 올걸? 조금만 기다려봐.”

“정말 그럴까요?”

“그럼.”

오스카는 확신했다.

오 년이 긴 경력은 아니지만, 그는 다양한 배우를 맡은 경험이 있었다. 배우를 가장 가까이서 접하는 건 다름 아닌 매니저였다. 그리고 오스카는 매니저지만, 가끔 에이전트 업무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단연코, 도현은 오스카가 만나본 배우 중에서 가장 스타성이 뛰어났다.

시트콤을 촬영하면서, 오스카는 도현을 맡게 된 건 행운이라고 확신했다. 도현은 뭔가 다른 걸 보여줄 것 같았다.

‘나도 전담 매니저가 될 수 있으려나?’

아직은 먼 얘기 같지만.

“거기 음료수 사놨어. 그거 좀 마셔.”

“어, 초콜릿 음료네요?”

“응, 너 초콜릿 좋아한다며.”

“맞아요. 고마워요, 오스카.”

도현은 꼬박꼬박 고맙다고 말했다. 아직 매니저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저번 주에, 맡은 아역 배우 중 한 명이 울고불고 떼를 써서 엄청나게 진땀을 뺐던 오스카는 마음이 힐링되는 것을 느꼈다.

“방영은 다음 주에 될 거야. 다음 주면 최소 500만 명이 너를 보게 되는 건데 기분이 어때?”

500만 명.

에서 최고로 인기 있었던 에피소드는 1,000만 명을 넘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고, 웬만한 에피소드는 항상 400에서 500만 명의 시청률을 자랑했다.

오스카가 저렇게 말하니 확 와닿는 기분이었다.

“음….”

초콜릿 음료를 마시던 도현이 고민했다.

유튜브 때도 그렇고. 굉장히 실감이 안 나는 숫자들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숫자가 너무 커서….”

“응? 하하, 숫자가 너무 크구나?”

오스카가 귀엽단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숫자 세기를 어려워하는 어린애 정도로 느낀 것 같았다.

도현은 오해를 정정해 주어야 할까 싶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저 시선이 바뀔 것 같진 않아 포기했다.

“그래. 몇백만은 아직 너무 큰 숫자지. 엄청 많은 사람이 널 보는 거야. 샌디에이고의 도시권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 한 번씩 너를 본다고 생각하면 돼. 엄청나지?”

“…네.”

수준을 낮춰서 친절히 설명해주는 오스카에 도현이 떨떠름히 대답했다.

도현의 영혼 없는 대답에도 오스카는 흐뭇한 눈초리로 도현을 보았다. 역시 애는 애라고 생각하면서.

* * *

한 미국의 가정집.

니나는 즐겨 보는 시트콤이 방송되는 채널을 틀었다. 니나가 티브이를 틀자, 니나의 오빠인 티미도 소파에 앉았다.

오늘은 니나가 가장 좋아하는 가 방영하는 날이었다.

“티미, 가서 팝콘 좀 가져와.”

“네가 가져와. 넌 다리가 없어?”

“아. 내가 더 멀잖아. 빨리이.”

티미는 ‘저 돼지를 어떻게 하지?’란 눈초리로 보다가 팝콘을 가져왔다. 안 가져오면 한 시간 내내 들들 볶일 게 뻔했다.

“너 살쪘어, 알아?”

“닥쳐, 티미.”

니나가 신경질적으로 발로 티미를 밀쳤다. 안 그래도 최근 몸무게가 불어서 고민인 니나였다.

티미는 그 팝콘을 내려놓으면 된다고 하려다가, 더는 말을 꺼내지 말라는 니나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평화를 되찾은 두 사람은 사이좋게 팝콘을 나눠 먹었다.

아이스크림 광고가 끝나고.

익숙한 OST가 들렸다. 음악이 흘러나오며 시트콤의 장면 장면을 모아놓은 클립이 지나갔다.

“시작한다!”

니나가 소파에 늘어트렸던 몸을 바로 했다.

화면에 이라는 하얀 글자가 떴다가, 360도 뱅뱅 돌며 사라졌다. 동시에 음악 소리도 작게 줄어들었다.

* * *

마치가 거실.

거실 한가운데 길게 놓인 갈색 소파 위에 에이미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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