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발아 發芽 (15)
긴장한 기색의 에이미가 화면에 보인다.
음료수를 연신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소녀가 느끼는 초조함을 드러냈다.
그런 에이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에이미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동시에, 화면도 에이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 유진이 당황한 듯 의아한 듯 애매한 얼굴로 에이미의 앞에 서 있었다.
“네가 날 불렀어?”
유진이 에이미를 가만 응시했다.
반 친구들이 누가 너를 부른다고 말하길래 나온 참이었다. 아는 애인 줄 알았는데, 모르는 얼굴이라서 당황하길 잠깐.
유진은 이 소녀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했다. 유진은 에이미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응. 너….”
꿀꺽.
마른침을 삼킨 에이미에 덩달아 긴장한 기색이 된 유진이 에이미의 말에 집중했다.
“포도 주스 좋아해?”
“…포도 주스?”
갑자기 웬 포도 주스….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유진이 얼떨결에 답했다.
“좋아하긴 하는데….”
“그럼 이거 마실래?”
단번에 표정이 밝아진 에이미가 불쑥 음료수를 내밀었다. 그와 반대로 유진의 표정은 상당히 떨떠름해졌다.
“…네가 마시던 걸?”
“응. 난 더 안 마실 거거든.”
처음 보는 여자애가, 먹던 포도 주스를 더 안 마실 거란 이유로 주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쓰레기 처리인가?
에이미의 밝은 낯을 보던 유진이 낯을 흐렸다.
…아냐. 쓰레기 처리라고 하기엔, 반에서 굳이 불러서 건네는 수고가 너무 정성스럽잖아.
모질지 못하고 긍정적인 유진의 성정이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결국, 굉장히 복잡한 얼굴을 하던 유진이 포도 주스를 건네받았다.
“어… 고마워.”
“괜찮아. 그럼 맛있게 마셔! 오래 숙성된 포도라 맛있더라!”
“그래, 근데 너 이름….”
유진이 물어볼 새도 없이 에이미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화면에는 유진과 에이미가 사라진 복도만이 잡혔다. 홀로 남은 유진이 음료수를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잠시 미지의 것을 보듯 음료수를 노려보던 유진이 이내 에이미가 사라진 곳을 보더니, 한숨 쉬듯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니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살짝 웃는 얼굴이 상당히 잘생… 아니, 웃는 얼굴에서 미묘한 기류가 보였다.
‘설마…?’
하지만 니나는 확신하지 않았다. 내용이 예측을 뛰어넘은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다만 잘생긴 새 등장인물에 기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니나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콩콩 뛰었다.
유진이 다시 반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툭!
반에서 나오려던 아이와 유진이 그대로 부딪혔다.
“미안해!”
사과하는 친구에게 유진이 자신도 앞을 잘 못 봤다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건 어쩌지?”
반 친구가 바닥을 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음료수가 흔들리며 내용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달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가 닦을게.”
“아냐! 같이 닦자!”
두 사람은 사이좋게, 바닥에 흘린 음료수를 닦았다.
본의 아니게 에이미의 마수에서 벗어난 유진이었다.
화이트보드 상단에 ‘에이미 미술 대회 우승 작전 회의’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쓰인 ‘포도 주스’가 빨간색 마커로 직직 그어져 있다.
화이트보드를 비추던 화면이 멀어졌다.
마치가 거실 풍경이 나타났다.
“멀쩡했어!”
에이미가 분노의 발 구름을 했다.
“조는 순 엉망이야! 걔 완전 멀쩡했다고!”
조가 해괴한 얼굴이 되었다.
“뭐? 걘 위가 강철이래?”
“됐어. 조 의견은 별로야! 다른 의견 없어?”
가만히 있던 로리가 손을 들었다.
“미술 대회 그림은 어디서 보관해?”
“반에서.”
“그럼 그걸 빼돌리면 되잖아?”
“로리! 그건 나쁜 짓이야!”
“…저번에 음료수 작전은 안 말렸잖아?”
“그건 먹을 거잖아!”
도통 알 수 없는 베스의 기준에 네 사람이 묘한 눈길로 베스를 보았다.
그렇게 두 번째 작전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에이미가 스쿨버스를 타는 대신 매그의 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 일찍 등교했다. 첩보 작전이라도 펼치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건물에 들어간 에이미가 어느 반 앞에 가서 섰다.
드륵-
긴장한 얼굴의 에이미가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일단, 잠입 클리어.
비장한 얼굴을 한 에이미가 주먹을 쥐었다.
…좋았어, 이제 그림만 빼돌리면!
“…어, 넌?”
“!!!”
에이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라서 딱딱하게 굳은 에이미에 유진이 웃으며 ‘Freeze Tag 하는 거야?’ 말하더니 에이미의 팔을 툭 쳤다.
에이미가 얼음에서 깨어난 듯 퍼드덕 뒤로 물러났다.
“여긴 무슨 일이야?”
유진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유진은 부모님이 차로 태워다 주셔서 항상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등교하는 편이었다.
이 이른 시각에 친구를, 그것도 어제 먹던 포도 주스를 준 애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유진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이미 당혹감에 사고 체계가 고장 난 에이미가 되는 대로 말했다.
“너… 네가 보여서!”
에이미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헛소리에 유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내가 보여서 들어왔다고?”
“으, 응! 이제 봤으니 갈게, 안녕!”
“잠깐! 너 이름이…”
드륵, 탁!
유진이 잡을 새도 없이 문을 닫고 나간 에이미가 줄행랑을 쳤다.
“…또 이름 못 들었네.”
유진이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손이 지나간 자리가 은근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게, 에이미의 두 번째 작전도 실패했다.
“…역시!”
아까부터 기대를 걸고 있었던 니나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니나의 예상대로, 이 새로운 인물은 에이미의 러브라인 상대인 것 같았다!
‘이건 된다!’
철부지인 에이미와 성숙해 보이는 유진의 조합이 아주 괜찮았다. 보는 사람을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풋풋함이 있었다.
“유진 에이미랑 이어질 것 같아!”
“뭐? 왜? 갑자기?”
눈이 발바닥에 달린 티미가 해괴한 얼굴을 했다.
저러니까 매리를 밀지.
잠시 한심한 눈초리로 티미를 보던 니나가 화면을 보았다.
화이트보드에 쓰인 ‘포도 주스’와 ‘빼돌리기’ 위에 빨간색으로 엑스 자가 그어져 있었다.
에이미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안 돼! 곧 대회라고! 이대론 위험해!”
“꽤 하는 놈인걸.”
조가 흥미로운 눈치로 손에 턱을 괴었다.
그때.
베스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기…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 볼 생각은 없는 거야?”
조가 경악한 눈으로 베스를 보았다. 조가 베스의 양어깨를 붙들며 타박하듯이 말했다.
“베스! 그런 건 찌질한 애들이나 하는 거야.”
“쟨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매그가 혼잣말을 하자 로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톰과 문자를 주고받던 매그가 핸드폰을 응시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걔한테 고백하는 건 어때? 신경 쓰여서 붓도 손에 안 잡힐걸.”
“뭐? 싫어!”
질색하는 에이미에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로리가 은근히 거들었다.
“그럼 고백 편지는? 너인 걸 모르면 되잖아.”
“…그러네?”
팔랑팔랑.
에이미의 얇은 귀가 팔랑였다.
뚠, 뚜둔, 두둔.
쓸데없이 비장한 배경음이 깔렸다. 어디 첩보 영화의 잠입 장면에나 삽입될 것 같은 배경음이었다.
에이미가 긴장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손에는 어제 자매들의 도움을 받아 쓴 연애편지가 있었다. 첨삭은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제일 잘 안다고 주장한 로리가 맡았다.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는 법.
에이미는 이번에는 등교 시간이 아니라 수업 시간을 노렸다. 유진네 반이 체육으로 인해 운동장에 나가는 시간을!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 유진의 자리에 편지를 놓는 걸 성공한 에이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나왔다.
반으로 돌아간 에이미는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실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에이미, 누가 너 찾는데?”
“응? 나?”
에이미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것에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미는 별생각 없이 교실 밖으로 나갔다.
에이미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돌돌 만 금발이 고갯짓을 따라 공중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이내 한 곳에 시선이 닿았다.
“응?”
주춤.
에이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유진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상체를 반듯이 세웠다.
“안녕.”
“어? 넌… 네가 왜?”
자신을 부른 사람이 유진임을 깨달은 에이미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에이미를 보던 유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팔랑.
유진의 손에서 팔랑거리는 편지가 유독 눈에 희게 박혔다. 에이미의 얼굴이 편지지 색만큼이나 하얗게 질렸다.
“이거, 너지?”
“아니? 나 아닌데? 내가 너한테 고백할 리가 없잖아!”
격렬하게 고갯짓을 하며 부정하는 에이미에 유진의 얼굴에 점차 웃음이 피어났다.
그건, 정말 ‘피어났다’는 표현 외에는 적절한 게 없었다.
유진이 나올 때마다 자신의 흑역사에 괴로워하며 흐린 눈으로 보았던 티미조차도, 눈을 제대로 뜨고 화면을 보았다.
그만큼 수줍은 듯, 기쁜 듯, 혹은 자신감에 찬 듯 웃는 소년은 사랑스러웠다.
“고백 편지라고 한 적 없는데.”
쿠궁!
만화였다면 머리에 돌이 떨어졌을 법한 표정을 지은 에이미가 고개를 틀었다.
환장하겠단 심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 니나와 티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고개를 든 에이미가 태연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포도 주스 흘렸더라.”
유진이 팔랑이는 편지지에 동그랗게 찍힌 보라색 자국이 화면에 선명히 잡혔다.
시트콤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그 웃음소리 위에 티미와 니나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덧입혀졌다.
“이제 이름 알려줄 거야?”
“에, 에이미야.”
“에이미.”
유진이 에이미의 이름을 말하더니 환하게 웃는다.
그 햇살 같은 미소에 에이미가 퇴치당하는 병균처럼 물러서기도 잠시.
“큼, 흠… 저기.”
방금까지 밝은 기운을 뿜뿜 뿜어내던 유진이 머뭇거리며 에이미를 불렀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던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조금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단숨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미친, 미친, 미친!”
퍽! 퍽!
니나가 격하게 반응하며 티미의 팔을 내리쳤다. 티미가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무시한 니나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 좀 그만…!”
“에이미.”
조심스럽게 에이미를 부르는 소리에 티미가 짜증을 내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니나도 티미를 내려치던 것을 관두고 주먹을 꽉 쥐었다.
에이미와 유진 사이의 긴장감이 그들에게까지 옮겨 붙은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더 알고 싶어. 너만 괜찮다면….”
잠시 망설이던 유진이 에이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 주에 내 홈 파티에 오지 않을래?”
“허억!”
소년의 치기가 어려 있으면서도 수줍은 얼굴로 고백하는 유진에 심장을 공격당한 니나가 가슴께를 붙잡았다.
부끄러우면서도 자신감 있고, 동시에 긴장했음을 숨기지 않는 얼굴은 그 누가 보더라도 사랑스럽다고 여길 만했다.
풋풋함.
그 단어를 사람으로 형상화하면 유진일 것 같았다.
그건 에이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답지 않게 조금은 소심히 대답했다.
“…응.”
소녀의 대답이 떨어지자, 꽃이 만개하듯이 유진의 얼굴에 미소가 꽃피었다.
푹!
니나는 무언가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덕통사고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