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발아 發芽 (16)
“성공했어?”
언니들이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에이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옷! 옷을 골라야 해!”
괴성을 내지른 에이미가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 올라갔다. 거실에 남은 자매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쟤 왜 저래? 어디 아파?”
“원래 좀 이상했잖아.”
“아, 그럼 정상이네.”
핑, 피융!
조와 매그가 다시 하던 비디오 게임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베스가 말했다.
“그래도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흐음.”
게임기를 들고 연신 폭탄을 날리던 조가 짧게 비음을 내더니 에이미가 사라진 방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다음 날 아침.
“흠, 흐흠~”
아침부터 약간 맛이 간 기색으로 식사를 하는 에이미에 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가족들의 시선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에이미가 연신 히죽거렸다.
그때, 에이미의 눈에 맞은편에 앉은 베스가 들어왔다.
“…베스?”
“응?”
“그거, 뭐 하는 거야?”
“아, 이거?”
베스가 수줍게 웃었다.
“요즘 이빨이 간지럽더라고. 그래서 새로운 이빨이 나려나 싶어서….”
“…그거 영유아용 아니야?”
“이걸 어떻게 그런 아기들이 써!”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베스가 꺄르륵 웃었다. 세 자매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아! 잠깐.”
베스가 손을 들어 보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 에이미! 너도 하나 줄게!”
“아니, 난 됐,”
“커플 치발기야! 동생이랑 커플 치발기라니 완전 멋지다! 그치? 혹시 몰라 두 개 구매했는데, 다행이야!”
베스가 잔뜩 설렌 표정을 지었다.
떫은 표정이 된 에이미에게 매그와 조가 눈치를 주었다. 대충 맞춰주라는 뜻이었다.
베스는 착하지만 그만큼 마음이 여려서 거절당하면 울 가능성이 높았다. 울지 않는다고 해도 하루 내내 시무룩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결국 에이미는 싫어 죽겠는 얼굴로 검지와 엄지로 치발기를 받아 들었다.
“커플 치발기 축하해!”
“와, 너무 부럽다.”
차례로 매그와 조였다. 조의 영혼 없는 리액션에도 베스가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에이미만 빼고 행복해진 마치가 아침이었다.
조는 제멋대로에 성격도 불같고 거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보이는 대로 폭력적이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알고 보면 자매 중에서 가장 잔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게 시청자들이 조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전날.
관심 없다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비디오 게임을 하던 조는 당연하다는 듯이 초등학교 건물에 와 있었다. 지나가던 아이들이 조의 불량한 차림새에 슬금슬금 피해 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무시한 조가 눈으로 에이미를 찾았다.
그때.
“그래서 내가 말이야….”
하하하, 호호호!
조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시시덕거리는 유진과 에이미가 잡혀 있었다. 그들의 주위로만 핑크빛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꺄르륵!
에이미가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쟤 뭐야?”
아무리 봐도 저 남자애는 에이미가 말하던 ‘유진’이 맞았다.
그런데 쟨 대체 뭘 하는 거지?
조가 황당함과 어이없음이 담긴 눈초리로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을 느낀 에이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조!?”
벌떡!
한껏 당황한 낯의 에이미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너….”
조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에이미가 고개를 격렬히 저었다. 그 다급함이 묻어나는 얼굴에 조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조!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바로 가려던 에이미가 멈칫한 후 계단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진을 보았다.
“유진, 미안! 이따 다시 보자!”
“어… 에이미?”
유진이 손을 뻗어봤지만, 곧바로 달려 나간 에이미에 의해 손이 허공을 갈랐다.
유진이 멀뚱한 얼굴로 조를 질질 끌고 가는 에이미를 보았다. 불퉁한 표정의 조에게 에이미가 잔뜩 겁먹은 햄스터처럼 무언가 애원하고 있었다.
“풋…!”
유진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봐도 봐도 재밌는 애였다.
웃음을 멈춘 유진이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금방 돌아올 것 같진 않으니, 이만 반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멈칫.
반으로 돌아가려던 유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어… 저건.”
허리를 숙여 물건을 집어 든 유진이 잠시 고민하는 눈초리로 에이미와 조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벽을 비추던 화면이 점차 옆으로 옮겨갔다. 그에, 벽에 비딱하게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낀 조와 그런 조를 초조한 낯으로 보고 있는 에이미가 화면에 들어왔다.
조가 무표정한 얼굴로 에이미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치워 버리겠다며?”
“치울 거야! 지금 작전 중이라고!”
“무슨 작전?”
“음… 으으….”
고민하던 에이미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아!”
감탄사를 한번 터트리더니 빠르게 두 손을 꽃받침처럼 턱에 가져다 댔다.
깜빡깜빡.
커다랗고 사랑스러운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난데없이 시각적 공격을 당한 조가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는 사이, 에이미가 밝게 외쳤다.
“미인계야!”
“푸흡! 조 표정 좀 봐!”
티미가 팝콘을 씹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탓에 입에서 튀어나온 팝콘 부스러기가 사방에 떨어졌다.
그런 티미를 보는 니나의 표정이 마치 에이미를 보는 조처럼 썩어 들어갔다.
하등하고 혐오스러운 무언갈 마주한 눈빛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티미가 연신 재밌다며 낄낄거렸다.
“…….”
“…….”
두 자매 사이에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벽에 기대어 섰던 조가 몸을 틀어 에이미에게서 몇 걸음 멀어진 후였다.
에이미가 멋쩍은 얼굴로 손을 내렸다. 그런 에이미를 이제는 안타까운 생명체를 보듯 동정심이 어린 눈으로 쳐다본 조가 말했다.
“…에이미, 잘 들어. 걔가 눈이 멀어버리지 않는 이상 네 허니트랩에 걸릴 일은 없어. 절대.”
“그,”
“Never.”
반론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이 아주 단호했다. 에이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쯧.”
한번 혀를 찬 조가 말했다.
“그냥 내가 도와줄게. 걔 그림 위에 페인트만 부으면 되는 거잖아.”
“신경 쓰지 마. 그냥 내가 알아서….”
“웁스.”
그 감탄사는 니나와 조의 입에서 동시에 나왔다. 다만 조는 무표정했고, 니나는 손에 땀이 차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조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멀뚱히 서 있는 유진이 있었다.
에이미의 눈에 지진이 찾아왔다.
“유, 유진…!”
“어떡해!”
니나가 옆에 있는 티미를 내리쳤다.
화면에는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는 조와 사정없이 눈동자가 흔들리는 에이미, 그리고 어색한 얼굴의 유진이 마주 보고 있었다.
“안 돼! 둘은 이어져야 한다고!”
니나는 이미 유미-유진, 에이미를 미는 팬덤으로 니나가 방금 떠올렸다-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간 금이 마치 자신의 심장에 그어지기라도 한 듯이, 니나는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내가 보기엔 안 이어질 것 같은데.”
태연히 말하는 티미에 니나가 발끈해서 외쳤다.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니나의 마음이 어떻든, 상황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어, 어디부터 들은 거야?”
“허니트랩부터…?”
“다 들은 거잖아!”
에이미가 절망했다.
그런 에이미를 곤란한 낯으로 응시하는 유진.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일부러 들은 건 아니야. 네가 이걸 떨어트리고 갔길래….”
유진이 주섬주섬 무언갈 꺼냈다. 그걸 발견한 에이미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유진, 이건…!”
“받아. 다음부터는 잘 들고 다녀. …음, 내가 한번 깨물어 봤는데 꽤 괜찮더라.”
에이미의 손에 넘겨진 치발기에는, 흐릿하지만 분명히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니나는 연신 ‘안 돼!’라고 하면서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이놈의 는 도저히 진지해질 틈을 주지 않았다.
애매한 니나의 얼굴만큼이나 황망한 표정이 된 에이미가 치발기를 쳐다보는데, 유진이 에이미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에이미가 다급히 외쳤다.
“유진, 잠깐만!”
터벅, 터벅.
“유진!”
터벅, 터벅, 터벅.
에이미의 애타는 부르짖음에도 유진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유진의 뒷모습을 절망적으로 쳐다보던 에이미가 소리쳤다.
“나 치발기 안 써! 졸업한 지 삼 년은 넘었다고!”
넘었다고!
넘었다고
넘었다-
에이미의 외침이 복도 벽에 부딪혀 울렸다.
텁.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조가 에이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에이미가 흔들리는 눈으로 조를 쳐다보자, 조가 그만하라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결국, 에이미는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망했어!”
탕!
에이미가 던진 치발기가 벽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에이미는 그 소리가 꼭, 자신의 사랑에 종이 치는 소리 같았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온갖 아기자기한 것들로 꾸며진 에이미의 방.
“흐어엉!”
엉망이 된 머리카락. 퉁퉁 부은 얼굴. 주변에 잔뜩 늘어진 간식 봉지들.
실연의 아픔에 폐인이 되어버린 에이미였다.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거실 소파에 앉은 매그가 눈을 찡그렸다. 위층에서 스산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핑, 피융!
“아! 졌다!”
매그가 아깝다는 듯 외쳤다. 소파에 몸을 축 늘어트리더니, 조를 바라보았다.
“쟤 왜 저래?”
조가 어깨를 으쓱했다.
“차였거든.”
“!”
베스가 충격 어린 표정이 되었다. 깜짝 놀란 베스와 흥미진진해하는 매그에 조는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불쌍한 에이미….”
베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미의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베스. 그런 베스를 보던 메그가 다시 게임기를 들었다.
“게임이나 하자.”
“좋아.”
책임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언니들이었다.
“에이미.”
풀썩.
베스가 조심스럽게 에이미의 침대에 앉았다.
팩!
에이미가 티 나게 몸을 틀었다.
“에이미, 나 좀 봐. 그만 울어, 응?”
계속되는 베스의 부드러운 달램에 에이미가 결국 소리를 질렀다.
“네가 준 치발기 때문이잖아!”
간식 봉지를 던져대는 에이미를 침착하게 끌어안은 베스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에이미. 치발기는 사랑에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않아.”
“흑, 흐헝…!”
한참을 울던 에이미가 진정되었는지 끅끅 숨을 넘기는 소리를 냈다. 베스가 에이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베스와 에이미의 눈이 마주쳤다.
“에이미, 미술 대회 작전 회의 있잖아. 그거 마지막 작전은 내가 말해도 될까?”
“그건 이미 망했는데….”
“아직 안 망했어. 잘 들어, 에이미.”
베스가 조곤조곤 말했다.
“정정당당하게 대회를 끝낸 후, 가서 솔직히 말하고 사과해. 그러면 그 애도 네 마음을 알아줄 거야.”
조의 포도 주스 작전.
로리의 그림 도난 작전.
매그의 고백 공격 작전.
모두 실패였고 엉망이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했어도 에이미는 새로운 것을 얻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그리고 이젠, 정면으로 부딪쳐야 할 때였다.
며칠 뒤.
에이미는 미술 대회에만 집중했다. 성공적으로 작품을 마무리해 출품까지 마친 에이미가 유진의 반 앞을 서성였다.
그동안은 마주쳐도 유진이 차갑게 지나쳤다. 에이미도 그런 유진을 잡으려고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에이미가 결연한 눈빛을 했다.
“안녕, 유진.”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에이미에 유진이 당혹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잠시 멈칫하던 유진이 답했다.
“응, 안녕. 내가 갈 데가 있어서….”
“잠깐! 나 할 얘기 있어!”
그러나 유진은 멈춰 서지 않았다.
에이미가 굳은 눈빛을 하고는-
“잠깐만! 진짜 잠깐이면 돼!”
유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드러누웠다. 유진이 잔뜩 당황해서 다리를 털었지만,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에이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그러니까 대화 좀 하자니까!”
이젠 아예 드러누웠다.
마트에서 엄마 바짓가랑이를 잡고 생떼를 한두 번 써본 솜씨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이쪽을 향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유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에이미를 떼어 놓고 가려던 유진은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러다가는 유진이 포기하든지 아니면 유진의 바지가 벗겨지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얘기할 테니까 이것 좀 놔 줘!”
우뚝.
유진의 바지를 잡아당기던 에이미가 얌전해졌다.
“진짜지?”
“진짜야.”
그제야 에이미가 유진의 바지를 놔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연히 옷을 툭툭 터는 소녀에 유진이 삼 년은 늙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유진과 에이미는 한때 핑크빛 기류를 흘렸던 계단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이윽고.
“내가… 사실.”
에이미는 천천히 사건의 시작점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채.
날것 그대로.
“…….”
에이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유진이 침묵했다.
에이미가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한 채 유진을 보고 있는데, 유진이 입을 열었다.
“정말 쓰레기구나.”
“윽…!”
신랄한 평가가 에이미의 가슴에 내리꽂혔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 사과도 받을게. 하지만… 솔직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유진이 일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에이미는 다급해졌다. 에이미가 유진을 붙잡기 위해 되는 대로 외쳤다.
“하, 하지만… 네가 진짜로 좋아져 버린 걸 어떡해! 네가 좋단 말이야!”
그리고 그건 효과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진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유진이 몸을 일으켰다.
모호한 표정을 한 유진이 에이미를 내려 보았다. 에이미가 올망졸망한 시선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정말?”
“으, 응….”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한 에이미의 얼굴이 토마토가 되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유진이 말했다.
“그렇구나. 근데 지금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유, 유진.”
유진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유진을 에이미가 버려진 강아지처럼 쳐다보았다.
‘망했구나.’
니나가 탄식을 흘렸다.
확실히, 니나가 보기에도 에이미는 쓰레기 같았다. 그러니까 유진도 싫겠지.
이해는 하지만 이미 유미가 되어버린 니나는 안타까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계단을 망설임 없이 내려가던 유진이 문득 멈춰 섰다.
“호, 혹시…!”
니나의 눈이 기대로 인해 흔들렸다.
그리고.
유진이 몸을 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시선에, 유진이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주말에 만나서 더 얘기할까?”
“!”
에이미의 두 눈이 커졌다.
그건 니나도 마찬가지였다.
“티미! 내가 말했지! 둘이 이어진다고!”
니나가 흥분해서 외쳤다.
초등학생밖에 안 된 애가, 심장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니나는 대리 설렘에 발을 동동 굴렀다.
볼을 밝게 물들인 에이미가 기쁨으로 눈을 반짝였다.
“…응!”
“좋아. 약속 시간은 그대로야.”
상큼하게 한번 웃은 유진이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에이미는.
“…끼읍!”
입을 틀어막고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기어코 기쁨의 세리머니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가 거실.
소파에 앉은 조가 거실에서 난데없이 춤을 추는 에이미를 떫은 눈으로 응시했다.
“쟤 미술 대회 우승했대?”
“아니. 떨어졌대.”
“근데 왜 저렇게 기분이 좋아?”
“괜찮아! 대회는 졌지만 난 사랑을 얻었거든! 평생 솔로인 조는 모르겠지만!”
우득.
조에 손에 들려 있던 사과가 단번에 우그러졌다. 조가 손을 펼치자 후드득, 사과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조가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신경질적으로 와삭와삭 씹자, 로리가 조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니까 나랑 사귀면 되잖아?”
“꺼져.”
이때다 싶어서 들이대는 로리와 오늘도 틈을 허락하지 않는 조였다.
로리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타격은 없었다.
이런 짝사랑도 벌써 오 년째니까.
그 주 주말.
에이미는 유진의 홈 파티에 참석했다. 유진의 친구들이 거의 다 온 건지, 홈 파티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아이들 중에서 단연코 유진이 제일 멋있었다. 에이미는 유진을 보고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붉혔다.
유진은 에이미의 걱정과 달리, 더 이상 에이미에게 앙금이 없는 것 같았다. 에이미는 유진과 앞으로 펼쳐질 핑크빛 나날들을 상상했다.
그리고 파티가 끝나갈 때.
유진이 에이미를 불렀다.
두 사람은 정원에 나갔다.
달빛은 적당했고 정원은 넓진 않았지만, 꽃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었다.
두근두근.
아까부터 에이미의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에이미.”
“으, 응?!”
과도하게 긴장한 에이미가 삑사리를 내었다. 에이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이미, 나 사실 네게 할 말이 있어.”
“뭐, 뭔데…?”
에이미가 은근한 긴장과 기대가 서린 눈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이 공기, 이 습도, 이 느낌.
드라마의 애청자인 에이미는 알고 있었다. 이건 분명, 사랑의 징조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이어지기 직전의 기류였다!
에이미가 손을 말아 쥐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면 나도 좋아한다고 해줘야지.
…나도 첫 남자친구가 생기는 거야!
에이미의 숨이 떨렸다.
“에이미, 사실 나….”
꿀꺽.
에이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덩달아 니나도 숨을 멈춘 채 화면을 응시했다.
그래! 그거야!
그대로 말하는 거야!
니나가 속으로 열성적으로 유진을 응원했다.
그리고.
긴장한 얼굴을 한 유진이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사실 나, 여길 떠나.”
“나도 널 좋아… 응?”
“부모님 일 때문에 미국에 와 있었는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 같아.”
“…뭐?”
“미안해, 에이미. 며칠 전에 결정된 거라… 너랑은 사이가 틀어졌으니 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미 알겠다고 말했고. 이번 주말까지만 여기서 보내고, 다음 주에는 바로 한국으로 넘어갈 거야.”
“아니, 이게 뭔… 장난이지? 그렇지? 응?”
“미안해, 에이미.”
달빛에 드러난 얼굴엔 미안함이 어려 있었지만 단호했다. 에이미는 할 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진이 살짝 웃었다. 달빛 때문인가, 쓸데없이 아련하고 청초한 웃음이었다. 달맞이꽃이 사람이 된다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니나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금 주식이 완전히 폭락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웃는 게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쟨 웃는 게 왜 이렇게 예쁜 거지?
순간적으로 유진이 꺼낸 폭탄 같은 발언을 까먹을 정도였다.
“내 말이 맞지?”
옆에서 비웃어대는 티미 덕분에 니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니나의 눈에 티브이 화면이 들어왔다.
화면에 나온 에이미는 완전히 패닉에 젖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에이미를 향해 유진이 아련히 말했다.
“그래도… 오늘 너랑 놀아서 즐거웠어. 마지막으로 이렇게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유진! 어딨니, 유진!”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아니, 유, 유진…!”
에이미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서늘한 밤공기를 가를 뿐이었다.
털썩!
에이미가 잔디밭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얼굴에는 허탈함과 허망함이 가득했다.
“이게 뭐야아!”
뭐야아
뭐야-
뭐-
에이미의 절규가 정원에 메아리쳤다.
그렇게.
에이미의 첫 연애는 완전히, 회생의 여지없이, 폭삭 망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