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새로운 인연 (2)
“…좋아, 나 이제 준비됐어.”
오스카가 결연한 눈으로 말했다.
이장혁과 통화를 마친 후, 도현은 오스카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대본을 결정했다는 내용에 곧바로 통화를 건 오스카는 도현에게 재차 확인했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려던 도현은 오스카의 만류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중요한 일은 얼굴을 마주 보고 들어야 한다는 오스카의 신념에 따른 일이었다.
상당히 아날로그적이지만, 본인의 방식이라니 도현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하여 오스카가 도현의 집에 도착하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테이블 위에는 네 개의 대본이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꿀꺽-
오스카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천천히 손을 들어 대본 위로 가져갔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오스카의 시선이 따라왔다.
도현은 잠깐 다른 대본을 건들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놀라운 자제력으로 이겨냈다.
스윽-
세 번째로 놓인 대본이 오스카 앞으로 밀어졌다.
“이거예요.”
“이건….”
오스카가 꽤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대본이 별로여서가 아니었다. 비중도 괜찮은 편이고 역할도 매력적이라 오스카는 내심 도현이 이 대본을 선택해주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저번에는 다른 대본을 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도현에게 온 대본은 네 개.
도현의 첫 데뷔작이 인상 깊었는지, 나머지 세 개는 모두 처럼 어두운 분위기였다. 도현도 그 대본들이 마음에 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도현이 내민 대본은 유일하게 밝은 분위기를 가진, 음악이 가미된 코미디 장르의 영화였다.
‘그런 게 얼굴에 티가 났나.’
도현이 괜히 제 뺨을 한번 문질렀다. 직접 말한 적은 없는데, 오스카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냥, 그게 가장 재밌을 거 같아서요.”
굳이 솔직한 이유를 대자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 같다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이 보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마음이 진실이든 아니든 말이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대본도 훌륭했고 배역도 재미있었다. 도현의 취향이 둥글둥글하고 몽글몽글한 분위기와 멀지만 않았더라도, 네 개의 대본 중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었을 만큼이나.
“확실히 정한 거지? 더 생각할 시간 필요 없고?”
도현의 눈이 테이블 위에 놓인 대본들을 훑다가, 홀로 툭 튀어나와 있는 대본에 닿았다. 흰 종이 위에 쓰인 이란 글자가 유독 선명히 눈에 박혔다.
곧 미련 없이 고개를 든 도현이 단단한 눈으로 오스카를 응시했다.
“네. 이게 좋아요.”
그렇게 도현의 두 번째 영화 출연이 결정되었다.
* * *
웨일 픽처스 본사.
이미 1차 영상 오디션을 통해 합격한 배우들이 2차 오디션을 보기 위해 모인 장소이지만, 긴장감이 있기보다는 꽤 어수선했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의 오디션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평균 연령대가 매우 낮은 탓이었다.
칭얼거리는 아이와 달래는 보호자, 혹은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수다 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메웠다. 이 소란 속에서도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아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존재감을 뽐내는 아이가 있었으니.
매니저로 추정되는 남자의 옆에 앉아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대본을 읽고 있는 한 소녀였다.
제 몸만 한 기타 가방을 메고 있는 것도 눈에 띄긴 했으나, 그건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아이 중 대다수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소녀가 눈에 띄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 드문드문 물든 보라색의 브릿지. 가죽 재킷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 거기에 통이 넓은 바지까지. 아무리 봐도 록 스피릿이 제대로 들어간 패션이었다.
시선이 쏠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선글라스를 머리띠처럼 쓰고선 대본을 팔랑팔랑 넘기는 소녀.
그때, 한 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 분 후에 오디션 시작합니다.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 있으면 지금 빨리 말해 주시고요. 있으십니까?”
손을 드는 아이 두엇 정도가 같이 따라 들어온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남은 직원이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앞서 설명해 드렸지만, 다시 한번 안내해 드립니다. 오디션장에 들어가시면 심사 위원분들과 카메라가 있을 겁니다. 배우분들은 심사 위원분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카메라를 보고 준비해 온 연기를 하시면 됩니다. 들어가시면 다시 안내해 드리니까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촬영된 영상은 오디션을 위해 사용되고, 이후 삭제될 예정입니다. 보호자는 한 명까지 동반 입장이 가능하나, 오디션장에서 배우분들에게 말을 걸거나 하는 행위를 하면 안 됩니다.”
이런저런 사항을 안내하던 직원이 다시 나가고, 긴장감이 맴돌던 대기실이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소녀의 옆에서, 소녀보다 더 긴장한 기색으로 앉아 있던 남자가 물었다.
“목은 안 말라? 물 줄까?”
“됐어.”
“목캔디는?”
“아, 진짜! 필요 없다니까?”
“알았어….”
잠시 수그러들었던 남자가 은근슬쩍 물었다.
“잘 할 수 있지?”
대본에 시선을 고정하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 같은 눈매가 갸름해졌다. 블루 사파이어를 박아 놓은 것 같은 눈동자가 형광등 아래서 형형하게 빛났다.
“당연하지.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샐쭉 웃는 얼굴이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건, 그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 * *
“감사합니다!”
아이가 우렁찬 인사말을 남기고 나갔다.
‘괜찮은데….’
“뭔가 아쉬워.”
“예?”
“아뇨, 아닙니다.”
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스티브 로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스티브 감독이 도현을 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생각 없이 틀어 놓은 TV에서 가 재방송을 하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도현을 본 순간 스티브는 직감했다.
‘저 애다!’
마침 스티브의 각본에도 동양인 아역 배우가 한 명 필요했다. 이게 운명이 아닐 리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스티브에게 필요한 역할은 너드라는 건데, 속 유진은 너무 반짝반짝했다. 너드라기보다는 학교 킹카나 스타 정도가 어울렸다.
이 걱정은 금방 해결되었다. 도현이 작년에 꽤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최연소 베니스 수상자라는 걸 알게 된 후, 도현이 출연한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도현의 연기를 봐버린 스티브 감독의 눈이 너무 높아져 버린 것이다.
제작사에서 주연 배우 후보를 가지고 와도 영 눈에 차지가 않았다. 조연은 하나씩 캐스팅이 완료되어 가는 와중에 주연은 하나같이 아웃이었다.
‘주연 배우면 적어도 조연한테 밀리면 안 된다’라는 스티브의 생각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주연 배우를 캐스팅하고 조연 배우는 오디션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임에도, 조연 캐스팅을 끝낸 후 주연 오디션을 보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스티브 로이가 신청서를 다음 장으로 넘기다가, 눈에 들어오는 이름에 눈썹을 들썩였다.
[Luca Haper]
루카 하퍼. 이번 지원자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원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의 주역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원자이기도 하고.
본인 자체로도 현역 유명 아역 모델에, CF 경험 다수. 그 나이대에 보기 어려운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소녀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소녀의 부모님이었다.
아빠는 영화감독 맷 하퍼, 엄마는 슈퍼 모델 카이아 루이스.
심지어 본인은 세계를 사랑에 빠지게 했던 카이아 루이스의 블루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할리우드 패밀리 그 자체.
‘일단 화제성은 먹고 들어가겠군.’
‘그’ 카이아 루이스의 딸이었다. 그것도 눈동자를 쏙 빼닮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홍보 면에서는 루카 하퍼를 쓰는 게 가장 이득이었다.
그러나 스티브가 그런 부분을 신경 쓰는 인물이었다면 지금까지 주연이 공석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티브가 신청서에서 부모의 아름다운 면만 물려받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보다 의외였지.’
이 정도 인맥이면 어떤 압박이라도 가할 줄 알았는데, 루카 하퍼는 깔끔했다. 그냥 다른 지원자들과 똑같이 지원했고, 오디션을 보러 왔다.
심지어 언뜻 전해 듣기로 오디션장에 부모님을 대동한 게 아니라 매니저를 대동해 왔다고 했다.
맷 하퍼나 카이아 루이스나, 오디션장에 등장하면 다른 의미로 곤란한 건 마찬가지니 다행인 일이었다.
‘이런 건 마음에 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합격의 당락을 결정짓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루카 하퍼는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연기 경력은 전무했다.
과연,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름다운 소녀가 연기까지 잘할까?
스티브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똑똑-
“7번 지원자 들어갑니다.”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당당히 들어오는 소녀를 본 순간 스티브는 뿜고 말았다.
“푸흡!”
그건 옆에 있던 캐스팅 디렉터도 마찬가지였는지, 먹던 물이 목에 걸린 듯 콜록대고 있었다.
군데군데 보라색 브릿지가 들어간 검은 머리카락. 온몸으로 록 스피릿을 주장하는 패션, 등에 멘 기타 가방, 화룡점정으로 조그마한 얼굴을 반절이나 가린 선글라스까지.
여기서 이 소녀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 주인공, ‘캐시 와일드’ 그 자체였다!
단숨에 심사위원을 초토화시킨 소녀는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들어 올리며 손을 들어 선글라스를 벗었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눈동자가 훤히 드러나고-
“안녕하세요. 지원 번호 7번, 루카 하퍼입니다!”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10대 소녀치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명랑하게 울렸다.
* * *
“그래서 출연 결정된 거야?”
니콜라스의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왔어.”
오스카에게 대본을 결정했다고 말한 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웨일 픽처스 본사에 방문해서 감독과 기획 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스티브 감독의 요청에 따라 대본 리딩을 가볍게 해보고….
어째 스티브 감독의 눈이 과하게 초롱초롱하긴 했지만, 아무튼 계약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저번에 캐스팅이 엎어진 건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던 도현도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 진. 너 음악 학원 다닌다고 했지?”
“응? 응.”
“거기서는 기타만 가르쳐?”
“아니? 종합 음악 학원이라서 기타, 피아노, 드럼, 플루트… 되게 많이 가르쳐!”
“그래? 그럼 나도 소개해줄 수 있을까?”
“뭐 배우려고?”
도현이 씩 웃었다.
“드럼.”
은 록을 좋아하는 반항적인 소녀, 캐시 와일드가 전학 간 학교에서 록 밴드 동아리를 만들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영화였다.
그리고 에서 도현이 맡은 역할, 제이 로빈의 포지션은 드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