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새로운 인연 (3)
포지션이 드럼이라고는 했지만,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애초부터 은 록에 흥미도 관심도 없던 아이들이 캐시로 인해 모여서 밴드 활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니까.
실제 밴드 노래를 위해 사용될 코드나 박자는 매우 단순하다고 전해 들었다.
예외가 있다면, 주인공인 캐시 와일드 역할과 키보드 포지션 정도 될까.
그 외엔 금방 익힐 수 있는 수준만 요구되기도 하고… 아마, 처럼 크랭크 인 하기 전에 선생님을 불러서 가르쳐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미리 배워서 나쁠 건 없으니까.
“정말? 드럼이라니, 멋지다! 그런데 왜… 아!”
진이 깨달은 얼굴을 했다. 드럼을 배우는 게 이번 배역과 관련된 일임을 알아챈 것 같았다.
도현이 맞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세상에! 나 벌써부터 엄청 기대돼! 드럼은 언제부터 배우려고? 오늘 가볼래?”
“오늘? 이렇게 바로 가도 될까?”
“내가 선생님께 여쭤볼게!”
진이 빠른 손놀림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데, 니콜라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툭, 말을 던졌다.
“너 그러면 이제 또 바빠지겠네?”
“응?”
“작년에, 영화 찍을 때 학교도 자주 빠지고 많이 바빴잖아.”
아닌 척 말하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은근한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도현이 바빠서 같이 놀지 못했을 때 니콜라스가 많이 섭섭해했다.
물론, 니콜라스는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진과 도현은 눈치가 빨랐다. 니콜라스의 기분 정도는 금방 알아챌 정도로.
도현이 조심스러운 투로 말했다.
“이번 학기엔 그렇게 안 바쁠 거야. 촬영 시작이 아마 여름 방학 시작할 때쯤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래?”
니콜라스가 조금 살아났다.
지금 바쁘나, 나중에 바쁘나 결국 똑같은데 니콜라스는 지금 같이 놀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았다.
니콜라스의 갈색 머리카락이 꼭 살랑이는 꼬리 같아 도현이 눈을 비볐다.
‘왜 요즘 따라 니콜라스랑 브로콜리가 겹쳐 보이지.’
도현이 은근슬쩍 니콜라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기분 나빠하며 쳐낼 줄 알았던 니콜라스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아 했다.
생각해보면 니콜라스는 스킨십을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점심시간에 풀밭에서 잘 때도 꼭 바닥이 아니라 무릎에 머리를 얹었고, 평소에도 어깨동무를 자주했다.
‘니콜라스 막내였지.’
그것도 나이 차 많이 나는 막내.
나르샤와 니콜라스가 있을 때, 나르샤가 니콜라스의 머리카락을 자주 헤집었던 것 같기도 했다.
‘나르샤의 영향이구나.’
도현은 깨달음을 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다비드가 ‘개와 주인이냐’ 하며 질색한 얼굴을 했다.
“앗! 답장 왔다!”
진이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곧이어 기쁜 얼굴을 했다.
“오늘 와도 된대! 마침 드럼 선생님도 계셔서 체험도 하게 해주신대!”
“체험까지?”
“응. 원래 처음 학원에 방문하면 체험해볼 수 있게 해주거든.”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체험해볼 수 있다니 더 좋을 것 같았다. 도현은 오늘 바로 방문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 * *
오늘은 진과 다비드의 레슨 일이기도 해서 도현은 밀턴의 차를 얻어 탔다. 집에 들른 후 가는 것보다 그냥 진과 함께 가는 편이 편하고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케일리에게는 친구 학원에 놀러 갔다 온다고 연락을 해두었다.
“드럼을 배운다고?”
“네.”
앞좌석에서 운전하고 있던 밀턴이 던진 질문에 도현이 긍정했다.
“타악기에도 관심이 있었니?”
“음… 이번에 생겼어요. 제가 맡은 배역과 연관이 있거든요.”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배역과 관련해서 어디까지 발설해도 되고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 도현이었다.
그러나 드럼에 관련된 건 이미 진이 눈치채기도 했고, 밀턴이 어디서 말할 사람은 아니니까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네 사고는 정말 연기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나.”
웃으며 말하는 밀턴에 도현은 요즘 뜸해져서 잊고 있었지만, 밀턴이 도현의 바이올린에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게 생각났다.
음악 수행 평가 때 연주를 듣고는 바이올린을 배울 것을 열정적으로 권유하기도 했고, 도현이 ‘H’라는 걸 알게 된 후로도 종종 바이올린을 계속 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다.
평론을 업으로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미 갈고 닦인 보석이 묻혀 있는 게 상당히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르고 달래고 회유해도 도현은 꿈쩍도 안 했다.
그런 애가 배역이 들어오니 바로 드럼 학원을 알아보고 있으니… 도현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연기에 미친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닌가?
도현이 모호한 얼굴을 했다.
* * *
“어서 와요! 네가 도현이니?”
“네, 안녕하세요.”
진과 함께 음악 학원에 도착하니 원장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무척 반겨주었다.
밀턴이 자연스럽게 도현의 보호자를 자처해서 원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보호자를 대동했어야 하구나.’
뭐든 혼자서 하는 경향이 있는 도현이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진! 왔어?”
먼저 와 있었는지, 다비드가 이쪽으로-정확히는 진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고선 도현을 한번 보곤 툭 말을 내뱉었다.
“너도 왔냐.”
도현은 그 퉁명스러운 인사에 슬쩍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저런 인사조차 없었을 것이다.
‘인사보다 왜 진이랑 같이 왔냐고 화부터 냈겠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도현이 은근히 흐뭇해하며 웃는데, 다비드가 낯을 굳히더니 딴지를 걸었다.
“그런데 왜 네가 진이랑 같이 와?”
아르릉.
잘못 대답하면 어디 한 군데라도 물 기세였다.
“…….”
다비드는 변함없이 한결같았다.
잠시 후.
진과 다비드가 기타 레슨을 받기 위해 수업에 들어가고 도현과 도현의 보호자 역으로 남은 밀턴, 그리고 원장이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그래,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어느 정도 수준이 되길 원하는 거니?”
“간단한 곡을 칠 수 있을 정도로요. 드럼에 익숙해질 수 있는 정도면 돼요.”
도현이 곧바로 망설임 없이 답했다.
도현이 드럼을 배우고자 한 건, 엄청난 드럼 실력을 뽐내 보겠다는 욕심에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제이 로빈에게 그 정도의 실력이 있지도 않고.
도현이 원하는 건 촬영 때 드럼을 치는 폼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정도였다.
원장은 도현의 대답이 의외란 낯을 했다.
아이들일수록 목표치가 높았다. 처음 방문하는 아이들은 최고의 드러머가 되겠다거나, 어디선가 들었던 폼 나는 곡을 연주하고 싶어서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욕심이 없는 걸까, 자신감이 없는 걸까.
똑바로 마주 봐 오는 검은 눈동자를 보건대 후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정도라면 금방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한번 짧게 수업받아 보고 가겠니?”
“그래도 되나요?”
“그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려면 진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도현이 그럼 부탁드린다고 말하자, 원장이 아이가 꼭 어른처럼 말한다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잠깐만 이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 지금 드럼 선생님이 레슨 중이시거든. 10분 정도면 끝날 거야.”
“네, 감사합니다.”
도현은 원장이 내민 쿠키를 와작와작 씹었다.
얌전히 쿠키를 먹는 도현을 내버려 두고, 원장과 밀턴은 이참에 학부모 상담을 할 생각인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 대화 내용은 진이었다.
진은 이 음악 학원의 원장도 주목하는 학생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음악 수행 평가 때도 알아봤지만, 진은 음악적 재능이 상당했다. 진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 주변 어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진은 나중에 뭘 할까?’
문득 궁금해진 도현이었다.
와작, 와작!
쿠키를 먹으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자, 누군가 상담실로 들어왔다.
“오늘 체험해볼 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너구나?”
그녀는 오늘 하루 도현의 선생님이 되어줄 드럼 강사였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게 인상적이었다.
드러머라고 하면 좀 더 헤비메탈 느낌을 생각했는데,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느낌이었다.
‘편견이었네.’
도현은 금방 수긍하고는 자신의 생각을 빠르게 수정했다.
“드럼을 배운 적이 있니?”
“아니요. 처음이에요.”
“다른 악기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조금….”
밀턴이 옆에서 ‘조금?’이란 얼굴로 쳐다보는 걸 도현이 외면했다.
“그럼 박자 감각이 있겠네. 드럼은 박자 감각, 다른 말로는 시간 감각이 제일 중요하거든. 가장 기본이 되는 게 시간을 정확하게 나누는 거야.”
그렇다면 형은 드럼을 배웠어도 아주 잘했을 것 같다. 타고난 감각에 후천적 노력이 더해져, 형의 박자 감각 수준은 메트로놈에 필적했다.
도현만이 아는 형의 개인기도 있는데, 형은 1분, 즉 60초를 시계를 보지 않고 정확히 재는 능력이 있었다.
형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도현이니, 집중한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해본 적은 없었다. 할 만한 계기가 생기지 않기도 했고.
‘보통 사람은 그런 거 잘 안 하니까.’
가끔 멍한 얼굴로 60초를 맞추며 혼자 놀던 형이 떠오르자 웃음이 새어 나갈 뻔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예민한 분위기 탓에 형이 가만히 있으면 기분이 나빠 보인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형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60초를 세고 있을 정도로.
“그럼 선생님 따라올래? 드럼 수업은 저쪽 방에서 하거든.”
“다녀와, 도현.”
밀턴이 소파에 앉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쩌다 보니 제 보호자 역할까지 해주고 있는 밀턴에게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낸 후 드럼 선생님을 따라갔다.
딸칵-
방에 들어가자, 보통 ‘드럼’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모습의 드럼 세트가 풀 세팅되어 있었다.
“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머리 아픈 건 뒤로 미루고 가볍게 쳐볼까?”
드럼 선생님이 손에 스틱을 쥐여 주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 어땠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현의 옆자리에 앉은 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밀턴도 내심 궁금했는지, 백미러로 도현을 흘긋 쳐다보았다.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재밌었어.”
사실 드럼은 별로 관심 없었다. 배역 때문에 배우게 된 거고, 그게 아니었더라면 배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체험해본 드럼은 도현이 막연히 가지고 있던 이미지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섬세한 악기였다.
정확한 타점을 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운딩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박자가 엉망이 되었다.
피아노의 예민함, 그리고 바이올린의 섬세함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었다.
비록 배역 때문에 시작했지만, 배우는 동안 즐겁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현듯이, 형과 같이 배우면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익숙하게 미련을 덮어두었다.
“그럼 등록할 거야?”
“응. 주말에 엄마랑 같이 와서 등록하려고.”
“나랑 같은 시간대로 해! 그럼 같이 다닐 수 있잖아!”
“그래, 그렇게 하면 학원 갈 때 내가 데려다줄게.”
“시간대를 정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할게. 밀턴도 고마워요. 아, 오늘 일도요.”
“별거 아닌걸.”
밀턴이 가볍게 응수했다.
도현은 진과 수다를 떨다가, 창밖을 한번 보았다.
드럼은 막 시작한 거뿐이지만, 열심히 학원을 다니면 될 테다.
‘그러면 이제 다음은….’
제이 로빈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준비해야 할 게 아주 많이 남았다.
도현의 눈이 즐겁게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