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85)화 (186/582)

제185화. 새로운 인연 (4)

도현이 제이 로빈이 될 준비를 마치는 동안에 의 캐스팅이 모두 완료되었다.

그리하여 주연 배우들과 감독이 모이는 첫 미팅 날짜가 잡혔다.

조수석에 앉아서 다리를 달랑거리던 소녀, 루카 하퍼가 높게 묶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재밌는 애들이 있으면 좋을 텐데.”

“…루카. 재미없어도 무시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으음. 글쎄?”

“루카!”

“알았어, 장난이야. 안 그럴게.”

루카 하퍼의 매니저는 불안한 눈초리로 조수석에 앉은 소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금지옥엽 외동딸로 자라난 루카는 살면서 ‘위기’나 ‘부족’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적이 없었다.

보통 부잣집은 가족 간의 정이 없다던데 하퍼가와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맷 하퍼는 가정적인 수준을 뛰어넘어서 그냥 아내 바보에 딸 바보였고, 카이아 루이스는 불우한 유년 시절을 거쳐 자수성가한 타입으로 딸에게 자신이 겪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주고 싶어 했다.

그 사이에서 자라난 루카 하퍼는 본성이 선한 건지 부모의 사랑이 통한 건지 큰 문제를 일으키는 망나니로 자라나진 않았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정으로 컸다.

세상에 무서울 게 없고 두려울 게 없는 자신만만한 소녀로. 그 자신감에 기반해 루카는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해야 했고, 또 놀랍게도 그걸 해낼 능력과 끈기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루카 하퍼는 ‘타고난 부류’였다.

처음 모델계의 전설로 불리는 카이아 루이스를 따라 모델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도, 최근 들어 맷 하퍼의 촬영장에 기웃거리더니 기어코 촬영하게 된 영화도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루카라면 잘할 테니까.

다만 걱정되는 것은….

‘친구들이랑 잘 어울릴까…?’

그거였다.

루카는 너무 귀하게 컸고, 또 본인이 잘난 걸 너무 잘 아는 나머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었다.

조금 머리가 큰 애들이라면 모를까, 어린애들의 경우 루카에게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지금은 루카와 영혼의 단짝 수준으로 붙어 다니는 친구들조차, 처음에는 거의 개처럼 싸워 댔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촬영하는 영화가 아이들이 주인공인 영화이니… 그가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애가 나쁜 애는 아닌데….’

성격이 좀… 그래서 그렇지, 앞에 두고 납득할 때까지 천천히 설명해주면 다 이해하는 애였다.

루카 또래의 아이에게 그런 인내심과 포용력이 있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싸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매니저가 어떤 걱정을 하는지 모르는 루카는 그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신이 나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교통 체증을 염려해 넉넉한 시간을 두고 출발한 덕인지, 예상보다 훨씬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미팅은 웨일 픽처스 본사 주변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으로 잡혀 있었다.

레스토랑 직원이 예약된 룸으로 안내해주는 것을 루카가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직원이 문을 열어주자, 안에는 루카처럼 일찍 온 몇몇 사람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루카가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루카 하퍼예요!”

활기차게 인사한 루카가 프라이빗 룸 안을 쭉 훑어보았다.

아직 스티브 감독은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고, 이쪽을 보고 낯을 붉히는 조금 통통한 남자애 한 명, 안경을 쓰고 양 갈래를 한 똑똑해 보이는 여자애 한 명이 있었다.

“아, 안녕. 난 브레디 엘머야.”

“응, 안녕. 브레디!”

대충 인사를 돌려준 루카가 브레디를 흘긋 보았다가 곧 관심을 끊었다. 소심하게 눈치를 보는 모습과 자신감 없이 위축된 어깨, 그리고 또래의 예쁜 여자애를 봐서 붉어진 얼굴 중 루카의 흥미를 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인사는 했으니까 무시한 건 아니다?

루카의 눈빛을 받은 매니저가 어색히 웃었다. 그래…. 그 정도라도 해줘서 고맙다. 매니저의 눈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으로 촉촉이 젖었다.

루카는 또래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안녕, 나는 루카 하퍼야. 너는?”

“주디스 러스킨이야. 너 그 머리는 캐시처럼 염색한 거니?”

“응! 멋지지?”

루카가 자랑스럽게 높이 묶은 머리카락을 한번 손으로 튕겼다. 주디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보라색의 브릿지가 들어간 헤어스타일이 다소 과해 보일 수 있는데, 루카의 얼굴이 너무 화려한 나머지 조화롭게 잘 어울렸다.

“완전! 사실 나도 오늘 아니사처럼 보이려고 안경 쓰고 머리 양 갈래로 땋은 거거든!”

“정말? 그럼 원래 안경 안 써?”

“나 시력 양쪽 다 20/20이야.”

세상에!

루카는 벌써 이 친구가 마음에 쏙 들었다.

루카는 주디스와 좀 더 대화할 요량으로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브레디가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거기 자리 있는데….”

브레디의 말에 주디스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거기 제일 먼저 온 애가 앉아 있었어. 지금은 잠깐 화장실 간 거야.”

“그래? 하지만 난 주디스 옆에 앉고 싶은걸. 이따 오면 바꿔 달라고 하면 되지!”

“기,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글쎄… 오면 그때 물어보면 되겠지.”

“그래도….”

브레디가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루카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 안 돼! 노심초사하며 루카를 지켜보고 있던 매니저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브레디 엘머라고 했지? 브레디, 그 친구가 기분 나쁠지 아닐지 네가 어떻게 알아?”

불쾌한 투로 말하는 루카에 주디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루카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마음대로 앉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따가 오면 물어본다는데 자꾸만 말꼬리를 잡는 이유가 뭐야?”

브레디가 겁먹은 표정을 짓고, 루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팔짱을 낄 때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그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 자리에 앉아도 괜찮아. 내가 다른 자리에 앉을게.”

루카는 자연스레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와우.”

루카는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흰 피부, 차분한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애가 거기 있었다.

엄마와 아빠를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스타를 만나본 루카의 눈에도 어딘가 반짝반짝 시선을 끌어당기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는 자리 없지?”

“어, 응!”

도현이 브레디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소한 동작 하나마저도 조용하고 차분했다.

“내 기분 생각해줘서 고마워.”

“아, 아니야. 별거 아닌데… 헤헤.”

브레디가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루카가 들어올 때 문을 다 닫지 않은 바람에, 본의 아니게 대화 내용을 모두 들어버린 도현이었다.

사실 도현의 입장에서는 루카가 저 자리에 앉든 말든 조금도 상관없었지만, 기분을 생각해준 건 좀 고마웠다.

도현의 등장으로 인해 날이 섰던 분위기가 풀렸다. 새로 등장한 뉴 페이스를 흥미로운 눈초리로 보던 루카가 말했다.

“너 되게 예쁘다. 난 루카 하퍼야. 너는 이름이 뭐야?”

“이도현이야. 내 이름의 경우는 성으로 안 부르니까 도현이라고 부르면 돼.”

“도현? 어느 나라식 이름인데?”

“한국.”

“한국? 아! 아빠가 거기 가본 적 있다고 했어! 일본 옆에 있는 나라 맞지?”

도현이 맞다고 하자, 맞힌 게 기쁜지 루카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도현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말을 걸어오는 루카는 조금 전까지 방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루카는 금방 분위기를 주도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주디스는 아이답게 좀 전에 일어난 일을 금방 까먹고 루카와 떠들었고, 도현은 제게 날아오는 질문에만 간간이 대답했다. 다만, 루카에게 적대적인 눈빛을 받았던 브레디는 우물쭈물하며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브레디가 조금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릴 때였다.

“너는 이전에도 연기한 적 있어?”

“응? 나?”

도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브레디가 눈을 끔뻑이다가 조금 기쁜 기색으로 대답했다.

“응! 전에 단역이지만 몇 번 연기해본 적 있어. 연기 학원도 다니고 있고… 또….”

한번 물꼬를 트자 브레디는 평범한 아이처럼 떠들었다.

도현은 그런 브레디의 이야기를 듣다가, 루카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부러 이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브레디가 소파를 물어뜯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든 말든 그냥 신경 자체를 안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도현의 시선은 금방 눈치채고선 눈을 마주쳐 왔다.

선택적 무신경함.

조금 더 순화해서 말하자면 흥미 본위의 성격.

도현이 파악한 루카였다.

딱히 좋다, 나쁘다로 나눌 건 아니지만, 가까워지면 조금 피곤할 것 같았다. 흥미 위주로 움직이니 변덕스러운 성향도 있을 거 같고….

안정된 걸 좋아하는 자신과는 불협화음처럼 어울리지 않는 타입.

조금 거리를 두는 게 나을 사이.

도현은 루카의 첫인상을 그렇게 판단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수다 소리가 뚝 멎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문으로 집중되었다.

“어? 다들 안녕!”

들어오자마자 시선을 받은 남자아이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밝게 인사했다. 살짝 그을린 피부와 갈색 머리카락이 활기차고 생동감 넘쳐 보였다.

“감독님이 온 줄 알았어!”

“그래서 다들 이렇게 조용했구나?”

꺄르르 웃으며 말하는 루카에 콜린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자신을 콜린 홀트라고 소개한 아이는 금세 아이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적당히 활기차고 적당히 허세기도 있는, 딱 그 나이대의 아이 같았다.

그때,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정말로 스티브 로이 감독이었다.

“음, 많이 와 계셨네요. 이런,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닐지….”

나름 일찍 온다고 왔는데, 이미 와글와글한 방 안에 스티브 로이 감독이 멋쩍은 얼굴을 하고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희가 일찍 온 거예요.”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하자 스티브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

“도현!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계약서 작성 때도 도현에게 과한 친절을 보여 주었는데, 미팅 날에도 여전했다.

도현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네. 잘 지냈어요.”

“다행이다. 다른 친구들은? 오디션 이후로 처음 보네.”

스티브의 말에 아이들이 제각각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스티브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웃었다.

“다들 나 오기 전에 많이 친해진 거 같네.”

“그럼요! 여기 친구들 너무 마음에 들어요!”

루카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으며 듣던 스티브도, 한 마디를 던지면 누군가 받아서 한 마디를 더 던져서, 점차 어지러운 표정이 되었다.

아이들이 주역이니 미팅 전에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역시 이맘때쯤 아이 다섯을 동시에 감당하는 건 좀 힘들었다.

그런 스티브를 도현이 조금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담임 선생님이자 밴드부 담당 선생님 역할의 셀리나 델핀까지 오자 모두 모였다.

인원이 모두 모이자 주문한 음식이 하나씩 차례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많은 만큼, 음식은 주로 달달한 것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특히 브레디는 식전 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기색이라서, 도현은 자신의 식전 빵을 양보해 주었다.

브레디가 무척이나 감동한 표정을 해서 조금 부끄러워진 소소한 일도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긴 트레이가 등장했다. 웨이터들이 자리에 스테이크를 내려놓자, 각각 아이들의 보호자들이 스테이크 접시를 가져가 썰어주었다. 콜린은 자기가 직접 썰겠다며 씩씩하게 나이프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 그럼 나도….’

오스카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도현의 접시를 가져오려고 옆을 보았다.

“?”

그리고 자로 잰 듯이 완벽하게 썰어진 스테이크와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도현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오스카, 왜요?”

“아, 아니야….”

심지어 오스카보다 더 잘 썰었다.

오스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스테이크를 한 점 입에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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