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새로운 인연 (5)
아이들은 모두 보호자를 대동한 채였기 때문에, 스티브는 배우에게 말을 걸다가, 보호자에게 말을 번갈아 걸며 적절히 분위기를 조율했다.
도현은 리암과 영화를 찍어본 적이 있긴 했지만, 독립 영화다 보니 모든 게 약식으로 진행되어 이런 정석적인 미팅은 처음이었다.
‘조금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편한 분위기구나.’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영화에 관련된 얘기보다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로 많이 했다. 비즈니스 목적의 미팅보다는 배우들의 친목을 우선시하는 느낌이었다.
도현도 몸에 힘을 풀고 편안하게 대화에 임했다.
도현은 감자 요리를 하나 콕 찝어 우물거리다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여기 있는 애들은 모두 밴드부원이었다. 각자 맡은 포지션이 있다는 거였다.
‘다들 원래 연주할 수 있는 건가?’
도현은 곧바로 옆에 앉은 브레디에게 물어봤다.
“브레디. 영화에서 네가 맡은 밴드 포지션이 뭐야?”
“응? 나는 기타.”
“원래 기타를 칠 줄 알아?”
“아주 잘 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칠 줄 알아.”
브레디가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본인이 말한 것보다 실력이 좋을 가능성이 컸다.
“너희 무슨 얘기 해?”
“여, 영화에서 밴드 포지션이 뭔지 이야기하고 있었어.”
불쑥 끼어든 루카에 브레디가 용기 내어 답했다.
“밴드 포지션? 나는 기타야. 리드 기타에 보컬. 너희들은 뭔데?”
보컬까지 맡는구나.
생각해보면 루카 하퍼가 맡은 캐시 와일드가 주인공이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밴드의 꽃은, 누가 뭐래도 보컬이니까.
노래하는 걸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루카는 여자아이에게는 드물게도 허스키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노래를 부를지 조금 기대됐다.
루카가 자연스럽게 브레디의 말에 대답해주자, 브레디의 얼굴이 밝아지는 게 보였다.
“나도 기타야!”
“그래? 그럼 너는?”
“난 드럼.”
“드럼? 멋있다! 드럼 칠 줄 알아?”
“아니. 사실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정말? 그게 뭐야!”
루카가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너는 기타 잘 쳐?”
“응. 나 삼촌한테 꽤 오랫동안 배웠거든.”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말하는 루카에 브레디가 재빨리 말을 얹었다.
“나도 꽤 오래 배웠어!”
“그럼 잘 치겠네. 아, 그럼 마지막 기타 한 명은 누구야?”
간단히 응수하고 넘어가자 브레디의 얼굴에 서운함이 떠올랐다.
옆에 앉은 도현의 눈에는 루카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브레디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도현은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루카의 질문에 음식을 열심히 부수고 있던 콜린이 고개를 들었다.
“나야.”
세 명이 기타, 도현이 드럼이니, 나머지 한 명은 자동으로 정해졌다. 루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옆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주디스가 키보드구나?”
“응, 맞아.”
루카와 주디스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주디스도 피아노를 어느 정도 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어.’
도현이 멈칫했다.
“오스카, 혹시 저만 초보인 걸까요?”
조금 난감한 기분으로 물으니 오스카가 잘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그때, 도현의 바로 맞은편에 앉은 콜린이 씩 웃었다.
“나도 있어. 나도 기타 처음이거든!”
“아, 그래?”
“응. 근데 기본 코드만 짚을 줄 알면 된다고 해서, 그거 익히려고 기타 학원에 다니고 있어. 요즘 그래서 손가락이 아파.”
도현은 동지를 만난 기분에 조금 반갑게 말했다.
“나도 드럼 학원에 다니는 중이야.”
“드럼은 손가락은 안 아프지?”
“응. 그런데 팔이 좀 아파.”
“으… 이거나 저거나 다 힘들구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콜린에 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두 배우를 흐뭇한 눈으로 보던 스티브 로이가 말했다.
“촬영 시작 전에 선생님을 몇 번 부르려고 했는데, 이미 알아서 하고 있었네.”
그는 성실한 배우가 기특한 눈치였다. 그러자 콜린이 좀 당황한 낯을 했다.
“아, 기대하면 안 돼요! 저 완전 못한단 말이에요.”
손까지 휘적이며 말하는 것에 스티브가 하하, 웃더니 괜찮다고 했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고, 또 못한다고 해도 해결 방법이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콜린이 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나중에 도현은 스티브가 저렇게 단언한 이유를 깨달았는데, 베이스 기타 포지션을 맡은 콜린은 스트로크 변주 없이 일정한 박자로 세 가지 기본 코드만 돌아가면서 연주하는 게 전부였다.
스티브 로이가 와인으로 목을 한번 축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도현은 전작도 음악에 관련된 영화였지?”
“아… 맞아요. 혹시 보셨어요?”
“물론이지. 내 영화에 출연할 배우의 데뷔작인데 안 볼 리가.”
“그 영화 저도 봤어요. 아주 인상적이던데요. 연기도 그렇고, 마지막에 바이올린 연주는 거의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거든요.”
셀리나 델핀의 말에 스티브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이며 맞장구쳤다.
“맞아, 그 바이올린 연주 정말 대단했지. 몇 번을 돌려 봤다고.”
“하하… ‘H’가 연주한 거고, 전 흉내만 낸 거지만요.”
도현이 이제 입에 붙은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그들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루카가 호기심을 내비쳤다.
“뭐야, 무슨 영환데?”
“. 근데 나이 때문에 보려면 보호자랑 같이 봐야 해.”
“오?”
도현의 말이 루카의 흥미를 자극한 거 같았다. 짓궂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에 혹시나 한 도현이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야한 거 아니야.”
“에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이는 루카에 도현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발랑 까진 루카의 반응에 매니저가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더니 스티브 로이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스티브는 그런 루카의 장난기를 귀엽게 받아들인 거 같아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이어 나가고, 다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후식이 나왔다. 예쁘게 플레이팅된 디저트에 아이들이 눈을 반짝 빛냈다.
‘역시 애들이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어른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슬슬 파장 분위기에 가까워지자, 스티브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선 말했다.
“미리 말했듯이, 촬영 전에 밴드 연주 연습이 있을 거야. 다 같이 모여서 할 건데 일정은 나중에 알려줄 거고.”
이미 아는 내용에 도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연기에 관련돼서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지금도 괜찮고.”
“리허설은 언제 해요?”
“필요하다면 촬영 시작하기 전에 할 거야. 간단한 대본 리딩은 밴드 연습으로 모였을 때 조금씩 할 예정이고.”
아이들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었는지 조용해졌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납시다. 다들 만나서 반가웠어요.”
스티브 로이의 말을 마무리로 첫 미팅이 끝났다.
* * *
철컥.
도현이 안전벨트를 채우는 것을 보던 오스카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 수고 많았어.”
“오스카도요.”
“애들이 다 좋은 애인 것 같더라. 감독님도 친절하시고.”
도현은 오스카의 말에 루카에게 말을 붙이고 싶어 하던 브레디와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루카가 떠올랐지만, 이내 동의했다.
말을 먼저 걸지 않을 뿐,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친해지고 싶어 한다고 무조건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니까.
적당히 좋은 관계로, 무난히 촬영이 끝났으면 좋겠다.
도현은 소박한 바람을 속으로 읊었다.
“집에 가면 뭐 할 거야? 학교 숙제?”
“아니요. 게임하려고요.”
“…응?”
“게임이요.”
오스카가 잠시 게임과 도현을 매치해 보았다.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무슨 게임?”
“비디오 게임이요. 친구한테 빌려 왔어요.”
드럼 학원 등록을 마친 후.
도현이 제이 로빈이 되기 위해서 한 두 번째 준비는 바로 할리의 집에 놀러 가는 거였다.
할리는 브라운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게임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였는지, 집에 온갖 게임 CD가 가득했다. 할리네 집에는 브라운의 게임기도 보관되어 있었는데, 브라운이 항상 자기 집은 놔두고 할리 집에서 게임을 하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할리의 집에 놀러 간 건, 이 게임기를 빌리기 위함이었다.
제이 로빈은 ‘너드’ 캐릭터였으니까.
보편적으로 사회성이 떨어지고, 강박관념이 있고, 비주류의 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여기서 제이 로빈의 비주류 활동은 ‘게임’이었다.
“하하…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이미 한번 도현을 경험해본 오스카는 도현의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래도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야 해.”
“알겠어요.”
도현은 오스카에게 대답하며 제이 로빈이 되기 위한 세 번째 준비를 떠올렸다.
간단하지만 필요한 디테일.
바로 머리카락을 기르는 거였다.
제이 로빈은 더벅머리였는데, 현재 도현은 눈썹 부근까지 깔끔히 정돈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가발을 쓰면 되지만, 그래도 본래 머리가 더 자연스러울 테니 도현은 머리카락을 기르는 중이었다.
‘촬영 전까진 길겠지.’
도현은 머리카락이 꽤 빠르게 자라는 편이었다.
머리카락뿐만이 아니었다. 병원에 있었을 때 크지 못했던 걸 몰아서 크는 건지 폭풍 성장을 하는 중이었고, 소매치기 연습 때 손가락을 베이며 깨달은 건데 회복 속도도 빨랐다.
원래 그럴 수도 있지만… 도현이 생각하기엔 다른 원인이 있는 거 같았다.
가령, 영혼 두 개가 하나가 된 영향이라든가.
생각의 흐름이 거기까지 닿자, 자연스럽게 덩어리 님이 생각났다.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그때… 분명히 덩어리 님이 왔었어.’
도현이 아팠던 날.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슬픔으로 가득 차서 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후 조금 정상적인 사고를 하게 되고 일상을 되찾았을 때, 혼미한 와중에 목소리가 들렸던 게 기억이 났다.
그 순간 느낀 안도감이란.
여전히 덩어리 님이 내 곁에 있다는 것에서 도현은 큰 위안과 안정을 얻었다.
덩어리 님이 자신의 기억을 읽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이 생각을 알았더라면 혀를 찼을 테니.
그래도 이 정도는 덩어리 님이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돌아온 후, 의식적으로 덩어리 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 네 영혼이 안정되면 나는 네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나에게 너무 익숙해지지 마. 현실을 벗어난 존재 말고 네 주위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
도현은 덩어리 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덩어리 님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덩어리 님의 말을 듣기 위함은 아니었다.
도현은 생각보다 그렇게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대본을 보는 것에 엄마가 일찍 자라고 하자, 몰래 아침에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게 도현이었다.
도현은 그냥, 예정된 이별에 다가올 상처가 겁이 났다.
더 정들면 더 괴로울 것 같아서.
이미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대부분을 쏟고 있었다. 도현이 감정적 변동 폭이 적은 건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더는 상처받을 여유가 없었다.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에 마음을 걸기에는 도현은 현실이 얼마나 차갑도록 냉정해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소년이 자신의 삶과 소중한 이의 삶의 무게를 재어야 했던 순간은 영원히 사라지지도, 옅어지지도 않을 상흔이 되어 소년을 이루는 일부가 되었으니까.
그러므로 도현은 현실에 순응했다.
덩어리 님이 언젠가는 그 곁에서 영영 사라질 거란 현실에.
그래서 더 정을 주기보다는 끊어내기를 선택했다. 그편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니까. 이성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맞았다. 덩어리 님도 그랬고.
…물론 종종 속으로 말을 걸곤 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를 테니 상관없었다. 도현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그래도 나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대상에게 닿지 않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 도현이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