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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187)화 (188/582)

제187화. 새로운 인연 (6)

델마 아카데미 3학년들은 오늘 조금 특별한 일정이 있었다.

바로, CogAT 시험이었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대체로 3학년 때 ‘CogAT’이라는 테스트를 진행했다. 일반적으로 학교 영재반을 꾸리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며 언어, 수리, 논리 세 가지 영역과 관련된 인지 능력 정도를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델마 아카데미는 사립이었지만, 공립과 다를 바 없이 CogAT 테스트를 진행했다. 이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학년 반 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국의 영재반 조건은 이 시험에서 상위 5퍼센트에 들어가는 걸 전제로 했다. CogAT 시험은 상대 평가 방식이니, 즉, 같은 학년과 같은 나이끼리 비교했을 때, 세 가지 영역의 점수를 합산한 값이 상위 5퍼센트 안에 들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출석부 옆에 ‘Gifted&Talented’라는 표시가 적히며, 지도 시 조금 더 수준에 맞는 섬세한 관리가 들어갔다.

다만, 델마 아카데미는 사립학교라서 3학년에 보는 테스트는 반 배정에 영향을 끼칠 뿐 전체적인 커리큘럼에는–5학년 때 다시 이 시험을 실시하는데, 그때 본 결과는 중학교 배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긴 했다.-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도현은 처음 해리 선생님께 이에 대해 들었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기분으로 임했다. 이런 시험은 처음 경험해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험을 볼수록 도현은 김이 빠졌다.

몇 장의 그림을 보고 그 유사성을 파악해 같은 그룹에 속해야 하는 그림을 고른다든지, 숫자의 패턴을 파악해 다음에 올 숫자를 계산한다든지, 구멍이 뚫린 종이를 접어다 펼쳤을 때의 모양을 맞히는 문제는 너무 쉬웠다.

보자마자 답이 떠올라 주어진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런 식의 추론 능력을 사용하는 시험은 처음이라 나름대로 재밌긴 했다.

도현은 간단한 감상을 마지막으로 시험을 끝마쳤다.

“흐아, 머리 터지는 줄 알았네.”

니콜라스가 죽는 소리를 내었다. 그는 이 시험이 끔찍한 눈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니콜라스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진도 시험은 싫은지 조금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시험 포기했어?”

“어?”

갑작스런 다비드의 말에 도현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너 시험 찍고 멍 때렸잖아.”

다비드의 자리에서 그게 다 보였나 보다.

문제를 너무 빨리 푼 나머지, 할 게 없어진 도현은 정면을 보고 가만히 멍을 때렸다. 시험지에 낙서할 수도 없고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커닝 의혹을 받을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다행히도,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영향인지 도현은 혼자 멍 때리기를 아주 잘했다.

가만히 넋을 놓고 있으면 머릿속에 온갖 뜬금없는 잡생각들이 떠오르는데, 그걸 따라서 생각의 꼬리의 꼬리를 물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곤 했다.

“아무리 풀기 싫어도 그렇지 그걸 찍냐.”

한심해하는 목소리였다. 동시에 의아함도 섞여 있었다. 평소 수업 시간에 성실한 도현이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도현은 잠깐 고민했다.

‘찍은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쉬워서 답이 바로 보였어.’

…도현이 듣기에도 조금, 재수가 없었다. 도현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데, 니콜라스가 끼어들었다.

“얘가 그걸 찍었겠어? 분명 보자마자 답 맞추고 시간 남아서 딴짓한 걸걸.”

꽤 심드렁한 어투였다.

정답이었기에 도현은 놀랐다. 니콜라스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을 줄 몰랐다.

“확실히… 도리라면.”

진이 가능성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던 다비드가 진의 말에 새삼스러운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니콜라스는 몰라도 진은 찰떡같이 믿는 다비드였다.

진과 니콜라스는 자연스럽게 이 화제를 넘어가 다른 주제로 떠들어댔다. 도현의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그들이 너무 태연해 보여서 다비드는 놀란 자신이 이상한 건가, 라는 혼란에 빠졌다.

다비드가 그러는 사이, 도현은 눈이 따끔한 감각에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머리카락이 눈알을 찌른 거 같았다.

살살 앞머리를 치워내는데, 진이 도현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근데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보다보니까 좀 익숙해진 거 같아.”

“그래?”

“응. 좀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아, 여자애들이 요즘 너보고 귀엽다고 하는 거 알아?”

“아니….”

몰랐던 사실이었다.

정희성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도현은 또래 아이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단 소리에 미묘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최근, 도현은 스타일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배역을 맡은 후부터 기르고자 마음먹었던 머리카락은 순조롭게 자라서, 방심하면 눈을 찌를 정도로 길었다. 모질 자체가 매끄러운 생머리다 보니 더벅머리 느낌은 나지 않지만, 전보다 단정한 느낌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옷.

평소에 깔끔한 스타일을 선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포인트가 있어서 스타일리시한 느낌을 풍기던 도현은 요즘 완전히 달라졌다.

체크 셔츠에 코듀로이 바지.

일주일에 7일을 이 패션으로 살아가는 중이라, 이제 한 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도현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입고 다니는지 깨달았다.

정말 편했다.

도현이 이러고 다니는 건 제이 로빈이 되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도현의 연기는 공감을 바탕으로 하니까.

그리고 징크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습관 정도는 됐다. 배역이 끝날 때까지는 그 배역과 최대한 비슷한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는 것이.

“아, 그거 생각난다.”

니콜라스가 웃음을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해리 선생님이 너 부른 거.”

“아.”

도현이 탄식을 내뱉었다.

연기를 위해 스타일에 변화를 준 건 좋은데, 거기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겨났다.

며칠 전.

평소처럼 집에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던 도현을 해리 선생님이 은밀히 불렀다. 도현은 의아해하면서도 해리 선생님의 부름을 따라갔다.

그리고.

- 도현, 선생님은 언제나 네 편이야. 혹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와서 말해도 돼.

- ……? 네, 그럴게요.

도현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냥 선생님의 업무의 일환인가 보다 하면서 넘어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해리 선생님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 오늘은 별일 없니?

- 혹시 힘든 일 있는 거 아니지?

- 하하, 요즘 따라 일이 없어서 한가하네. 선생님은 시간이 많아서 언제든지 상담하러 와도 된단다!

 인상 좋게 웃는 얼굴에서 왜인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상황이 반복되자 도현은 깨달았다.

‘오해하셨구나.’

깔끔하게 다니던 애가 머리카락 정돈도 하지 않고 일주일 내내 체크 셔츠만 입고 다닌다.

…음, 오해할 만했다.

아마,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이 생긴 것 같다는 종류이려나.

이 일을 친구들에게 말하자, 진과 니콜라스, 그리고 다비드는 무척이나 재밌어했다. 웃느라 숨이 부족할 정도였다.

아무튼.

도현은 곧장 해리 선생님께 가서 대화를 시도했다. 다비드는 재밌으니 그냥 놔두면 안 되냐고 했지만, 선생님의 호의를 그렇게 이용할 수는 없었다.

도현은 해리 선생님을 찾아갔다.

- 저 집 괜찮아요. 머리카락이랑 옷은 이번에 맡게 된 배역을 따라 하는 거고요.

곧바로 날린 돌직구에 해리 선생님은 어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민망함과 안도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부끄럽긴 하지만, 도현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인 눈치였다.

‘…그런 일이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긴 했다.

지금도 해리 선생님은 도현을 보면 그때 오해가 생각나는지, 종종 창피한 얼굴을 했다. 선생님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도현은 모른 척해주었다.

“다음 시간만 끝나면 점심시간이야! 점심시간에 뭐 하고 놀지?”

진의 말에 도현은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밖에 나갈까?”

“날씨 덥잖아.”

“오늘 바람 좀 분댔어. 옆 반 애들이 점심시간에 축구할 거래. 우리도 끼어서 같이 하자.”

니콜라스와 진이 대화하는 소리를 듣던 다비드가 끼어들었다.

“축구 좋지. 내기할까?”

“저번에도 네가 졌잖아?”

“그전에는 네가 졌잖아!”

니콜라스와 다비드의 사이에 전기가 튀었다.

허허로이 웃으며 두 사람을 보던 도현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에는 열심히 뛰어다녀야 할 모양이었다.

* * *

“정말 박자 감각을 타고났네.”

도현의 드럼 선생님, 헤이즐이 작게 중얼거렸다. 헤이즐의 눈에 평온한 표정으로 스틱으로 드럼을 두드리는 도현이 들어왔다.

처음 체험하러 왔을 때도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긴 했다.

그러나 몇 번 수업하며 헤이즐이 본 도현은 범상치 않은 수준을 넘어섰다.

도현은 거의, 기계 같았다.

사람이라면 한 번 알려준 걸 헷갈려 할 법도 한데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좀 헤매더니, 익숙해진 후에는 헤이즐이 알려준 정확한 타점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가끔 삐끗할 때는 머리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줄 때뿐이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울 텐데.

도현의 박자 감각은 헤이즐을 경악시켰다.

드럼의 기본은 시간 쪼개기다.

마치 에이포 용지를 반으로 접고, 또 그걸 반으로 접는 것처럼, 일정한 시간을 정확하게 쪼개는 것.

말로 하면 쉬워 보일지 몰라도 직접 해보면 달랐다. 당연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니까.

늘 객관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는 시계와 달리, 사람에게 느껴지는 시간은 모두 상대적이었다. 그 상대성을 극복하고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는 건 수많은 연습과 노력을 통해 가능했다.

그런데 도현은 처음부터 해냈다.

소름 돋을 만큼 정확한 타이밍에.

메트로놈을 저기다 가져다 놔도 저만큼 정확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도현은 집중력과 인내심까지 뛰어났다.

모든 악기가 기본기가 중요하듯이, 드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인들도 기본 비트만 반복시키면 지루해하기 마련이다.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도현은 별 불만 없이, 헤이즐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딱히 지루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텐션이었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한다는 듯이.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아주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학생이 아닐 수 없었다. 박자 감각도 타고난 데다가 연습도 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히 하니, 실력이 콩나물처럼 쑥쑥 늘어나는 게 매 시간마다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제 강약을 넣어서 그루브 연습을 좀 해볼까?”

헤이즐의 말에 도현의 손이 멈췄다.

“지금까지 배운 기본 비트를 바탕으로 할 거야. 드럼하면 사람들이 화려한 테크닉이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연주를 주로 생각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건 그루브야. 똑같은 비트라고 해도 치는 사람에 따라서 듣기 좋은 소리가 나기도 하고 듣기 싫은 소리가 나기도 하는데, 이게 그루브 연습이 잘 되었냐 아니냐에 따라서 갈리는 거거든.”

“기초 공사가 중요하다는 소리죠?”

“맞아.”

헤이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현, 너는 어려운 테크닉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잖아. 그럼 그루브가 더더욱 중요하지. 기본 비트에서 느낌을 내려면 말이야.”

도현은 정식으로 배우는 첫날에, 드럼을 배우는 이유를 헤이즐에게 명확하게 설명했다.

아쉬운 일이었다.

이렇게 재능이 있는데 더 배울 생각이 없다니.

헤이즐이 몇 번, 드럼을 더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해 봤지만, 도현은 확고했다. 드럼이 싫은 건 아니고 오히려 재밌어하는 것 같긴 한데, 그게 연기하는 배역을 위한 활동이라고 스스로 정확하게 정해 놓은 거 같았다.

도현은 미련이 어른거리는 헤이즐의 눈을 못 본 척했다.

‘드럼이 재밌긴 하지만….’

문제는 그거였다.

도현이 너무 할 일이 많다는 것.

물론 작품에 들어가지 않을 때는 여느 초등학생과 다를 바 없이 여유롭긴 했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할 건데 그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도현은 드럼이 아니더라도 할 게 너무 많았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위한 일정한 시간 및 부모님과 보내는 시간을 빼놓고, 나머지 시간은 연기와 바이올린 연습만으로도 부족했다. 모든 걸 다 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으면 가끔 그림을 그렸다.

도현은 우선순위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드럼을 더 익힐 시간이 있으면 바이올린 연습 시간을 더 늘려야지.

이게 도현의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지.’

별로 미련이 생기지도 않았지만, 어차피 안 되는 일에 미련을 갖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한 게 나았다. 어쨌든 지금은 드럼을 치고 있으니까.

도현은 다시 눈앞의 드럼에 집중했다.

헤이즐이 알려준 대로 스트레이트, 다운, 업 비트 느낌을 확실히 구분해서….

귀로 들리는 리듬이 꽤 경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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