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88)화 (189/582)

제188화. 새로운 인연 (7)

첫 미팅 때, 스티브 로이 감독은 관련 기사가 나갈 거라고 예고했다. 영화 제작 소식과 캐스팅된 배우에 대한 정보가 주 내용이었다.

도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당시 나간 기사는 꽤 화제를 끌었다.

난다 긴다 하는 할리우드 제작사 중에서도 꽤 굵직한 편인 웨일 픽처스의 신작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모은 건 아역 배우들이었다.

먼저, 루카 하퍼.

루카 하퍼는 할리우드 2세들 중에서도 일찍 두각을 드러내어 활발하게 활동하는 편으로, 웬만한 셀레브리티보다 유명했다. 할리우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었다.

그런 루카 하퍼가 처음으로 연기를 시도한다.

거기다가 주연이었다.

관심이 안 쏠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화려한 주인공의 이력에 눈이 쏠리고 나면, 이어서는 이도현이었다.

영화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아, 베니스 걔?’로, 그렇지 않은 이라도 ‘에이미의 망한 첫사랑’으로 은근히 알려진 도현이었다.

각자 떼어 놓고 봐도 흥미로운데, 두 사람이 모였다. 할리우드 패밀리이자 태어난 순간부터 셀레브리티였던 루카 하퍼와 갑작스럽게 등장해 괴물 같은 연기력으로 할리우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동양인 아역 배우가.

사람들이 보기에 재밌는 조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호기심과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부정적인 반응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게 루카 하퍼를 저격하는 기사였다.

루카 하퍼가 주인공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을지 불안하다거나, 그녀가 부모의 후광으로 주인공의 자리를 얻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 관심 속에서, 주연들은 오늘 첫 밴드 연습을 위해 모였다.

“와아….”

아이들은 밴드 연습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연습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아이들이 구경하는 걸 보고 있던 스티브 로이가 말했다.

“여기서 앞으로 삼 주 동안 레슨을 받을 거야.”

초보자와 숙련자를 가리지 않고 배우를 뽑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넉넉히 잡은 기간이었다. 어린아이이니만큼 따라가지 못할 경우도 대비해야 하고.

‘뭐,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지만.’

기타 포지션을 맡은 아이들은 따로 얘기한 적도 없는데도 약속이라도 한 거처럼 각자 등에 자신의 기타를 메고 온 채였다. 기타를 막 배우기 시작했다던 콜린까지도.

왠지 예감이 좋았다.

“이제 곧 오실 때가 됐는데….”

스티브 로이가 시계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똑똑.

연습실 문이 노크 소리와 함께 열렸다. 스티브의 얼굴이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스티브가 들어오는 남자들과 차례로 악수를 했다. 그다음 아이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삼 주 동안 연습을 도와줄….”

“어? ATT 맞죠? All the time!”

스티브의 말에 끼어든 건 루카였다. 어린애들이 자신을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남자들은 꽤 놀라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카의 매니저가 루카에게 보디랭귀지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 ‘뭐야’ 하는 표정을 짓던 루카가, 계속되는 몸짓에 의도를 깨달았다.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은 루카가 싱글 웃더니 말했다.

“우리 집에 앨범이 있거든요. 아, 감독님.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반가운 마음에 말이 나왔어요.”

“하하, 괜찮아.”

스티브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멀리서 루카의 매니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 말대로, ATT 밴드 분들이야. 우리 연습을 도와주실 거야.”

ATT.

마니아 층에서 두터운 사랑을 받는 인디 록 밴드였다.

원래 스티브 로이는 록 밴드가 아니라 선생님을 초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우들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물색하던 중 우연히 ATT를 소개받게 되었는데, 그들이 록 밴드 후학 양성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실시하며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는 걸 알고 이번 영화의 선생님으로 추대했다.

“ATT 밴드 보컬 코먼 영이야. 만나서 반가워.”

그들은 차례로 자신을 소개했다. 예상치 못한 밴드의 등장에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드러머 앵거스 크러머야. 여기 드러머는 누구야?”

‘록 밴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 어깨선까지 내려오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에 검은색 티셔츠, 은색 목걸이를 한 남성이었다.

도현이 살짝 손을 들었다.

“저예요.”

“아, 너구나.”

잠시 탐색하는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드럼을 치기엔 좀 얌전해 보이는데.”

장난스러운 말에 몇몇이 웃음을 터트렸지만, 도현은 그 기저에 깔린 은근한 못마땅함을 읽었다.

도현을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냥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가르치기 싫었나?’

도현은 생각을 숨기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도현이 심심하게 반응하니 기운이 빠졌는지, 그는 ‘그래.’라고 대답하며 넘어갔다.

남은 인원도 훈훈하게 인사를 나눈 후.

“자, 이제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해볼까? 그 전에, 너희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은데.”

코먼 영의 말에 콜린이 긴장한 듯 어깨를 굳혔다.

“한 명씩 차례대로 나와볼까? 그래, 그러면 일단… 리드 기타부터.”

코먼 영의 말에 루카와 브레디가 앞으로 나왔다. 당당한 눈빛의 루카와 달리 브레디는 시선이 집중되는 게 부끄러운지 뺨을 붉히고 있었다.

‘신기하네.’

도현의 감상이 향한 건 브레디 쪽이었다.

배우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직업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으면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도현은 브레디의 성격이 조금 신기했다.

“두 사람은 혹시 연습해왔어?”

“네.”

“저, 저도 해왔어요.”

“그래? 잘됐다. 그럼 연습한 거 보여줄래? 음, 이쪽이 영화 주인공? 맞아?”

“네. 루카 하퍼예요. 루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루카. 루카부터 해볼까?”

“해볼게요.”

루카가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더니,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리고선 익숙한 손놀림으로 앰프에 기타를 연결했다.

여럿이 루카만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루카는 전혀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디리링-

첫 시작은 단순한 멜로디였다.

도현은 일렉 기타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단 루카의 연주가 상당히 깔끔하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도현의 옆에 있던 콜린은 어느새 고개를 까딱이며 박자를 타고 있었다.

이윽고.

따라란따라!

하이라이트 부분이 시작되었다.

높은 테크닉이 요구되는 부분이었다. 가장 화려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 부분까지도 루카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여유로운 얼굴로 연주했다.

딩-

마지막 음까지 마무리되고.

짝짝짝!

“아주 잘하는데? 내가 따로 가르쳐 줄 필요가 없겠어.”

코먼 영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여기서 놀란 표정을 짓지 않는 건 스티브 로이가 유일했다. 그가 놀라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디션 때 이미 들었으니까.

일렉 기타를 연주할 줄 아냐는 물음에 자신만만한 얼굴로 기타를 들고선 사람들이 준비할 틈도 없이 연주를 밀어붙였던 루카를 스티브는 기억했다.

칭찬을 한가득 받은 루카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밉지가 않았다.

“자, 그럼 옆에 있는 친구… 브레드?”

“브, 브레디예요!”

브레디가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콜린과 주디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아, 미안해. 브레디. 이번엔 네 차례야.”

브레디는 긴장 때문에 조금 떨면서 몇 번 실수한 거 빼고는 훌륭하게 연주했다. 코먼 영도 조금만 더 연습하면 아주 좋아질 거라고 말하며 브레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브레디는 끝나서 좋은 건지, 아니면 코먼 영의 격려가 좋은 건지 기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헉, 다음은 나잖아!”

콜린이 얼굴을 하얗게 굳혔다. 옆에서 그의 말을 들어버린 도현은 무언가 응원을 해주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어… 잘할 수 있을 거야. 연습한 것만 보여줘.”

“코드를 벌써 까먹은 거 같아! 어떡하지?”

“…기타를 잡으면 기억날걸.”

도현의 영혼 없는 응원에 힘을 얻었는지, 콜린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쭈뼛쭈뼛 앞으로 나간 콜린은 처음에 조금 헤매긴 했지만, 나중에는 실수 없이 연주했다.

세 가지 코드를 반복해서 연주하는 거라고는 해도 콜린이 기타 초보자임을 감안하면 열심히 노력한 거 같았다.

“기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덜 박여서 그런가, 아니면 힘을 잘 못 줘서 그런가, 가끔 소리가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네. 코드 이동할 때도 반 박자씩 늦어지고.”

콜린의 어깨가 축 내려갈 때였다.

“근데 뻔뻔함이 있어. 틀려도 안 틀린 척 연주하는 게 제법이던데. 원래 그렇게 하면서 느는 거야. 넌 금방 잘하겠다.”

“…네!”

이어진 칭찬에 콜린의 얼굴이 풀어졌다. 나갈 때 잔뜩 굳은 것과 다르게, 돌아올 때는 짐을 벗은 듯 후련한 얼굴로 돌아왔다.

툭.

팔을 치는 감각에 도현이 옆을 돌아보자, 콜린이 작게 속삭였다.

“네 말대로 기타 잡으니까 손이 저절로 코드를 짚더라!”

“아, 다행이야. 잘하더라.”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영혼을 담아서 응원할 걸 그랬다. 도현은 친근하게 어깨를 치는 콜린에 이유 모를 미안함을 느꼈다.

“그럼….”

코먼 영과 도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드럼 한번 들어볼까?”

내 차례구나.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던 도현은 별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콜린의 응원을 받으며 드럼 의자로 가서 앉았다.

잠시 숨을 가지런히 정리한 도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왼발에 무게를 싣고.

스틱의 숄더가 하이햇 면에 최대한 붙도록 해서.

다운 스트록으로, 던지듯이.

원, 투, 쓰리, 포.

밴드 곡의 박자는 기본 8비트였다. 도현이 학원에 내내 배웠던 비트이자 가장 기본이 되는 비트이기도 했다.

드럼을 배울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오른손과 왼손, 오른발과 왼발이 완전히 따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바이올린은 양손의 독립적인 움직임을 요구했다. ‘H’로 유명해질 수준의 연주를 할 줄 아는 도현이 그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발도 비슷했다.

형은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교양 수준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형 기준의 ‘교양 수준’이라 함은, 남들과 비교했을 때 수준급이란 소리였다.

도현은 피아노를 쳐본 적이 없지만, 형의 경험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페달은 나름 익숙했다.

그러므로 도현이 드럼의 양손 양발 독립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앵거스 크로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분명 입문자라고 하지 않았나?’

ATT 밴드는 레슨 전에 기본적인 배우의 정보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분명, 드럼의 경우 완전히 무경험자, 초보라고 했다.

그사이에 드럼을 배웠다고 해도 고작 몇 주.

아무리 간단한 비트라지만, 하이햇이 벌어지지 않도록 왼발에 계속해서 신경 쓰고, 오른손과 왼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오른발로 박자도 넣어주고, 동시에 박자가 빨라지거나 느려지지 않게 일정함을 지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강약을 넣으며 그루브까지 주고 있었다. 그루브가 엉성하거나 불편하지 않고 저절로 박자를 타게 될 만큼 느낌 있었다.

툭.

그 사이 도현의 연주가 끝이 났다.

“정말 드럼 초보가 맞아?”

“? 네, 맞아요.”

“…너, 재능 있는데?”

물론 앵거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몇몇 드러머들이 하는 말이 있었다.

드럼은 재능이 전부라고.

그 무엇보다 ‘느낌’이 중요한 드럼이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귀담아듣지는 않았던 말.

그러나 앵거스는 이 순간, 그 말이 어쩌면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앵거스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앵거스는 원래 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영화배우를 가르치는 일이라니, 재밌을 거 같지 않느냐는 코먼의 설득이 아니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앵거스가 가르치는 건, 록에 관심 있는 꿈나무들로 충분했으니까. 그것도 자신이 어렸을 적 드럼을 배우고 싶어도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배우지 못했던 경험이 있기에, 록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같은 경험을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록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아이를 가르치는 상황이 썩 반갑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런’ 애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번에는 코먼의 말을 듣길 잘했군.’

앵거스가 즐겁게 웃었다.

생각보다 이 수업이 재밌어질 거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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