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89)화 (190/582)

제189화. 새로운 인연 (8)

도현이 연주를 한 후, 주디스까지 키보드 연주를 마쳤다. 주디스는 첫 미팅 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 만큼, 어렵지 않게 밴드 곡을 소화했다.

다섯 사람의 연주를 모두 들은 스티브 로이가 말했다.

“내 생각보다… 수준이 너무 높은데?”

기대치를 훨씬 상회했다.

“삼 주를 너무 길게 잡은 거 아닌가 싶네, 이거.”

털털하게 웃고 있지만,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그래도 개인 연주랑 합주는 다르니까요. 물론 이 친구들은 합주도 잘할 것 같지만… 합주는 호흡이 잘 맞는 게 중요하거든요. 맞춰볼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죠.”

스티브 로이의 말에 코먼 영이 말했다. 정론이라서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확실히 개인의 기량을 뽐내는 게 아니라 밴드 연주를 하는 거니까 연습 시간이 많으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었다.

배우들도 친해질 수 있고.

“자, 그럼 본격적으로 레슨을 시작해볼까? 오늘은 맞춰 보기보다는, 개인 레슨 위주로 할 거야. 맞춰보는 건 좀 더 다듬은 다음으로 미루자. 괜히 어설프게 익힌 상태에서 소리가 섞이면 혼란스러울 수 있거든.”

“네!”

합주를 안 한다는 소리에 몇몇 아이들이 아쉬워하긴 했지만, 분위기는 금방 정리되었다.

도현의 옆으로 앵거스 크러머가 다가왔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앞으로 잘 부탁해.”

도현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에 느꼈던 미묘한 거부감이 완전히 사라진 기색이었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의아하면서도, 도현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답했다.

“저도요.”

“좋아. 그럼 아까 했던 거 처음부터 다시 해봐. 봐줄게.”

“네.”

하나, 둘, 셋, 넷.

도현이 박자에 맞춰 스틱을 휘둘렀다.

“잠깐.”

몇 마디 채 연주하지 않았는데 앵거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현이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방금 좋았어. 좋았는데, 처음 시작할 때, 하나, 둘, 셋, 넷 하고 나서 팔을 들기보다 네 번째 박자부터 오른손을 와인드업, 그러니까 준비해서 다음 박자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면 더 좋을 거 같아.”

“아, 네. 그렇게 해볼게요.”

“좋아, 다시. 하나, 둘, 셋, 넷. 오케이! 좋았어. 그렇게. 방금처럼 한 번만 더 해볼까? 좋아! 그거야!”

도현의 드럼 학원 선생님, 헤이즐이 기본기에 집중했다면 앵거스는 좀 더 섬세한 디테일에 신경 썼다. 전체적인 곡의 완성도를 중점으로 보는 거 같았다.

그는 갈수록 신이 나는 듯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가르치는 사람이 신이 나서 가르치니, 덩달아 도현도 텐션이 높아져 더욱 집중했다.

앵거스 크러머는 드럼을 치는 도현을 바라보았다.

악기를 연주할 때, 재밌는 점은 연주에서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난다는 부분이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박자가 빨라지고, 느긋한 사람은 느려지는 경우가 많다.

습관이나 버릇이 어느 정도 잡힌 경험자라면 모를까, 초보자에게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도현의 경우 강박적일 정도로 정박이었다. 박자 감각이 뛰어나서도 있겠지만 도현의 성격 자체가 계획적이고 완벽주의 성향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좀 덜 얌전하게 쳐도 돼.”

“네?”

“너는 좀… 뭔가 자제하고 있는 느낌이거든. 근데 자제도 필요하지만, 내 생각에 너는 좀 더 풀어도 될 거 같아.”

추상적인 표현에 도현이 아리송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흠… 뭐라고 표현하지.”

앵거스 크러머가 고민했다.

앵거스는 감각이 발달한 드러머였다. 그의 장점이자, 강점이기도 했다.

거칠게 친다고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앵거스가 보기에 도현은 뭔가 억누르고 있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좀 더 거칠고 날것의 무언가가 있는데… 꽁꽁 숨기는 느낌.

첫인상은 굉장히 얌전하고 조용할 거 같았는데, 연주를 듣다 보니 또 그것도 아닌 거 같았다. 생각보다 얌전하지 않은데 굳이 얌전한 척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아니다. 그 부분은 나중에 합주한 후에 다시 생각해보자.”

아직 첫 연습에 불과했다. 그리고 도현은 아직 본격적으로 밴드 연주-합주-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스타일을 정의 내리기에는 일렀다.

지금은 디테일한 부분을 하나씩 짚어주는 걸로 충분했다.

“일단, 크래시 심벌을 칠 때 좀 더 강하게 쳐봐. 지금은 너무 얌전하게 치거든. 근데 크래시 심벌은 더 강하게 치는 게 듣기 좋아. 손목이랑 팔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강하게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도현이 스틱을 내리쳤다.

“조금 더 강하게. 그리고 소리가 조금 지저분해. 좀 더 깔끔하게 끊어서. 빡! 이런 느낌으로.”

앵거스의 설명을 도현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치잉!

소리의 깔끔한 울림에 도현은 얕은 전율을 느꼈다. 소리가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선득했다. 이거구나,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아, 지금 엣지 부분 힘 있게 때리는 거 좋았어. 그거 기억해. 그 정도로는 때려야지 심벌의 몸통이 울리거든. 한번 약하게 쳐볼래?”

칭!

“어떤 거 같아?”

“울림의 깊이가 달라요.”

“맞아. 강한 힘으로 쳐서 몸통이 울려야 그 맛이 나. 힘이 약하면 소리가 풍부하지 못해.”

앵거스가 우수한 학생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도현은 앵거스가 하는 말을 모두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방금 심벌을 내리쳤던 감각까지도.

앵거스가 짚어준 부분을 모두 기억하며, 다시 한번 연주했다. 앵거스는 그런 도현을 감탄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앵거스의 눈에는 도현이 사람이 아니라 스펀지나 콩나물 정도로 보였다. 물을 주는 대로 쑥쑥 커지는.

그게 너무 재밌다보니 이것저것 많이 말해버렸다. 소화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도현은 보란 듯이 앵거스가 짚어준 모든 부분을 보완해서 연주했다.

재능이 뛰어난 건지, 그냥 지능이 높은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니, 둘 다인가.’

앵거스의 귀에 도현의 드럼 소리가 들렸다.

처음 연주할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초보자 특유의 미숙함이 많이 사라졌다.

‘이거 첫 수업인데 말이지.’

앵거스가 헛웃음을 짓다가, 도현이 쳐다보는 것에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괜찮았어요?”

“어, 잘했어.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자기가 뭘 했는지 모르는 도현은 앵거스의 말에 그저 기뻐하며 웃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이 다 됐네요.”

때마침, 스티브 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그 말에 그제서야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그사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집중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오늘 수고했어.”

“덕분에 잘 배웠어요. 고마워요.”

말하는 게 꼭 애늙은이 같았다. 하지만 오늘 도현에 대한 호감도를 잔뜩 쌓은 앵거스는 생각만 할 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 앞으로의 방향 말인데.”

앵거스가 꺼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현이 앵거스를 응시했다.

“너를 가르쳐준 선생님은 기본기에 집중했지?”

“네, 맞아요.”

그럴 거 같았다. 배운 지 몇 주 되지 않았는데, 그것치고는 놀라우리만치 기본기가 탄탄했으니까.

앵거스는 도현을 가르치는 동안 생각했던 걸 말했다.

“나는 좀 더 ‘그럴싸하게 치는 법’을 알려줄 거야.”

“그럴싸하게 치는 법이요?”

“나는 네가 드럼을 제대로 배우면 좋겠지만… 일단 이건 영화를 위한 거잖아, 그렇지?”

“그렇죠.”

“기본기가 탄탄하면 다른 곡에 응용하기 좋지. 그런데 너에게 필요한 건 한 가지 곡뿐이잖아. 그러니까 그 곡을 최대한 멋있게 칠 수 있도록 가르칠 생각이야.”

앵거스 입장에선 아쉽지만, 그가 도현을 앉혀놓고 천년만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처음 가르치는 목적에서 벗어나면 안 됐다.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결정을 한 건 아니었다.

도현이 아니라 다른 아이였다면 아무리 짧은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기본기에 집중했을 것이다. 튼튼한 지지대 없이 건물을 쌓으면 부실 공사가 될 뿐이니까.

하지만 이 아이라면.

이 정도의 습득력이라면, 조금 뛰어넘기를 해도 가르치는 걸 제대로 따라오지 않을까.

그게 앵거스의 판단이었다.

‘아쉽긴 하다만….’

미련에 쩝, 입맛을 다실 때 도현이 입을 열었다.

“알아들었어요.”

도현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본기는 드럼 학원 선생님께 계속해서 배울게요.”

“…이 자식. 너 진짜 마음에 든다.”

앵거스가 갑작스럽게 도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도현은 좀 놀랐지만, 그게 호의에 기반한 행동임을 알고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첫 수업이 끝났다.

ATT 밴드 사람들은 인사를 나눈 후 먼저 연습실을 떠났고, 배우들은 연습실에 좀 더 남았다.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진 후, 가볍게 대본 리딩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가서 앉았다. 드럼은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다. 그걸 쉬지 않고 몇 시간 동안 했으니, 조금 지친 상태였다.

소파에 앉은 도현이 쉴 때였다.

“야.”

“어?”

조금 거친 부름에 놀란 도현이 휙 고개를 들었다. 루카가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미팅 때와 다르게 머리카락을 푼 채였기 때문에, 보라색 브릿지가 더 눈에 잘 띄었다.

잠깐 그 머리색에 시선을 빼앗겼던 도현이 다시 루카의 얼굴을 보았다.

“나 봤어.”

“?”

“그거 있잖아. 보호자랑 봐야 하지만 야하진 않은 거.”

“아… 내가 출연한 영화?”

“응, !”

도현은 루카가 그 영화를 찾아봤다는 소리에 놀랐다.

“너 진짜 연기 잘하던데.”

털썩!

루카가 자연스럽게 도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소리를 죽여 말했다.

“사실, 너 말고 여기 있는 애들이 출연한 거 다 봤거든. 근데 네 연기를 보고 나니까, 다들 별로더라.”

재미없었어.

덧붙인 말에 도현이 미약하게 눈가를 찡그렸다.

루카가 주연 배우들의 출연작을 모두 봤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루카의 발언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왜?”

순수한 의문이었다.

“다른 애들한테 실례잖아.”

“하지만 그게 사실인데? 거짓말을 하라는 거야? 으음….”

루카가 눈가를 찡긋이며 웃었다.

“그게 더 별론데.”

“…….”

도현은 잠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얘는 대체 뭐지, 싶었다. 이어, 도현이 ‘그건 기본적인 예의다’라고 말하려 입을 뗐지만, 루카가 좀 더 빨랐다.

“하지만 네가 싫다면 안 그럴게.”

“왜?”

이번엔 도현이 물었다.

“너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친해지려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되잖아?”

당황스러울 만큼 직설적이었다. 도현은 다른 의미로 할 말을 잃었다.

“아무튼, 너 연기 진짜 잘하더라. 나 아빠가 영화감독이라서 영화 촬영하는 거 구경 많이 해봤거든. 그런데 너처럼 재밌게 연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지금도 영화에서 본 이미지랑 너무 달라서 신기해. 아, 그래서 베니스에서 상 탄 건가.”

루카는 방금 화제는 그걸로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주제를 바꿔서 이야기했다. 도현은 조금 전의 화제를 다시 꺼내길 포기하고 루카의 말에 대답했다.

“…나보다 연기 잘하는 사람은 많은걸. 그래도 좋게 봐줘서 고마워.”

“뭐? 하하! 장난이지? 장담컨대, 손에 꼽을걸. 영화배우라고 꼭 연기 잘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거든. 으음, 이러고 내가 연기 못하면 내 자기소개가 되는 건가? 아, 그럼 너 되게 웃기겠다. 그치?”

“그런 거로 웃기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래? 그럼 넌 뭐가 웃긴데?”

“…글쎄. 생각 안 해봐서 모르겠어.”

“시시하네.”

루카가 간단하게 감상평을 남겼다. 도현은 그 말에 그다지 부정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렇게 재밌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도현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축 기대는 루카를 보고 말했다.

“너 오디션 보고 합격했잖아. 잘하니까 주인공 역할이 된 거라고 생각해.”

“내가 오디션 보고 합격했다고 생각해?”

소파에 늘어트렸던 상체를 일으키며 묻는 루카에 도현이 눈을 깜빡했다.

“그럼?”

잠시 도현의 눈을 살펴보던 루카가 씩 웃었다.

“아니, 어떤 멍청이들은 내가 엄마 아빠 덕으로 주인공 자리에 앉았다고 떠들어 대거든.”

“…몰랐어.”

“응, 그런 데 관심 없어 보이긴 한다. 뭐어, 나도 별생각 없어.”

루카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도현이 조심스럽게 괜찮냐고 묻자, 루카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나랑 사진 찍을래? 너랑 친해졌다고 SNS에 자랑하고 싶어.”

둘이서 사진을 찍을 만큼 친근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도현은 우리가 언제 친해졌냐고 말하기보다는 좀 더 유한 방법을 택했다.

“그런 거면 애들 다 같이 찍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거 좋은 생각이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루카가 아이들을 불렀다. 얼른 이리로 와보라는 말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우리 같이 사진 찍자!”

“어! 좋아!”

“나도, 나도!”

콜린과 주디스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브레디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 내가 찍어줄게.”

루카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아이들은 소파에 옹기종기 모였다. 루카는 가운데는 자신의 자리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가운데에 섰고, 양팔로 한쪽은 도현의, 한쪽은 주디스의 팔짱을 끼어서 도현은 자연스럽게 그 옆에 위치하게 되었다.

소파에 앉은 세 사람 앞에 콜린이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를 쭉 펴고 장난스럽게 브이 자를 그리는 것에 브레디도 그 옆에 앉아 소심하게 손가락을 폈다.

“자, 찍습니다. 치즈-”

찰칵!

첫 밴드 연습 날 찍은 기념비적인 사진은, 그날 루카의 SNS 계정에 업로드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