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새로운 인연 (10)
“내 천사, 뭐 해?”
“아빠!”
널따란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대본을 보던 루카가 고개를 들었다. 루카가 몸을 돌려 풀썩 천장을 보고 누웠다.
“대본 연습 중이었어.”
“집에 오고 나서 쉬지도 않았잖아.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아빠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물론 내 스윗하트는 항상 뭐든지 잘하지만.”
“으응, 아니야. 부족해.”
침대에 굴러다니는 인형 하나를 품에 안은 루카가 부루퉁한 표정을 했다.
“걘 이거보다 더 잘한단 말이야.”
“누구?”
“도현.”
“아, 사진에서 왼쪽에 있었던 애 맞지?”
“응, 걔.”
루카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대본 리딩을 떠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한 검은색 눈동자는 대본을 들자마자 변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루카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아주 깊은 구덩이, 혹은 뻥 뚫린 우주의 일부 같던 검은색이 순식간에 어리숙하게 느껴지던 경험이란.
그 순간 느꼈던 짜릿함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서 루카가 본 것 중에 가장 흥미로웠다.
솔직히 연기는 루카의 새로 생긴 취미 활동이었다. 스케이트에 관심이 생겨서 한참 스케이트를 배웠던 것처럼, 삼촌이 일렉 기타를 연주하는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 배웠던 것처럼, 수많은 취미 활동 중에 하나. 딱 그 정도의 느낌.
또래의 존재가 루카를 자극하지만 않았더라도 계속 그 정도였을 텐데.
루카는 또래보다 잘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루카는 승자였고, 가진 자였으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아니었다.
루카가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자랐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루카는 남들보다 흐름과 감정을 기민하게 느꼈다.
도현이 대본을 읽는 순간, 그 공간의 모든 흐름이 그 아이를 중심으로 돌았다.
사람들이 내쉬는 공기, 작은 시선, 무의식 한 조각까지 지배하는 건 그 애였다. 루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어느 순간 눈으로 그 애를 쫓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동안 삶에서 전무후무할 거라 생각했던 경험을 하게 되자, 루카는 복잡 미묘해졌다. 처음 겪는 일이 놀라우면서도, 자신의 것을 빼앗긴 게 불쾌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불쾌하면 응당 싫어져야 하는데, 루카는 도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자신의 감정이지만 도저히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카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재밌으니까 됐잖아?’
아주 명쾌한 해답이었다.
“그래도 공주님 조금 쉬었으면 좋겠는데…. 이러다가 쓰러지면 어떡해.”
“아빠는 내가 설탕 과자인 줄 알아? 이 정도론 안 쓰러져.”
“하지만….”
“됐어, 됐어! 이제 그만! 나 다시 대본 봐야 하니까 아빠는 혼자 놀아.”
맷 하퍼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루카를 응시했지만 루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시무룩해진 맷 하퍼가 열심히 하라는 응원을 남기고 미적미적 방에서 나갔다.
루카가 빙글, 돌아 엎드린 자세로 되돌아왔다.
“으음! 좋았어! 다시 시작해야지!”
찹찹!
찰지게 볼을 때린 후, 대본을 눈에 담았다. 파란 눈동자가 움직이며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종업식이 되었다. 그사이 삼 주에 걸쳐서 했던 밴드 연습이 끝났다. 밴드 연습은 끝났지만, 도현은 헤이즐에게 계속 드럼을 배웠다.
일주일에 다섯 번 학원에 갔으니 거의 매일같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차피 촬영을 시작하면 그때는 배울 시간도 없을 게 분명하니, 시간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도현의 일상은 쳇바퀴처럼 굴러갔다. 드럼 학원을 가고, 연기 연습을 하고, 방에서 혼자 게임을 하다가 가끔은 친구들이랑 놀고.
그러다 보니 3학년 2학기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방학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어서 얼떨떨할 정도였다.
현재.
도현은 공원에 와 있었다. 해리 선생님이 종업 파티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제 고학년이 된다니, 믿기지 않아.”
돗자리에 대자로 누운 니콜라스가 구름이 드문드문 흘러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도현이 니콜라스의 말에 동의했다.
한 학년 올라간다는 게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작년처럼 이 순간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눈을 감았다 뜨면 병실에 있을까 봐 두렵지도 않았다.
아, 그렇구나.
도현은 뒤늦게 깨달았다.
언제부터인가 다음 날을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미래가 아득하기보다는 기대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어느새 이 평화로운 일상이, 평범한 하루하루가 당연해져 버려서.
그건 아주 천천히 일어난 변화여서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지. 3학년을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깨닫다니. 이성적인 사고를 통한 것들은 남들보다 몇 배는 빨리 배우면서, 감정에 관련된 영역은 정말 늦되었다.
도현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고개를 들었다. 풍경이 눈에 담겼다.
언제나 바랐던 평범함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문득, 도현은 뺨을 스쳐 가는 바람 하나까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도현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웃자, 카메라로 공원 이곳저곳을 찍던 진이 따라 웃었다.
“얘들아! 주스 마셔!”
해리 선생님의 부름에 니콜라스가 다리를 쭉 들어 올리더니 반동을 이용해 훅 일어났다. 도현도 니콜라스를 따라 일어나, 해리 선생님이 계신 벤치 앞으로 향했다.
벤치에는 주스가 따라진 종이컵이 쪼르르 나열해 있었다. 오렌지 주스였다.
‘왜 다들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거지.’
어딜 가든 기본적으로 내주는 주스가 오렌지 맛이라는 것에 도현은 조금 유감이었다. 속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 얌전히 종이컵에 손을 뻗을 때였다.
툭.
“…헙.”
손등을 부딪힌 사람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 아일라였다.
도현과 눈을 마주친 아일라가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렸다.
“아.”
도현이 작게 의미 모를 감탄사를 흘렸다. 아일라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도현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애도 있었지.’
이 정도 감상이 전부였다.
아일라와 헤더가 갈등을 빚었던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 아이들과 어울리기 힘들어하던 아일라는 점점 다시 무리에 스며들었고, 반은 평화를 되찾았다.
헤더와는 어느 순간 화해를 했는지 종종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아일라와 도현은 접점이 거의 전무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일라가 도현을 피한 거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반인데도 그 정도로 마주치지 않기 힘들 테니까.
아일라가 발을 들썩였다. 자리를 뜨고 싶은데 도현이 쳐다보고 있어서 못 가고 있는 기색이었다. 도현은 종이컵을 들며 말했다.
“방학 잘 보내.”
“…어?”
아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응! 너, 너도 잘 보내!”
“그래.”
간단하게 대답한 도현이 몸을 돌렸다. 아일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말을 건 건 별 이유 없었다.
그냥 오늘이 종업식이니까.
사실, 도현은 더 이상 아일라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때는 분명 헤더를 힘들게하는 아일라가 못마땅했고, 아일라의 행동이 유쾌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도현은 친구들이 모여 있는 돗자리로 돌아가며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이내 혀끝에 침이 고이는 신맛에 후회하며 눈을 찡그렸다.
“도리! 과자 먹어!”
진이 손짓하는 것에 도현이 발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돗자리에 앉으니, 햇빛에 데워진 돗자리 덕에 엉덩이가 뜨끈했다.
“너네 방학에 뭐 할 거야?”
“나 수영 캠프.”
“또?”
“여름이잖아. 여름에 수영 캠프 안 가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니콜라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진을 쳐다보았다. 진과 니콜라스는 서로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작년이랑 다른 데로 갈 거야. 작년에는 너무 시시했어.”
“할리가 너 완전 잘 놀았다고 했는데.”
도현이 툭 내뱉자 진과 다비드가 니콜라스를 쳐다봤다. 니콜라스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건! 그냥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 거지. 아무튼. 이번에는 정말 하루 종일 수영만 하는 캠프에 갈 거야.”
니콜라스 나름대로 마음을 굳게 먹은 거 같았다. 도현은 소소하게 그의 바람을 응원했다.
“그럼 도리는….”
도현을 쳐다본 진이 곧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다비, 넌 뭐 할 거야?”
“?”
자연스럽게 생략당한 도현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나 방금 엄청 자연스럽게 무시당하지 않았나?
“으핳! 쟤 표정 좀 봐.”
다비드가 웃는 것에 아차 한 도현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계속 웃는 다비드를 무시하며 도현이 침착하게 물었다.
“진, 나는?”
“으응… 도리 넌 좀….”
“?”
왜. 나 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도현의 표정이 뚱해졌다.
“아하학! 진짜 바보 같아. 야, 넌 너무 뻔하잖아.”
다비드가 (비)웃으며 하는 말에 도현이 물음표를 띄웠다.
“어차피 촬영할 거 아니야. 아니면 연기 연습하겠지. 그리고 시간 남으면 드럼 좀 뚝딱거리고.”
정확했다.
언제부터 다비드가 이렇게 날 잘 알게 된 거지? 도현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도현이 역으로 물었다.
“너는 뭐 할 건데?”
“그냥 집에 있을 건데.”
다비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며칠 전에 맥이랑 문자할 때 똑같은 대답을 들은 거 같은데. 음, 둘이 만나면 잘 맞으려나.
도현이 딴생각을 하는 사이 진이 말했다.
“난 여행 갈 거야.”
“여행?”
“응. 네덜란드 가서 한 달 지내다 오기로 했어!”
“우와, 부럽다. 나도 네덜란드 가보고 싶어.”
“다비 넌 어디 가봤는데?”
“나? 난….”
아이들이 여행을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도 한번 가야 하는데.
지난 겨울 방학에는 원래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도현이 갑작스럽게 아픈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지만.
부모님이 도현을 탓한 적은 없었지만, 도현은 그 생각을 할 때면 심장이 무거워졌다. 자신 때문에 떨어져 사는데 또 자신 때문에 몇 달 만의 만남도 무산되어 버렸다.
해갈될 길 없는 죄책감이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젠 익숙해진 감정이었다.
도현이 돗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밝은 얼굴로 말을 멈추지 않고 떠드는 아이들을 보았다. 해사한 얼굴 위에 밝은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장면은 차라리, 하나의 명화처럼 느껴졌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오래도록 남아 이어질 거 같았다.
그래서일까.
일시적으로 모든 두려움과 불안함이 사라졌다. 햇살이 포근한 날 그물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 때처럼 온전한 안정감에 푹 적셔져, 평화에 절여질 것만 같았다.
도현은 정말 불현듯이, 충동적으로 생각했다.
한국으로 갈까.
* * *
“오스카, 오랜만에 보네요.”
“그러게. 몇 주 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
“이틀 전에도 통화했잖아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도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잘 지냈어요.”
“방학했는데 연습만 하고 산 건 아니지?”
오스카는 슬슬 도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대략 파악하게 되었다. 처음 그가 도현에 대해 했던 오해가 어이없게 느껴질 만큼이나, 그가 노력광이라는 것도, 무서우리만치 성실하다는 것도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오스카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러려고 했는데, 그보다 논 시간이 더 많아요.”
방학하고 대략 일주일.
도현이 촬영 들어가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그 일주일의 시간을 알차게 활용할 계획을 모두 짜놓았던 도현은 뿌듯하게 웃었지만… 안타깝게도 방학 첫날부터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방학 첫날.
아침에 계획대로 일찍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정원을 산책한 후 하루를 여는 독서를 시작했다.
그 후 엄마와 아침을 먹고 본격적으로 대본 리딩을 하며 입을 풀 때였다.
띵-동
- 노올자, 도리야!
- 도리도리 나와라!
- 아, 더워! 빨리 나와!
도현이 나오지 않으면 쳐들어올 기세였다. 도현은 대본을 내려놓는 것도 깜빡한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납치당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