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새로운 인연 (11)
당황한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엄마는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렇게 도현은 나르샤의 차로 강제 농구장행을 당했다.
- 야, 패스, 패스!
손짓 발짓을 하는 다비드에게 공을 던지면서도 도현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였다. 그들은 한바탕 뛰어놀며 땀을 빼고는 지쳐 늘어진 도현을 질질 끌어서 수제 버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감자튀김이 참 맛있었다.
이후, 니콜라스의 집으로 옮겨져 보드게임을 열 판 정도 한 후에야 도현은 집으로 다시 이송될 수 있었다.
서혜나는 잘 놀고 왔냐며 웃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도현은 뒤늦게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다음 날,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의 다음 날… 촬영 시작 삼 일 전까지 매일 같이 반복되었다.
마지막 날, 잘 놀았다며 뿌듯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도현은 아직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애들은 놀고 살아야지.”
오스카가 도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아티스트의 매니저치고는 불성실한 말이었다.
“아무튼, 이제 갈까?”
“네.”
도현은 오스카를 따라 차에 탑승했다. 배웅하는 케일리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후, 차가 출발했다.
드디어 도현의 첫 촬영 날이었다.
“오… 이거 꼭….”
“ 촬영 때가 생각나네요.”
“그러게.”
생각이 통한 도현과 오스카가 웃었다.
정말, 영화 촬영장은 그때와 닮아 있었다. 촬영지가 학교라는 것도, 아이들이 바글바글하게 많다는 것도, 스태프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도.
도현을 발견한 스태프가 감독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도현은 스태프가 알려준 곳으로 걸어갔다.
무언가 열심히 지시하고 있는 스티브 로이 감독이 보였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 도현! 왔구나. 오랜만에 보네.”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열심히 촬영하면서 지냈지.”
스티브 로이와 도현은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삼 주간의 밴드 연습 덕분에 감독과 배우의 사이도 어느 정도 가까워진 상태였다.
“친구들은 저기 있을 거야. 가서 같이 촬영 준비하고 있어.”
“네, 알겠어요.”
그가 손짓한 곳으로 가자, 도현을 발견한 루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도현! 어서 와.”
“안녕, 루카.”
버벅거리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루카는 촬영장이 집처럼 편해 보였는데, 그건 털털한 성격도 성격이지만, 주인공인 그녀는 이미 몇 주 정도 전부터 촬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 스태프가 다가왔다.
“제이 로빈 역의 도현 리 맞죠? 이 의상 입고 나오면 돼요. 어디 불편하거나 이상한 곳 있으면 말하시고요.”
“얼른 갈아입고 와! 여기 교복 완전 예뻐.”
루카의 재촉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도현은 의상을 받아 들고는, 의상 팀 스태프를 따라서 탈의실로 갔다. 탈의실에 들어가서 옷을 펼쳐 보니, 바글바글 모여 있던 아이들이 입은 것과 같은 디자인의 교복이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브이넥 니트까지는 무난했지만, 체크무늬가 들어간 노란색 넥타이나 검은색 재킷의 칼라 끝부분에 들어간 노란색 체크무늬가 포인트가 눈에 띄었다.
하의는 깔끔한 검은색이어서 노란색의 포인트가 과해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고급스러운 느낌이라 의상 팀이 얼마나 교복 디자인에 힘을 썼는지 알 거 같았다.
옷을 입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가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완전 잘 어울리는데?”
“그래요?”
오스카의 칭찬에 도현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오스카가 그렇게 말하니, 꽤 괜찮게 어울리는 거 같기도 했다.
메이크업실에 앉아 가벼운 화장과 함께 헤어 스타일링에 들어갔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헤어 디자이너의 손이 지날 때마다 부스스해졌다. 두꺼운 안경까지 쓰고 거울을 보니, 어딘가 음침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소년이 한 명 있었다.
“인상이 완전 다르네.”
도현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이 거의 안 보여서 그런가 평소 이미지와 많이 달라 보였다.
필요한 분장을 모두 마치고 아이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갔다.
브레디가 등을 보이고 서 있길래 살짝 손으로 치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도, 도현?”
“응.”
“와.”
“평소랑 느낌이 많이 다르지?”
“응, 진짜 신기해.”
브레디는 정말 신기한지 도현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도현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루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했다.
보기 드문, 색이 연한 금발을 뒤로 깔끔하게 넘긴 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린데도 선명한 이목구비가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역할 비중이 꽤 있을 거 같은데.’
도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확인한 브레디가 입을 열었다.
“아, 그 역할이래. 마테오.”
“오.”
도현이 감탄사를 뱉었다.
밴드부원 역할이 아니고, 비중이 조금 적은 편이라 주연 배우 미팅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마테오는 영화에서 꽤 중요한 역할이었다.
‘악역이니까.’
악역이라고 정의하는 건 너무 간단하고 단순한 느낌이긴 하지만, 롤을 정하자면 그랬다.
“되게 잘생겼지? 처음 보고 놀랐어.”
“그러게.”
도현이 별 생각 없이 동의하는데, 도현을 힐끔거린 브레디가 갑작스레 말했다.
“그, 그래도 네가 더 잘생겼어!”
“……?”
도현은 거울을 보고 왔다.
자신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잠시 이해할 수 없단 눈초리로 브레디를 보다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어, 응, 고마워. 너도 잘생겼어.”
“내, 내가 무슨!”
부끄러워하는 브레디에 웃던 도현이 루카와 마테오 역할의 배우에게로 다가갔다. 도현의 뒤를 브레디가 황급히 따라갔다.
루카가 도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언제 왔어?”
“방금.”
“순간 못 알아볼 뻔했어. 눈이 하나도 안 보이네.”
“조금 그렇지?”
“응. 넌 눈이 예쁜데 아깝다.”
직설적인 칭찬에 부끄러울 법도 했지만, 진의 찬양으로 단련된 도현은 익숙하게 고맙다고 대답했다. 도현은 루카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 이도현이야. 도현이라고 부르면 돼. 제이 로빈 역할이고.”
“난 헤레이즈 아이데야.”
듣기 좋은 미성이었지만, 조금 거들먹거리는 말투였다.
마테오는 학부모 대표인 어머니 덕에 학교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로, 아이들 무리의 중심이자 대장이었다. 또한,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오만한 성격 탓에 비열해 보인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헤레이즈는 마테오 역할을 맡았다는 게 쉬이 납득될 만큼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냥 잘생긴 게 아니라, 루카처럼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루카가 카리스마와 어딘가 반항적인 느낌이 있다면, 헤레이즈는 왕자님처럼 생겼다. 색소 연한 금발과 청회색의 눈동자 탓인가, 체형이 그리 마르지 않았는데도 유약하고 예민해 보이기도 했다.
노란 체크무늬가 포인트로 들어간 교복을 입고 있는 소년은 거대한 저택에 사는 도련님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거 같았다.
솔직히 외양만 봐서는 잠깐 등장하는 조연이 아닌 주인공처럼 보였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좀 더 크면 로맨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안경 도수 있는 거야?”
“아니, 그냥 소품이야. 도수는 없어.”
“그럼 안경 벗어보면 안 돼? 인사하는데 얼굴이 안 보여서 좀 그래.”
“음, 잠깐만.”
도현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 않게 안경을 조심스레 벗었다. 코를 누르던 물체가 사라지자 조금 편해졌다.
도현이 눈을 깜빡이며 헤레이즈를 쳐다보자, 헤레이즈가 잠깐 눈가를 찡그렸다.
헤레이즈는 도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도 루카가 계속 도현의 이야기만 했고, 다른 애들도 틈만 나면 자꾸만 그 애 얘기를 꺼냈다. 만나본 적 없는 남자애의 칭찬을 계속 들으니 괜히 반발심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잘났길래 그래?
그래도 내가 더 잘생겼을 테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뭐 저렇게 생겼어?’
웬만하면 코웃음 치고 승리를 만끽하려고 했는데, 안경을 벗는 순간 그게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저 안경은 무슨 봉인구야?’
황당했다.
잘생긴 걸로는 어디 가서 밀려본 적이 없었기에 더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헤레이즈가 결국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제 써도 돼.”
“그래.”
도현은 담담히 안경을 도로 썼다.
짧은 대화를 통해 느낀 것은, 헤레이즈가 마테오와 상당히 비슷한 성격 같다는 것이었다. 브레디도 그렇고 주디스도 그렇고 콜린도 그랬다.
‘감독님이 의도한 거겠지.’
아역 배우일수록 본인이 가진 본연의 이미지나 느낌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인 거 같았다.
그때, 스티브 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촬영 준비합시다! 배우들은 교실로 가고!”
스티브의 말에 스태프들이 아이들을 인솔했다. 그게 촬영장이 아닌, 꼭 선생님과 초등학생의 견학 현장 정도로 보여서 오스카는 입을 꾹 다물며 웃음을 참았다.
아이들은 각각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도현의 자리는 구석진 끝자리였다. 도현은 자리에 앉아 등을 구부정하게 숙였다.
“씬 넘버 8. 캐시가 전학 오는 장면부터 찍습니다! 거기, 왼쪽 줄에 앉은 친구, 그래, 너. 조금만 더 몸을 이쪽으로 틀고. 좋아, 그 상태로.”
몇 번의 지적과 수정이 이어졌다.
스티브의 눈이 아역 배우들을 훑다가, 이내 도현에게 닿았다.
‘지적할 부분이 없네.’
그냥 제이 로빈이 교실에 앉아 있는 거 같았다. 다른 아이들에게 있는 어색함이 도현에겐 보이지 않았다.
스티브는 도현에게서 눈을 떼고 카메라를 통해 전체적인 구도를 확인했다. 몇 번 수정해서 그런지 원하던 구도가 나와 있었다.
“진짜 학교라고 생각해. 자연스럽게 하면 돼.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 틀려도 괜찮으니까 너무 긴장하지도 말고!”
스티브 로이의 말에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몇몇 아이들이 보였다. 도현은 긴장이 아닌, 설렘으로 인해 떨렸다.
씬 넘버 8.
이 장면에서 제이 로빈은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출연이었다. 누군가는 시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도현은 이렇게 군중 속의 한 명 정도의 역할을 촬영해본 적은 없어서 꽤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루카의 연기 기대되네.’
대본 리딩 때 언뜻 보긴 했지만, 루카는 성격 그대로 연기에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게 캐시 와일드라는 캐릭터와 잘 어울려서 시너지를 발휘했다.
루카가 본격적으로 연기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자, 시작합니다.”
도현이 생각을 멈추곤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을 끊었다. 대신 어젯밤 내내 했던 게임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산타 모니카 초등학교 교실 안.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다. 가운데 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거들먹거리듯이 주변의 아이들과 떠드는 아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드르륵!
교실의 문이 열리자, 금발의 소년이 언제 발을 책상 위에 올렸냐는 듯 다리를 내리고 반듯하게 앉았다. 모로 보나 모범생 그 자체였다.
단숨에 조용해진 교실.
아이들의 시선이 담임 선생님 뒤를 따라오는 한 소녀에게 박혔다.
군데군데 보라색 브릿지를 한 머리카락. 니트 조끼는 어디 가고 와이셔츠에 넥타이, 재킷만 걸친 불량한 복장에 심지어 치마엔 은색의 체인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목에 두른 검은색 초커에 달린 해골 모양 장식과 그래피티 같은 낙서가 가득한 가방에 놀란 아이들의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그 소녀는.
‘짜증 나.’
캐시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온 것도, 자신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는 머저리들도.
캐시가 불만스러운 낯으로 저를 쳐다보는 반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캐시 바로 앞에 앉은 아이였다. 맨 앞자리라서 캐시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은 아이가 바들바들 떨다가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곤 고개를 숙였다.
유일하게 캐시의 표정을 보지 못한 담임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반이 된 친구야. 자, 캐시. 친구들한테 인사해볼까?”
“제 자리는요?”
“캐시?”
캐시가 귀찮다는 얼굴로 다시 말했다.
“제 자리요.”
“어, 저, 저기인데….”
성큼성큼!
선생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캐시가 당당하게 걸어갔다. 뒤에서 당황한 선생님이 캐시를 불렀지만, 캐시의 발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자리에 도착한 캐시가 가방을 거칠게 책상 위에 던지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정면을 응시하자, 선생님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캐시가 부끄러움이 많나 보네. 새로 온 친구 이름은 캐시 와일드야. 앞으로 친하게 잘 지내야 해. 알겠지?”
간단하게 캐시의 소개를 마친 선생님이 조례를 끝내고는 반을 나갔다.
아까부터 계속 눈치를 보고 있던 캐시의 옆자리, 엘비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아, 안녕…!”
“꺼져.”
“힉!”
엘비가 놀라 움츠리든 쫄아서 겁을 먹든 관심이 없던 캐시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쑤셔 넣었다.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이어폰을 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 캐시에 엘비가 눈을 굴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리고 무시당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