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93)화 (194/582)

제193화. 새로운 인연 (12)

루카의 연기는 거침없었다.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그냥 편하게 연기하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도현의 눈에는 그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기까지 했을 루카의 노력이 보였다. 왜냐면 자신이 그러니까.

씬 넘버 8의 재촬영이 이어졌다.

루카의 연기가 부족했다기보다는, 긴장이 덜 풀린 아이들의 움직임이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든지 반복되면 익숙해지는 법.

스티브 로이는 꽤 부드러운 감독이었다. 아이들이 어색함을 이겨내고 본연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격려하며 기다려 주었다.

그가 호통보다 격려를 선택한 건 현명한 일이었다.

갈수록 긴장이 풀린 아이들이 정말 학교라도 되는 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반복과 반복 끝에 처음으로 오케이 사인이 나왔을 때는, 몇몇 아이들이 반사적으로 환호를 내지르기도 했다.

계속해서 다음 장면이 이어졌다.

도현은 교실에 앉아 있었지만, 이 장면에서 도현이 화면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완전히 연기에 집중했던 아까와 달리 아이들의 연기를 눈에 담았다.

도현의 시선이 루카에게로 향했다.

루카는 이어폰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쿡 집어넣고 있는 모습이, ‘말 걸지 마라’라는 기운을 풀풀 풍기는 거 같았다.

그런 루카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보통 아이라면 고개를 들어서 뭔지 확인했겠으나 ‘캐시 와일드’는 보통의 아이가 아니었다. 아는 척을 해주지 않는 루카에 헤레이즈가 헛기침을 했다.

“큼, 흠.”

“…….”

똑똑!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음악에 맞춰 고개만 까딱이는 루카에 헤레이즈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제야 고개를 든 루카가 헤레이즈를 쳐다보았다.

“…큼, 난 마테오 휴스인데, 이 반 반장이야. 엄마는 학부모 대표고.”

은근히 잘난 척하며 뽐내는 게 얼굴로 드러났다. 그게 잘난 얼굴과 어우러져 재수 없어 보이면서도, 동시에 어린 소년인 탓인지 그 치기 어린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도현의 눈에만 그런 건 아닌지, 스태프들의 반응이 좋았다. 헤레이즈를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잘 보진 못했지만, 분명 이전의 연기, 그러니까 선생님이 반에 들어오시기 전 시끄럽게 떠드는 연기도 거의 유일하게 스티브에게서 지적을 몇 번 안 받았던 걸로 기억했다. 물론 한 번도 지적받지 않은 도현은 예외였다.

도현이 생각하는 사이, 몇 번이나 루카에게 무시당한 헤레이즈가 얼굴을 찡그렸다 펴더니, 선심을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너, 나 무시하는 거야? 나한테 이러지 않는 게 좋을걸? 이 반에서 생활하려면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아.”

휙!

루카가 오른쪽 귀에 끼운 이어폰을 빼냈다. 루카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에 헤레이즈의 표정이 밝아지려던 찰나였다.

“시끄러. 음악 소리가 잘 안 들리잖아.”

“푸흡!”

웃음이 터진 아이가 헤레이즈의 노려보는 시선에 어깨를 움찔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럼에도 다 제지할 수는 없어서, 마테오와 캐시를 보고 있던 반 아이들이 그를 보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결국 헤레이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 너 두고 봐!”

이를 간 헤레이즈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다가 휙 뒤를 돌았다. 헤레이즈가 쿵쾅거리며 자리에 돌아갈 때까지 루카는 그저 음악에 맞춰서 고개만 까딱였다.

지독한 마이페이스였다.

“컷! 오케이!”

도현이 봤을 때 두 사람의 연기가 재밌었는데, 스티브도 마찬가지였는지 오케이 사인이 났다.

스티브 로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계속해서 루카와 마테오가 부딪치는 장면을 중심으로 촬영했다. 도현의 역할인 제이 로빈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가 아니라서 도현은 몇 번이고 부딪치는 두 사람의 뒤에 있는 학생, 놀라는 학생, 지나가는 학생 정도의 역할을 해내었다.

도현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좀 과하게 자연스러워서 풍경의 일부 같아 가끔 스티브가 도현을 인식하지 못했다.

길가에 핀 들풀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 자리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서 인식 범위 내에서 벗어나는 기현상이었다.

오전 촬영을 마치고 모니터링을 하던 스티브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잠시 후.

“좋아요! 이제 식사합시다!”

모니터링을 끝낸 스티브 로이의 외침에 에너지를 사용해서 배가 고팠던 아이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뱉었다.

“도현! 여기야!”

음식을 덜고 자리를 찾는 도현을 향해 콜린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테이블에는 밴드 멤버와 헤레이즈가 앉아 있었다.

“여기 앉아.”

콜린이 살짝 옆으로 비켜 앉으며 도현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도현은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6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꽉 찼다.

자리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주디스 루카 헤레이즈

[테이블]

콜린 도현 브레디

잠시 양옆에 앉은 친구들의 식판을 본 도현이 웃음을 삼켰다. 어떻게 된 게, 담은 음식에도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콜린은 튀김과 고기류가 한가득했고, 브레디는 밥보다 어째 후식이 많아 보였다.

의외인 건, 헤레이즈의 식판이 초록색으로 한가득한 것이었다. 도현은 또래 친구들 중에서 저렇게 채소를 좋아하는 애는 처음 보았다.

정신없이 먹는 아이들 사이에서 포크로 오물오물 조용히 채소를 씹어 먹는 헤레이즈는 거대한 저택의 도련님 같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도현의 맞은편에 앉아서 파스타를 돌돌 말아먹던 루카가 고개를 들었다.

“아, 도현. 나 연기하는 거 봤어?”

“응? 봤지.”

“어땠어?”

잠시 무슨 의도로 물은 걸까 고민하다가, 도현은 솔직하게 답했다.

“잘하더라.”

“정확히 어떤 연기가?”

“음… 난 그게 제일 좋았어. 엘비한테 꺼지라고 했던 부분.”

초반에 가장 짧고 굵게 캐시의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어색하거나 힘이 없었다면 임팩트가 없었을 텐데, 원래도 낮은 편인 루카의 목소리와 시니컬한 말투가 어울려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 냈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은 그 장면을 보고 나면 캐시라는 인물에게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을 거 같았다.

도현의 대답을 들은 브레디가 이상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이 욕을 먹은 장면이 제일 좋다니 기분이 묘한 모양이었다.

그 후로도 루카는 도현에게 계속 연기에 대해서 물었다. 이 부분을 일부러 이렇게 했는데 어떤지, 여기선 목소리를 좀 높일지 아니면 그대로 갈지, 이때 팔을 움직이는 제스처를 추가하면 어떤지.

연기에 관해서 얘기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진과 니콜라스는 말이 잘 통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관심사 자체가 다르니 어쩔 수 없었다.

도현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지금까지 만나면서 도현이 이토록 신난 모습은 처음 본 루카는 머릿속에 ‘연기 바보’라는 정보를 저장했다.

두 사람이 신나게 토론하니, 아이들이 끼어들어서 의견을 나누었다. 아이들이 무어라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걸 본 스티브 로이가 호기심을 가졌다가 그게 연기에 관한 내용임을 알고 기특하단 표정을 지었다.

“좋아! 헤레이즈, 나랑 밥 먹고 싸우자!”

“풉!”

귀여운 아역 배우들에 아빠 미소를 짓고 있던 스티브가 뿜었다. 그가 멍한 표정으로 아이들이 앉은 테이블을 보았다.

홀로 벌떡 서 있는 루카가 당당하게 헤레이즈를 향해 선전포고하는 중이었다.

“내 주먹에 맞으면 좀 아플 거야. 그래도 제대로 할 거니까, 밥 먹고 나와. 한판 붙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하, 좋아.”

헤레이즈가 턱을 치켜올리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승낙했다.

“나도 구경 갈래!”

“나도 나도!”

아이들은 말리기는커녕, 신이 나서 구경하겠다고 난리였다. 스티브는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온도 높은 아이들 사이에서 홀로 저온의 텐션을 유지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사람을 끄는 힘이 있는 건지 큰 목소리가 아니어도 유독 귀에 콕 박혔다.

스티브의 얼굴에 희망이 떠올랐다. 이 목소리의 주인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그래, 도현 너만큼은 아이들을 말리….

“내가 적당한 장소를 알아. 여긴 촬영 장비가 많아서 위험하니까, 거기에 가서 하자.”

“오! 역시 도현이야!”

“…….”

파스스-.

스티브의 희망과 멘탈이 하얗게 부서져 흩날렸다.

“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서…”

“잠깐!”

아이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스티브 로이가 굳은 얼굴로 아이들을 보고 서 있었다. 혼낼 건 혼내야 한다. 스티브가 마음을 굳게 먹곤 말했다.

“나는 내 촬영장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네?”

“갈등이 있으면 말로 풀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촬영장에서 싸울 생각을 해? 루카, 너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야. 그만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라고. 그런데 그런 태도는 도대체,”

“…잠시만요, 감독님.”

누군가 스티브의 말을 끊었다. 곤란한 얼굴을 한 도현이었다.

“도현. 너도 마찬가지야. 굉장히 성숙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말리지는 않고 오히려 부추기다니.”

“음. 일단 말을 끊어서 죄송해요. 그런데 한 가지 오해하신 게 있는 거 같아서요.”

“오해?”

스티브는 도현이 친구들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변명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도현의 변명을 기다렸다.

“네. 루카가 헤레이즈 보고 싸우자고 한 건, 진짜 싸우자는 게 아니라 싸우는 장면을 연습하자는 뜻이었어요.”

역시나 변명…?

“…뭐?”

“연기 연습이요.”

스티브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의 면면을 둘러보니, 어른이 화를 내는 모습에 겁을 먹은 브레디를 제외하고는 다들 힘겹게 웃음을 참고 있었다.

도현은 혼란스러울 스티브를 위해 친절하게 덧붙였다.

“음… 그러니까, 싸우는 장면의 합을 맞춰봐야 부상도 예방할 수 있고 연기에도 도움이 돼서… 네. 그런 거죠.”

“그러니까 진짜 싸운 게 아니라고?”

“네에….”

아.

도현도 더 이상 웃음을 참는 건 힘들었다. 결국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렸다.

“프하하하!”

크게 터져버린 루카가 테이블을 치며 크게 웃었다. 옆에서 헤레이즈도 연신 부들부들 진동하고 있었다.

장본인인 루카와 헤레이즈를 놔두고 도현이 해명을 한 건, 두 사람이 아까부터 웃느라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싸운 게 아니라 다행이구나.”

잠시 후.

스티브 로이가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애들아, 오해한 건 미안하지만… 이제 좀 그만 웃지 않겠니?”

그러나 지나가는 친구 얼굴만 봐도 자지러지는 나이에 그게 통할 리가.

결국, 스티브 로이가 먼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 * *

타악!

챙그랑!

캐시가 충격에 뒤로 넘어졌다. 캐시의 손에 들려 있던 식판이 바닥에 떨어지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아, 미안. 그러니까 앞을 잘 봐야지.”

넘어진 채 고개를 숙인 캐시를 보고 비웃은 마테오가 무리를 이끌고 캐시를 지나쳤다.

잠시 그 자세로 가만히 있던 캐시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하.”

그리고, 눈이 완전히 맛이 간 캐시의 표정이 카메라에 담겼다.

첫날 이후.

마테오는 끈질기게 캐시를 귀찮게 했다. 조별 과제를 할 때 캐시만 따돌린다거나, 체육 시간에 캐시가 짝을 이룰 수 없도록 한다거나, 복도를 지나갈 때 무리와 비웃는 등.

솔직히 그것도 빡치긴 했지만,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주변을 날아다니는 모기가 짜증 나게 구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지.

캐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대로, 마테오가 있는 곳을 향해 직진했다.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야, 돼지야. 이렇게 많이 먹으니까 그렇게 살이 찌지.”

“나, 난 돼지가 아니라 엘비야…!”

“그래 엘-피그. 꿀꿀해봐, 꿀꿀.”

마테오의 조롱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울상이 된 엘비가 고개를 떨구는데, 마테오가 엘비의 식판에 담긴 푸딩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내가 가져간다. 네 다이어트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응?”

터억.

얄밉게 이죽일 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잡고 몸을 끌어당기는 것에 마테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먹는 거 가지고 지랄 떨면 안 된다는 거 못 배웠어?”

퍼억!

쿠당탕!

마테오가 날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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