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새로운 인연 (13)
“도현!”
루카가 즐거운 얼굴로 달려왔다.
“도현, 진짜 네 말대로 하니까 완전 자연스럽게 됐어! 봤어?”
“응. 최고였어.”
도현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루카가 밝게 웃었다.
점심 식사 이후.
액션 신(?)을 연기하는 루카와 헤레이즈를 본 도현은 두 사람에게 에서 구타당하는 장면을 연기하며 느꼈던 팁을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연습했고-
연습 끝에 나온 장면은 꽤 멋졌다. 헤레이즈도 등이 조금 아픈지 문지르고 있었지만, 얼굴은 밝아 보였다.
“좋아, 이 기세를 몰아서 계속해서 찍어봅시다!”
스티브 로이 감독의 외침에, 루카가 도현의 어깨를 두드린 후 다시 세트장으로 달려갔다.
도현도 천천히 걸어갔다.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정도이긴 하지만, 급식실에는 제이 로빈도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여기저기서 인사 소리가 울렸다.
도현은 오스카에게 다가가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아역 배우는 법적으로 노동 가능한 시간이 정해져 있기도 했고, 또 스티브 로이 감독이 아역 배우를 너무 혹사하면 될 연기도 안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촬영은 일반적인 촬영에 비해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도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세트장을 정리하는 스태프들이 보였다. 배우들이 일을 끝내고 돌아갈 시간에도 스태프들은 여전히 바빴다.
무언가 도울 일이 없을까 둘러보다가, 척척척 움직이는 스태프들에 없음을 깨달은 도현은 프로는 다르단 걸 새삼 느꼈다.
“나, 나는 이제 가보려고. 너도 지금 가지?”
“아, 브레디. 응, 나도 이제 갈 거야. 잘 가.”
“응! 내일 보자!”
“그래. 래논 씨도 안녕히 가세요.”
“너도 조심히 들어가렴.”
브레디는 매니저 없이 부모님을 보호자로 대동했기 때문에, 도현은 그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멀어지는 브레디 가족을 보다가 도현은 인사해 오는 아이들에게 마주 인사를 해주었다. 마지막으로는 감독님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한 후 도현은 촬영장을 나왔다.
올 때는 이른 오전이었는데, 돌아갈 때는 햇빛이 짱짱한 오후였다.
철컥.
차에 올라타자, 오스카가 도현에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말했다. 얌전히 안전벨트를 맨 도현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일찍 끝났다고 해도, 촬영장에 몇 시간 내내 있는 건 아이의 체력으로는 역시 힘든 일이었다. 도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힘들어?”
“조금 피곤하네요.”
“그럴 만도 하지. 집에 가면 놀지 말고 푹 쉬어.”
“네, 그러려고요.”
컨디션 관리도 배우에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촬영하는데 컨디션 난조로 연기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되니까.
집에 가면 엄마와 밥을 먹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오스카가 말을 걸었다.
“촬영장 분위기가 되게 좋았지?”
“네, 스티브 감독님 덕분이죠.”
밴드 연습을 할 때도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스티브 로이였다. 그 시간 덕에 배우들이 감독을 편하게 여기니, 자연스레 촬영장 분위기도 부드러워졌다.
아이들은 의견을 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NG를 내는 것에 창피함과 무서움을 느끼기보다는 다음번에는 더 잘 찍어야지, 하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다.
도현의 말에 오스카가 긍정했다.
두 사람이 두런두런 떠들다 보니, 화제는 오늘 촬영한 장면으로 이어졌다.
촬영 때 역할 비중이 너무 적어서 아쉽진 않았냐는 오스카의 질문에 도현은 망설임 없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곧바로 단호한 답이 나올 줄 몰랐던 오스카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정말? 아, 물론 네가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비중이 높은 게 좋지 않아?”
“이것도 나름 재밌었거든요.”
이해할 수 없단 오스카의 표정에 도현이 부연 설명을 했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겨야 했어요. 화면에 비친 저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요. 관객이 스크린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장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응, 그렇지.”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요. 오히려 시선을 끌면 안 됐거든요. 그 장면에서 시선을 끌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니까.”
“어… 그러니까 눈에 안 띄는 연기를 했다는 거지?”
“네.”
오스카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알 듯 말 듯 애매한 거 같았다.
오스카에게 말했던 대로, 도현은 오늘 한 경험이 꽤 신선했다. 존재감을 뿜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여서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 그건 도현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도였다.
처음 몇 번은 그게 잘 안 돼서 스티브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도현에게 닿는 것을 도현은 종종 느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그 횟수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스티브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도현은 즐거움을 느꼈다.
“하여간. 너도 참 이해하기 어렵다니까.”
오스카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원래 천재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지.’
뒷말은 숨긴 채였다.
* * *
“도현아, 왔니? 아, 오스카 씨. 오랜만에 뵙네요.”
오스카와 도현이 집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었던 서혜나가 두 사람을 반겼다.
서혜나가 오스카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지만, 오스카는 늦기 전에 집에 들어가서 쉴 예정이라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도현은 서혜나와 같이 오스카를 배웅한 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약간 달달하면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배고프지? 밥 먹자. 손 씻고 옷 갈아입고 내려와.”
“네.”
도현은 서혜나의 말대로 방에 올라가서 손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부드러운 면이 몸에 닿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룸 슈즈까지 신고 주방에 내려오자, 도현은 달달했던 냄새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버섯전골이네요?”
“응. 너 이거 좋아하잖아.”
큰 냄비 가장자리에 채소와 온갖 종류의 버섯이 빙 둘러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불고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게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오스카도 먹고 갔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잠시 스쳤다.
의자에 앉자 서혜나가 접시에 한 국자를 덜어주었다. 먼저 국물부터 마시자 간장 베이스에 버섯과 채소의 향이 깊게 우러나, 달달함과 향긋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내내 긴장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늘 촬영은 어땠어?”
서혜나의 질문에 도현은 밥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서혜나는 간간이 맞장구를 치고, 질문도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도현이 버섯과 청경채, 불고기를 당면으로 돌돌 말아 한 입 크게 먹을 때였다.
“아, 너한테 말해줄 일이 있어.”
도현은 입 안에 든 것을 꼭꼭 씹어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요?”
“아빠가 여기로 올 거야.”
“…아빠가요?”
갑작스러운 소식에 도현이 먹던 것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응. 작년 여름에는 우리가 한국으로 갔잖아. 이번에는 그래서 아빠가 오기로 했어.”
그렇게 말하는 서혜나는 상당히 즐거운 기색이었다.
“아….”
“도현이 네가 촬영 중이라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촬영이 없는 날 가능하면 셋이서 놀러 가자.”
숟가락을 쥔 채로 멈춰 있는 도현에 서혜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아?”
“…아, 네. 좋아요. 촬영이 매번 있는 건 아니라서, 쉬는 날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다행이다. 그럼 도현이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니? 당일치기도 좋고 일박 이 일로 갔다 와도 좋을 거 같은데.”
서혜나의 질문에 도현은 친구들이 말했던 몇몇 곳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답했다.
그렇게 계획을 짜다 보니 금방 냄비가 바닥을 드러내었다. 도현은 서혜나가 주방을 정리하는 것을 도운 후 방으로 올라갔다.
책상 의자에 앉은 도현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곤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복잡함을 담아 일렁였다.
“말해야 하는데….”
그래, 이미 그러기로 마음먹었잖아. 분명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거다.
아빠가 미국에 오면, 그때 말하자.
속으로 다짐한 도현이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
* * *
“레디, 액션!”
스티브 로이 감독의 외침이 크게 울렸다.
스티브는 기대감이 어린 눈으로 카메라에 담긴 배우를 바라보았다. 오늘 촬영은 제이 로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아악!”
루카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브레디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왜야!”
쾅!
루카가 분한 듯 책상을 내리쳤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냐고!”
급식실에서 거한 사고를 친 캐시는, 평소 캐시를 괴롭혔던 마테오의 행동 때문에 학교 차원에서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개인적인 벌을 받았다.
바로 동아리에 드는 것.
동아리에 들지 않으면 다음 학년이 될 때까지 반 청소 고정 멤버로 만들겠다는 선생님의 협박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아리를 알아보았지만, 명문 중에서도 유독 꽉 막힌 학교인 산타 모니카 초등학교에 있는 동아리는 온통 지루하고 하품 나오는 것들뿐이었다.
일 년 동안 청소를 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독서 동아리나 천체 동아리, 수학 동아리는 거기에 만만치 않게 끔찍했다!
그래서 캐시는 결심했다.
록 밴드 동아리를 만들기로.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동아리로 인정받으려면 최소 다섯 명의 학생이 모여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처음, 캐시는 자신만만하게 포스터를 만들어 학교 곳곳에 붙였다. 이제 곧 있으면 동아리에 지원하는 아이들로 넘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지원자 수 0명.
“나, 나 있잖아….”
아니, 한 명이었다.
지난번, 자신을 괴롭히는 마테오에게 주먹을 날린 캐시에게 호감을 느낀 엘비는 현재 소속된 독서 동아리를 그만둔 뒤 자발적으로 록 밴드 동아리에 지원한 상태였다.
루카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브레디를 쳐다보았다.
“너 한 명 가지고 어디다 써! 세 명은 더 있어야 한단 말이야!”
발광하는 루카에 브레디가 용기 내어 말했다.
“대, 대부분 이미 동아리가 있으니까….”
“하….”
루카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야.”
“응?”
“동아리 안 든 애 누군지 알아?”
“어….”
브레디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일단, 우리 반에는 제이가 동아리에 안 들었을 거야.”
“제이? 그게 누군데?”
브레디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루카의 고개가 브레디를 따라 이동했다.
카메라 화면이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앉은 소년을 담았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제대로 안 빗는지 삐쭉빼쭉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고, 눈은 두꺼운 안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보이는 건 손에 든 게임기를 보며 실실 웃고 있는 입매였다.
활기차게 떠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저 공간만이 분리된 거 같았다.
“…쟤?”
“으응….”
제이 로빈의 등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