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95)화 (196/582)

제195화. 새로운 인연 (14)

‘게임을 하며 웃는다.’

현재 장면에 대한 지문이었다.

연습 때 도현은 이 장면을 연기하면서 어색함을 느꼈다. 아무리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도 게임을 하면서 실실 웃는 건 좀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사실 제이가 원래 범인은 이해할 수 없는 괴짜스러운 인물이긴 하지만, 도현은 좀 더 자연스러운 행동 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정을 추가했다.

제이가 플레이 중인 게임은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 4’.

한정판으로 출시된 게임기라서 배틀로얄 시리즈의 열렬한 팬인 제이는 이 게임기를 구하고 싶었지만, 번번이 구매에 실패했다.

그러다가 중고 판매로 올라온 게임기를 발견해, 재빨리 메시지를 보내 구매에 성공했다. 두근거리며 기다리길 며칠, 인고의 시간 끝에 어제 갓 손에 들어온 게임기였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핑! 피융!

비행기가 미사일을 날렸다. 도현이 탄식을 흘렸다.

배틀로얄 시리즈가 마니아들의 각광을 받는 건 바로 완벽에 가까운 현실 고증 덕분이었다.

미사일 질량에 따라서 미사일 궤적과 사거리가 달라졌다. 심지어 각도에 따라서 최고 도달 고도와 비행시간이 변하는데, 지금도 미사일 총 질량이 20톤, 에너지원이 미사일 총질량의 92%, 추력이 20톤의 1.5배가 가능할 때 85도의 각도로 발사하니까 총 사정거리가….

“야, 너.”

“허억.”

도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갔다.

아니, 아니야. 당황하면 더 수상해 보인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도현이 침착하게 입을 뗐다.

“선생님, 이건단순한게임기처럼보이겠지만사실고도의계산식을통해서 미사일궤적의변환식을구하는과학탐구용…?”

숨 쉬는 틈도 없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멈췄다. 말끝이 길게 늘어지며 위로 올라갔다.

선생님이 아니잖아…?

선생님한테 딱 걸린 줄 알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눈앞에는 전학생밖에 없었다. 도현이 재빨리 고개를 휙휙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생님이 반에 없는 걸 확인한 도현이 게임기를 품에 소중히 안았다.

“…무슨 일이야? 아까 말했듯이, 이건 게임기가 아니라 과학 탐구용 학습 보조기이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일러도 소용없어….”

루카가 한쪽 뺨을 찡그렸다.

“그런 건 관심 없어.”

“비, 빌려주는 것도 안 돼. 나도 어렵게 구한 거란 말이야. 내 보물 1호야.”

“안 뺏어가.”

“…정말?”

되묻는 말투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다. 두꺼운 안경에 눈이 가려져 있는데도, 얼굴에 어린 불신이 고스란히 보였다.

루카가 슬쩍 웃었다.

“맞고 믿을래, 그냥 믿을래?”

“그냥 믿을게.”

도현이 곧바로 대답하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냐는 듯 바르게 앉았다.

스티브 로이가 입술을 꾹 다물며 웃음을 참았다. 사소하고 평범한 장면인데, 도현이 연기로 찌질함을 잘 살린 덕에 웃겼다.

척!

루카가 도현의 책상 위로 화려하다 못해 어지러운 포스터 하나를 내려놓았다. 빨간색 바탕에 커다란 해골이 그려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흘러내리는 물감 같은 글씨체로 ‘Rock & Roll’이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정신없어지는 포스터였다.

“너, 내 록 밴드에 들어와.”

깜빡, 깜빡.

안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눈을 깜빡이던 도현이 어리숙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 올려 자신을 가리켰다.

“어, 너 말이야. 너.”

“록 밴드면….”

“어, 존나 멋진 음.”

“미안. 나는 관심 없어.”

“뭐? 왜?!”

콱!

루카가 도현의 옷깃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겼다. 자연히 도현은 루카에게 멱살이 잡힌 상태가 되었다. 목이 졸려 어정쩡하게 선 상태로 도현이 말했다.

“록이라면 나도 알아. 엔트로피의 소용돌이처럼 무질서하고 정신없는 음악이잖아. 한번 들어본 적 있는데 정신이 나갈 뻔한 경험이었어. 난 그렇게 정돈되지 못한 것은 좋아하지 않아. 그보다는 배틀로얄 오프닝 OST처럼 좀 더 고풍스러운….”

“엔트로피의 소용돌이고 뭐고, 감히 록이 싫다고 해? 네 뇌를 소용돌이치게 만들어줄까?”

“그, 그리고 난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어!”

“그게 문제야? 연주 못 해도 돼. 내가 다 알려줄게.”

툭.

루카가 멱살을 잡은 손을 풀어주자 도현이 루카에게서 파드득 멀어졌다.

“아, 알려준다고 해도 싫어! 난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 4를 플레이해야 해서 그런 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단 말이야!”

“배틀로얄 스플래쉬… 뭐?”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 4.”

게임기를 꼬옥 안은 도현은 조금 용기가 솟아난 듯 당당하게 말했다.

“미안한데, 내가 어제 새로 구한 거라서 클리어를 해야 하거든. 이, 이만 가줄래?”

물론 끝에 가서 조금 눈치를 보긴 했지만.

도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게임기를 다시 손에 들었다. 다행히도, 루카는 다시 도현의 멱살을 잡거나 게임기를 빼앗는 등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쿵쿵거리며 자리로 돌아가는 루카에 도현이 뻣뻣하게 긴장된 어깨의 힘을 풀었다.

‘휘유.’

이상한 전학생에게 걸릴 뻔하긴 했으나, 정중하고 예의 바르고 아주 사회성 있게 거절한 거 같았다.

도현이 뿌듯하게 웃었다.

“컷! 오케이!”

스티브 로이가 환하게 웃었다.

“이거 뭐, 디렉팅할 부분도 없는 거 같은데?”

“저 찍은 거 좀 봐도 돼요?”

“응? 그래, 당연하지.”

루카가 카메라를 통해 방금 촬영한 장면을 모니터링했다. 도현도 루카를 따라 옆에서 촬영된 장면을 확인했다.

눈이 가려져 있으니까 연기로 표현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몸과 얼굴의 하관을 사용해서 표현했는데, 의도했던 대로 나온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때였다.

“저, 다시 찍어도 될까요?”

“응? 왜?”

“조금 아쉬워서요.”

루카의 목소리에 불만이 서려 있었다.

대본 리딩 때도 가끔 그런 적이 있었는데 기분 탓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번 연기를 통해 루카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연기할 때, 주도권을 빼앗겼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도현이 연기하는 게 아니라, 도현의 페이스에 자연스럽게 말려들었다. 더 기분이 나쁜 것은, 따로 연습했을 때보다 더 연기하기가 수월했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소보다 잘한 거 같다고 만족할 수 있으면 루카가 아니었다.

‘내가 주인공인데.’

화면 속에서 루카보다 도현이 더 눈에 띄었다. 두 인물이 있으면 자연히 한 인물에게 더 시선 비중이 쏠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그게 주인공인 루카가 아니라 도현에게 향했다.

루카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하고 싶어요.”

“난 이것도 좋은 거 같은데… 그래도 몇 번 더 찍어봐서 나쁠 건 없지. 그렇게 하자.”

스티브가 루카의 요청을 수락했다.

“……?”

루카가 도현을 뜨겁게 쳐다보고 가는 것에, 도현이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

“뭐? 왜?!”

콰악!

루카가 얼굴을 구기며 도현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스티브 로이가 작게 감탄했다. 아까보다 표정에 디테일이 생겼다. 그리고 멱살을 잡아당기는 부분이 좀 더 거칠어졌다.

“로, 록이라면 나도 알아. 엔트로피의 소용돌이처럼 무질서하고 정신없는 음악이잖아.”

‘이쪽도 만만치 않군.’

아까 연기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더 괜찮았다. 루카가 다시 찍자고 해서 다행일 정도였다.

화가 난 캐시를 앞에 두고 설명조로 떠벌떠벌거리는 게 정말 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 같았다. 말투 하나와 사소한 몸짓 하나가 그랬다. 평소 단정하고 차분한 도현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배틀로얄 스플래쉬… 뭐?”

머글인 루카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는 빛이 떠올랐다.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 4.”

턱을 슬쩍 당기고, 게임기를 품에 안는다.

“미안한데, 내가 어제 새로 구한 거라서 클리어를 해야 하거든. …이, 이만 가줄래?”

와락!

얼굴을 찡그린 루카가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깨가 부풀었다가 내려갔다.

이내, 강렬한 눈빛으로 도현을 노려본 후 자리로 돌아갔다. 콱콱, 바닥을 걷는 건지 차는 건지 모를 걸음걸이가 거칠었다.

누가 봐도 ‘나 기분 상했어요’라고 티 내고 있는데, 눈치 없는 도현만이 잘 얘기한 거 같다고 생각하며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 대조되는 두 명이 우스워서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컷!”

스티브 로이가 고개를 들어 루카를 보았다.

‘괜찮은 거 같은데….’

스티브와 눈이 마주친 루카가 말했다.

“다시 부탁드려요!”

스티브가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방금 막 이보다 더 나은 장면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해진 참이었다. 지금도 좀 전보다 더 잘했으니, 그다음은 어떨까.

“…그래, 가자!”

촬영에 열이 올랐다.

* * *

“흐아!”

간신히 반복되던 촬영이 끝났다.

루카가 피곤한지 죽는 소리를 내며 도현의 옆에 털썩 앉았다. 도현이 잠시 놀란 눈으로 루카를 쳐다보았다.

“…왜? 내가 옆에 앉는 거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

도현이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루카가 앞에서 욕을 하는 거만 아니면 다 괜찮으니 말해보라고 털털하게 말했다.

“아니, 나한테 화난 줄 알아서.”

“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루카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너한테 화 안 났어! 왜 그런 생각을 해? 내가 말했잖아. 너랑은 친해지고 싶다고.”

“아….”

여전히 루카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 거침없었다.

“아까는 음… 너한테 화난 게 아니라, 그냥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어.”

“어떤 상황이?”

“내가 주인공인데 나보다 네가 더 잘 보이잖아.”

도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과하기도 이상했고, 무어라 말을 얹기에도 애매했다. 다행히 루카는 도현이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더 잘 보일 때까지 계속 찍고 싶었는데, 아무리 찍어도 안 되더라. 인정하긴 싫은데 지금은 무리인가 봐.”

도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가 의자에 기댄 고개를 돌려 도현을 쳐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세트장의 조명을 받고 형형하게 빛났다.

“근데 안심하거나 우쭐하진 마. 지금만 무리인 거거든.”

“…….”

“내가 못 할 리가 없잖아?”

도현이라면 심각하게 고민했을 문제를, 루카는 참 쉽게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런 간단하고 쉬운 결론에도 루카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지금까지 봐온 루카는 늘 그랬다.

도현이 루카에게서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많은 게 ‘아, 그래? 그럼 하자.’였다.

루카는 무언갈 결정하고 실행하는 데 거리낌이라는 게 없었다. 결론을 내리는 것도 빨랐다.

쉬운 게 하나도 없는 도현과는 아주 정반대였다.

처음, 루카를 보았을 때 가까워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불협화음처럼 맞지 않을 테니까.

그건 루카를 몇 번 겪어보며 확신했다. 실제로도 루카는 도현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 생각이 지켜지지 않은 게.

도현의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분명 그날이다.

첫 밴드 연주를 해본 날.

그날 도현은 루카와 어떠한 감정을 공유했다. 그건 분명한 교감이었다.

단 한 번,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 분명 도현의 빗장 하나가 풀려버렸다. 다시 빗장을 걸어놓아도, 이미 안으로 들어와 버린 존재를 그 밖으로 내쫓을 방법은 없었다.

루카는 정말 아는 건지, 아니면 무의식적인 영역에서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현의 빗장이 풀린 이후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자신이 여기까지 허락된다는 걸 안다는 듯이.

정신을 차려보니 첫 만남 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도현은 루카와 친해져 있었다. 아마, 촬영장에서 가장 대화를 많이 할 정도로.

도현은 루카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촬영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좀 걸으며 머리를 식힐 심산이었다.

그런 도현의 곁으로 브레디가 다가왔다.

“도, 도현 괜찮아?”

“응?”

“싸운 거 아니야? 루카랑….”

다른 사람도 도현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특히 브레디는 그들과 가까운 자리에서 연기를 보았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아니야. 루카 화 안 났어.”

“그래? 다행이다….”

브레디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걸 보며 도현이 작게 키득키득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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