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새로운 인연 (15)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사하라에 사는 하이에나가 몸을 낮추고 사냥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 같았다. 분명 여긴 학교고, 교실인데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목덜미가 물릴 것 같은 비합리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제이는 의식적으로 시선을 게임기에 고정했다. 저 맹수가 탐을 내는 게 게임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괜한 불안감에 몸을 옹송그려 상대의 시야에서 게임기를 차단했다.
따르르르-
벽 한쪽에 걸린 벨이 우렁차게 울렸다. 아이들이 제각각 자리에 가서 앉기 시작했다.
“얘들아, 수업 시간이야. 다들 조용히 하자.”
선생님이 들어와서 교탁 앞에 서자, 시선이 떨어졌다.
제이가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초식 동물의 심정을 몸소 느껴야 하는 걸까?
벌써 삼 일째였다.
삼 일.
캐시가 제이를 관찰하기 시작하고 제이가 캐시를 필사적으로 외면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조별 수업을 할 거니까, 자리 붙여서 앉자. 선생님이 네 명씩 한 조로 지정해줄 거야.”
앞에 앉은 아이들부터 짝지어준 선생님이 제이의 자리까지 왔다. 제이가 앉은 분단과 그 옆의 분단만 한 줄이 더 길었기 때문에 제이는 자연스럽게 옆 분단 아이와 짝이 되었다.
그리고 옆 분단에 있는 아이는-
“내가 조장 할게. 이의 있는 사람 있어?”
다름 아닌 마테오였다.
아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마테오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올리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제이가 그의 시선을 피해 몸을 물렸다.
‘눈에 안 띄어야지!’
마테오는 이 반의 폭군이었다.
특히, 마테오에게 자주 시비를 당하는 아이 중의 한 명이 제이였는데, 제이는 그게 자신이 너무 뛰어나고 똑똑한 탓에 그가 질투를 느끼는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번 수업 활동에서는 내 똑똑함과 잘남을 숨겨야 할 거 같았다. 그게 숨긴다고 숨겨질지는 모르겠지만.
하, 지능이 너무 높아도 문제라니까.
헛생각에 빠진 제이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눈을 찌르진 않을까 의심되는 앞머리와 두 눈을 모두 가리는 안경 때문에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소년이 음침하게 실실 웃기 시작하자, 제이의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좀 멀리 뺐다.
“지금 조원들이랑 다음 주에 발표를 할 건데 주제가….”
선생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스테이지 4까지 깼는데 오늘은 다음 스테이지를 깰 수 있으려나? 보스전에 대비해서 쿨타임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놓아야….
한창 생각에 빠져 있다가 중요한 설명이 나올 때만 공상에서 빠져나와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이 자료 가져올 테니까, 역할 분담 먼저 하고 있어. 다 정해진 조는 손 들고 선생님한테 알려주고.”
“네!”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물론 거기에 제이는 껴 있지 않았다.
드륵.
탁!
선생님이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반이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흠.”
헛기침을 해서 시선을 모은 마테오가 말했다.
“일단 자료 조사랑 피피티, 발표할 사람을 정해야 하는데. 발표는 내가 조장이니까 내가 할게. 괜찮지?”
“그럼 내가 피피티 해도 돼?”
제이의 옆자리였다.
“그래. 네가 피피티 해. 그럼 나머지 두 명이 자료 조사를….”
“어, 나도 피피티 하고 싶은데.”
마테오의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볼멘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내가 먼저 말했잖아!”
“그런 게 어딨어. 선착순이라고 한 적 없는데?”
“잠깐, 잠깐!”
마테오가 양팔을 뻗어 아이들을 중재했다. 마테오가 고개를 돌렸다. 제이와 마테오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뭐지, 이 불안한 느낌은.
마치 스테이지 클리어 직전, 간당간당하던 체력이 0.08의 확률로 크리티컬이 터진 폭격에 단숨에 깎여 나가던 그 순간 같았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둘 다 피피티를 하고 자료 조사는 쟤가 하는 거야.”
“오! 그러면 되겠다!”
마테오의 친구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제이의 옆자리는 은근히 제이의 눈치를 보면서도, 싫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스윽-
제이의 손이 아이들 사이에 불쑥 올라왔다.
“저, 마테오. 혹시 네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일까 봐 말하자면, 자료 조사는 한 명이 하기엔 너무 할 게 많아. 두 명이 맡아서 분담해야 적당….”
“조장인 내가 그렇게 정했는데 조원이 반대하겠다고?”
제이가 손가락을 세우더니 설명조로 따박따박 말했다.
“조장은 조를 대표하고 책임을 지는 자리지, 조원의 의견을 묵살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당히 반감을 살 수 있는 행위,”
“어디 보자, 제이 로빈, 협력성 C-”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마테오에 제이가 화들짝 놀랐다.
“자, 잠깐, 잠깐 잠깐! 뭐 하는 거야?”
“다들 찬성했는데, 너만 반대해서 진도가 안 나가잖아. 그러니까 협력성이 부족한 거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며 비뚜름하게 웃는 마테오는 정말 비열해 보였다. 제이가 파들파들 떨다가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권력 남용이야! 넌 정당한 시민의 의견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어!”
“그럼 네가 조장 하지 그랬어.”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일 수가!
제이는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헤 벌린 채 마테오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원시인과 신인류가 대화를 하는 거 같았다. 물론 신인류는 제이 로빈이었다.
제이가 자신을 털이 숭숭 난 원시인 정도로 보고 있는 줄 모르는 마테오가 득의양양하게 웃을 때였다.
어딘가를 본 제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제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제이의 평범한 기행이라고 생각한 마테오는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저, 저기.”
“더 말하면 정말 협력성 C-를,”
“아니! 그게 아니라… 하,”
콰앙!
“…이에나를 조심하라고.”
이미 늦었지만.
딸꾹!
제이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딸꾹질 소리에 입을 틀어막았다. 책상을 걷어차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며 놀란 마테오가 제 바로 앞에 와 있는 캐시에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 뭐야?!”
“야. 또 맞을래?”
발로 마테오가 앉은 의자를 툭 건들며 말하는 캐시에 질겁한 마테오가 소리쳤다.
“갑자기 왜! 아, 아무것도 안 했잖아!”
제이는 그 모습이 마치 맹수 앞에서 잔뜩 겁먹은 우리 인류의 과거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야생에서 맹수를 마주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거나. 자연의 약육강식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이 상황을 그저 관찰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게 슬픈 일이었다.
캐시 와일드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이 일에 자신이 엮여 있다는 게 제이는 무척이나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의 초식 동물 레이더가 아까부터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초식 동물이 사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방법은 하나. 위험이 닥치기 전에 도망치는 것.
제이가 발을 빼고 도망가려던 순간이었다.
“내 밴드부원한테 일 떠넘겼잖아.”
캐시가 자연스럽게 멀어지려는 제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곤 씩 웃었다. 도망에 실패하고 포획된 제이의 입매가 바들, 떨렸다.
“얘. 내 밴드부원이거든.”
언제부터?
분명 나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면서 사회성 있게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 사실 무근의 날조와 선동이라 말하려 입을 열었으나-
“…딸꾹!”
나오는 건 말이 아닌 딸꾹질이었다.
* * *
“컷! 오케이!”
화면을 확인해보던 스티브 로이가 말했다.
“이번엔 클로즈업 샷으로 갑니다! 이쪽 방향에서 찍을 거니까 유의하고요. 아, 거기 그쪽에 있는 배우들도 자리 비우지 말고 아까 하던 그대로 연기할 겁니다.”
스티브의 이런저런 지시 사항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배우들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을 점검한 후 다시 한번 카메라가 돌아갔다.
클로즈업 샷이 돌아가자 누군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떻게 저런 안경을 썼는데 표정이 보이지?”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공감했다.
연기할 때 가장 큰 느낌을 전달하는 건 눈이었다. 그 눈이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임에도, 도현이 연기하는 장면은 의도가 확실하게 전해졌다.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할 때는 얼굴 근육이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지금 제이가 홀로 완전히 딴 세상에 가 있다는 게 바로 느껴졌고, 제이가 마테오와 말씨름을 할 때는 마테오를 유인원 보듯이 하는 제이의 엉뚱한 사고방식과 그에게 느끼는 떨떠름함 그리고 경악이 고스란히 보였다.
촬영 감독이 카메라를 보며 생각했다.
‘존재감이 너무 강해.’
다른 아이들도 연기를 잘하고 있는데, 제이가 나오는 장면이면 유독 제이의 존재감이 툭 튀었다. 제이라는 캐릭터가 홀로 생명을 얻어서 숨 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실 제이 로빈은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어떻게 보면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현이 연기하는 제이 로빈은 특별해 보였다.
영화 제목처럼, 제이 로빈은 여기서 가장 ‘괴짜’ 같았다.
‘저 안경이 벗겨지면 어떨지 궁금해지는데.’
지금도 이 정도인데, 지금 연기에 제약을 걸고 있는 저 거슬리는 게 사라진다면 어떨지 상상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건 비단 촬영 감독뿐만이 아니었다.
‘캐릭터를 조금 수정하고 있다고 했지.’
배우가 배역에 맞춰 연기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배역을 배우에게 맞추는 것도 드물지만 존재했다.
배우가 배역을 감독이나 작가보다 더 완벽하게 해석해 왔을 때. 혹은 배우의 존재감이 배역을 뛰어넘을 때.
생각보다 대본은 촬영 현장에서 유동적으로 바뀌었다. 스티브 로이 감독은 도현의 제이를 바탕으로 제이 캐릭터의 설정을 조금씩 수정하고 있었다.
“오케이! 다음 장면 이어서 갑니다!”
“네!”
뭐, 때가 되면 알 수 있겠지.
그는 다시 촬영에 집중했다.
.
.
.
“씬 넘버 32. 캐시와 제이의 대면 장면 촬영가겠습니다!”
“캐시와 제이를 제외한 배우분들은 모두 이쪽으로 와주세요! 아, 거기 네 친구. 맞아요. 친구들은 복도에서 지나가는 역할 맡을 거니까 대기하고.”
스태프의 말에 교실에 꽉 차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도현은 스태프가 안내해주는 대로 교실을 나와 복도 한쪽에 섰다.
루카와 마주 보는 위치였다.
“꼭 체험학습 온 거 같지 않아?”
도현은 루카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장면을 바꿀 때나 이동할 때마다 아역 배우들이 우르르 움직이는데, 그게 꼭 촬영장이 아니라 어디 학교에서 체험학습이라도 놀러 온 거 같았다.
“첫날에 오스카랑 나도 그렇게 말했어.”
“오, 진짜? 우리 통했네.”
두 사람은 별거 아닌 일로 키득키득 웃었다.
“이따 나랑 같이 빵 먹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이커리 전문점에서 애들 나눠 주려고 사 왔거든.”
“뭐 있는데?”
“초콜릿 크로와상이랑….”
첫 번째 메뉴부터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도현이 눈이 반짝이자 루카가 웃었다.
“너 초콜릿 좋아하는구나?”
“그게 티가 났어?”
“바로 눈이 반짝이는데? 이렇게.”
루카가 도현의 눈빛을 따라 했다. 그 과장된 눈빛에 도현이 머쓱하게 뺨을 문질렀다.
“나랑 같네. 나도 사실 초콜릿 좋아하거든. 아빠는 많이 못 먹게 하지만.”
둘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데, 촬영을 시작하겠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떠들며 웃던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 * *
“왜 불렀어?”
“나랑 얘기 좀 해.”
제이가 굳은 눈빛으로 루카를 쳐다보았다. 캐시가 말해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후웁.
숨을 한번 크게 들이킨 제이가 푸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내뱉더니 말했다.
“방금 날 도와준 건 고마워. 민주주의 사회 시민으로서 존중을 받지 못하고 권력의 희생양이 될 뻔한 순간이었거든. 네 덕분에 공평하고 합리적인 역할 분담을 할 수 있었어. 하지만.”
꿀꺽.
마른침을 한번 삼킨 제이가 비장하게 말했다.
“고마움과 별개로 내 생각은 여전해. 네 밴드에 들어갈 생각 없어.”
“왜?”
“말했듯이, 난 배틀로얄,”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4’를 해야 한다고?”
선수를 친 캐시에 제이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그거 해봤는데, 별로 재미없던데?”
“뭐? 너,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 시리즈가 얼마나 역작인데! 비행기가 비행하는 각도와 미사일 발사 거리까지 모두 현실적으로 구현한….”
“아, 그래, 됐고. 너 그 게임만 좋아해?”
그럴 리가!
게임의 세계는 정말 광활하면서 심오했다. 열정적으로 탐구하고 있지만, 그 넓고 깊은 세계의 끝을 언제 볼 수 있을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소년은 모든 게임을 하나의 게임으로서 존중했지만, 그가 감정의 동물인 인간인 이상 특별히 선호하는 게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는 자신의 게임 컬렉션을 눈앞의 소녀에게 공유할 생각에 어깨가 들썩이고 볼이 붉어졌다.
“아니, ‘위더 팡팡’이랑 ‘네오 스페이스’랑, ‘월드네이션 제트’랑!”
그의 말이 길어질 걸 예감한 캐시가 망설임 없이 제이의 말을 끊었다.
“리듬 게임은?”
“물론 리듬 게임도 좋아해! 정확한 박자에 맞추기 위해서는 단순히 감을 넘어서 타이밍을 계산하기 위한 고도의 수학식이 필요,”
“그럼 나랑 같이 리듬 게임 안 할래?”
“저기, 있잖아. 올바른 사회화를 위해서 대화 상대가 말할 때 중간에 끊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게임 이름이 뭔데?”
“드럼 비트 시즌1”
제이가 입을 살짝 벌렸다.
지금껏 수많은 게임이 자신의 손을 거쳤지만, 그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게임이었다.
“처음 들어봐. 어디 회사 건데?”
제이의 물음에 캐시가 물 흐르듯이 유려하게 답했다.
“새로 나온 거야. 신생 회사고. 나한테 있는데, 어때?”
잠시 고민하던 제이가 결국 욕망에 굴복했다.
“조, 좋아.”
그게 한참이나 잘못된 선택인 줄도 모르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