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97)화 (198/582)

제197화. 새로운 인연 (16)

옴뇸뇸.

왐냠.

촬영장이 잠시 달콤한 냄새로 가득 찼다. 캐시가 가져온 디저트 덕분이었다.

조금 전.

스티브 감독이 휴식을 선언하자, 갑자기 어디선가 테이블을 든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하얀 보를 씌우고, 그 위에 접시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이단, 삼단 플레이트 접시에 담긴 화려한 디저트에 아이들의 눈이 돌아갔다.

도현에게 친구들이랑 나눠 먹으려고 사 왔다고 말한 빵은, 촬영장 인원 모두가 같이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알고 보니 이미 감독님에게 허락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아이들은 신이 나서 디저트 타임을 즐겼다. 즉석으로 만들어낸 디저트 테이블에는 놀랍게도 초콜릿 분수도 있어서 도현은 한참이나 그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다른 데로 가려고 해도 초콜릿 분수와 자신 사이의 만유인력이 기이하리만치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분명 만유인력은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는데 왜….

제이를 연기하다 보니, 사고방식도 조금 제이를 닮아버린 도현이었다.

멍하니 초콜릿 분수를 보던 도현이 와작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에 무언가를 가득 문 채, 분수에 쿠키를 가져다 대고 있는 루카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이거도 묻혀 먹자.”

“크으, 네가 뭘 아는구나. 역시 초코 케이크에는 초코 코팅이지!”

두 사람은 접시에 한가득 디저트를 들고 와 신나게 초콜릿 분수에 묻혀서 먹기 시작했다. 너 하나, 나 하나. 끝내주는 조합을 발견하면 얼굴을 붉히며 먹어보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루카와 도현은 서로의 입맛이 아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헤레이즈가 두 사람의 접시 상태를 보고 기겁했다. 보기만 해도 입에서 단내가 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윽, 그렇게 먹으면 너무 달지 않아?”

“전혀.”

“아니.”

대답도 동시에 나왔다.

헤레이즈는 이해할 수 없는 눈초리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디저트 대신 허브차가 들려 있는 상태였다.

헤레이즈도 디저트를 먹긴 했지만, 그것도 가장 덜 달아 보이는 블랙 올리브 치즈 베이글 하나에 진저 쿠키 몇 조각이 전부였다. 질린 표정을 짓는 헤레이즈에 도현과 루카가 되레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서로를 몰이해의 눈초리로 보기를 잠깐.

“보는 내가 다 물려. 으, 주스까지 단 걸 먹으면 어떻게 해.”

루카의 손에 들린 생과일주스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헤레이즈가 도현의 컵에 들린 내용물을 흘깃 보더니, 와락 얼굴을 구겼다.

“…초콜릿 디저트에 초콜릿을 찍어 먹으면서 초콜릿 우유를 마시는 건 좀 아니지 않아?!”

“…….”

그에 대해서는 도현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집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헤레이즈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봐.”

잠시 후, 헤레이즈가 그들의 손에 쥐여준 건 다름 아닌 홍차였다. 그는 루카와 도현에게 홍차를 주며 잔소리를 했다.

“너무 단것만 먹으면 혀가 아리지도 않아? 적어도 맛의 균형은 지켜야지.”

“우, 잔소리.”

장난스레 툴툴대는 루카에 헤레이즈가 얼척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홍차를 한 번, 헤레이즈를 한 번 보다가 생각했다.

좀 더 까칠한 성정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친절하고 착한 거 같았다.

단순히 그들이 먹는 모습을 보다가 헛구역질이 나올 거 같았기에 홍차를 가져다줬던 헤레이즈가 들었더라면 혀를 찼을 생각이었다.

* * *

[니콜라스 가비 : 진짜 끔찍해!]

[니콜라스 가비 :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c]

지잉, 지잉, 징-

도현은 쉴 새 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방학하고 꽤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진은 말한 대로 네덜란드에 여행을 갔고, 니콜라스는 수영 캠프에 다니기 시작했다.

작년에 갔던 여름 수영 캠프에 대단히 불만을 품었던 니콜라스는 본인의 바람대로 수영 클럽에서 운영하는, 좀 더 본격적인 수영 캠프에 참여하게 되었고-

[니콜라스 가비 : 왜 또 여기서 만나냐고!]

니콜라스는 작년 여름 캠프 때 수영 시합을 했던, 제이스 테일러와 그곳에서 다시 한번 만났다.

[니콜라스 가비 : 진짜 어이없는 게 뭔지 알아?]

[니콜라스 가비 : 자기가 그동안 열심히 연습했다고]

[니콜라스 가비 : 이번에는 안 질 거라는 거야!]

[니콜라스 가비 : 작년에 한 번도]

[니콜라스 가비 : 나한테 이긴 적 없으면서!]

니콜라스의 불만이 쏟아졌다. 요지는, 이번에도 자신이 이길 거라는 내용이었다.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열심히 연습해 왔다면 조금 긴장해야 하지 않을까?]

지이잉-

곧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해본 도현은 그게 메시지가 아닌 전화라는 걸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야!!

“안녕, 니키.”

- 안녕은 무슨. 너 그거 무슨 말이야!

“뭐가?”

- 긴장해야 한다며! 내가 질 거라는 거야?

음, 불난 집에 기름 붓기가 되어버렸네. 도현이 재빨리 수습했다.

“아니. 그럴 리가. 나는 너보다 수영 잘하는 애는 못 봤는걸.”

- …내, 내가 좀 잘하긴 하지?

니콜라스는 단순했다. 하지만 도현은 니콜라스의 이런 부분이 참 좋았다.

무슨 말을 하든 곡해하거나 오해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뻐할 줄 알았다. 도현이 니콜라스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 내가 이번에도 다 이기… 아! 기다려! 간다고! 도리토스! 이따가 이기고 문자 할 테니까 기다려!

“알았어.”

툭.

갑작스레 걸렸던 전화는 갑작스레 끊겼다. 아마, 멀리서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은 방금 니콜라스가 내내 불만을 털어놓았던 제이스라는 애인 거 같았다.

‘니키는 즐겁게 지내고 있나 보네.’

도현이 핸드폰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가볍게 대본을 보려던 때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스윽.

부드럽게 방문이 열리고, 서혜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도현아, 바쁘니?”

“아니요. 안 바빠요.”

도현이 고개를 젓자, 서혜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엄마가 여기저기 좀 찾아봤거든. 같이 고를래?”

“놀러 갈 곳이요?”

“응.”

도현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려가서 고를 거죠? 같이 해요.”

“그래! 이번에 보니까, 8월에 가기 적당한 곳이….”

서혜나와 도현이 일 층으로 내려가며 대화를 나눴다. 방학하고 몇 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빠가 미국으로 오기로 한 날이 가까워졌다.

“네. 거기도 좋겠네요. 가깝기도 하고요.”

애써 붙잡아 두었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현은 도리어 환하게 웃었다.

* * *

“안녕하세요.”

“안녕!”

“오늘도 일찍 왔네.”

도현은 촬영장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후, 익숙하게 분장을 마쳤다. 안경은 도현이 불편해하는 관계로 촬영 시작 전에 착용하기로 했다.

도현은 자신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델마 아카데미는 교복을 입지 않아서 처음에는 좀 어색하고 신기했는데 이제는 이 교복이 몸에 익을 지경이었다.

“후우, 괜찮아. 진정해, 진정.”

한쪽에서 주디스가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분하고 야무지던 평소와 다른 모습에 도현이 주디스의 팔을 약하게 건드렸다.

“어? 왔네? 안녕.”

“응, 너도 일찍 왔네.”

“으응, 왠지 눈이 일찍 떠져서 말이야.”

아.

도현은 주디스가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오늘 아니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지?”

“하아… 맞아. 어제부터 긴장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 있지.”

“지금까지 연기 잘했잖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그거랑은 다르지! 그건 거의 엑스트라랑 비슷한 분량이었잖아. 솔직히, 뒤에서 너무 이상한 행동만 안 해도 거의 통과시켜 줬다고.”

“그런가?”

“그래!”

주디스는 다시금 긴장이 올라오는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해하는 주디스에 도현이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도와줄 수 있을까?

이리저리 고민하던 때, 멀리서 밝은 인사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커다란 목소리로 인사하며 이쪽으로 오는 인물은, 루카 하퍼였다.

루카는 도현과 주디스가 마주 보고 서 있는 걸 보더니 총총 뛰며 다가왔다.

“안녕!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으음?”

루카가 주디스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현을 보았다.

“둘이 무슨 일 있어? 분위기가 왜 이렇게 심각해?”

루카의 물음에 도현이 주디스를 쳐다보았다. 루카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주디스를 향했다. 두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자, 주디스가 잠시 의미 모를 감탄사를 터트렸다.

“……?”

아까까지 분명 심각했던 주디스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자 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주디스?”

“아.”

도현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듯 주디스가 멋쩍게 웃었다.

“아니, 두 사람 다 얼굴이 너무 화려해서….”

“갑자기?”

루카가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디스도 부끄러운지 볼을 긁적였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오늘 내 분량이 많잖아. 그게 걱정돼서.”

“그게 왜?”

루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량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

“어, 좋은 건 맞는데….”

“그럼 됐네! 좋은 건 좋은 거지, 좋은 걸 굳이 걱정해서 안 좋은 걸로 만드는 건 이상하잖아?”

참으로 단순 명쾌한 결론이었다.

주디스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을 풀고는 루카를 따라 웃었다.

“그래. 좋은 거지!”

그렇게 말한 주디스는 걱정을 미뤄두기로 결심했는지 이내 평소처럼 루카와 수다를 떨며 놀기 시작했다.

도현은 그런 루카를 눈에 담았다.

‘뭐든 저렇게 쉽게 결론 내리는 걸까?’

신기하기도 했고….

“아, 안녕!”

“아. 브레디. 안녕.”

도현이 옆에서 들린 인사에 생각을 끊었다.

* * *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배우들이 모두 모였다. 처음 도현이 왔을 때만 해도 부산스럽긴 해도 나름 조용하던 촬영장이 시끌벅적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 오늘은 씬 넘버 39부터 갑니다.”

“네!”

루카와 도현, 브레디가 세트장으로 쪼르르 걸어갔다.

록 밴드 동아리실은 창고를 치워 만든 곳으로, 잡동사니가 구석에 치워져 있고 가운데에 밴드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 벽면에 달린 창문에서 빛이 들어와서 가운데에 배치된 악기들을 둥글게 비추었다.

동아리실은 전체적으로 베이지와 갈색 톤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빛 덕분에 먼지가 떠다니는 창고가 나름대로 운치 있어 보였다. 도현은 조명의 힘을 깨달았다.

“오늘 첫 촬영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가볍게 갑시다!”

스티브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가장 처음 찍는 장면은 재촬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아침이라서 몸이 덜 풀린 상태기도 했고, 매일같이 하는 촬영이라고 하더라도 몇 차례 촬영을 마친 후인 오후와 오전의 긴장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명 좀 더 오른쪽으로! 좋아.”

감독의 지시 아래 촬영 준비가 끝나고.

“레디, 액션!”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제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먼지가 내려앉은 잡동사니들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드럼의 심벌이 반짝, 빛이 났다.

“게임기는 어디 있어?”

“저기 있잖아.”

“어디?”

“저어-기.”

제이의 고개가 한쪽을 향했다.

“저기엔 드럼밖에 안 보….”

멈칫.

무언가 말하던 제이가 그대로 굳었다. 제이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드럼?”

설마.

설마, 설마!

“드럼 비트… 시즌, 1?”

띄엄, 띄엄 말하는 제이에 캐시가 환하게 웃었다.

“환영해. 밴드부원이 된 걸!”

제이의 표정이 무너졌다. 진실을 마주한 얼굴에 배신감과 충격이 얼룩졌다.

이토록 커다란 충격을 받은 건, 산타클로스가 외계인이 아니란 걸 깨달은 다섯 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 날 속였어?!”

“에이. 속인 게 아니지. 이건 목적을 위한 적당한 사실 조작이라고 하자.”

“그게 속인 거잖아! 너… 설마 나한테 방명록이라고 했던 것도?”

뒤늦게 캐시의 함정을 깨달은 제이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안경을 쓰고 있는데도,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 보일 정도였다.

캐시가 머리카락을 꼬며 딴청을 부렸다.

조금 전.

캐시는 자신과 같이 게임을 하려면 방명록을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대체 게임을 하는데 왜 방명록이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욕망에 굴복해버린 제이는 한 치의 의심 없이 희희낙락하게 이름을 적었다.

“흐음, 이거 말하는 거려나?”

캐시가 슬쩍, 종이 하나를 꺼냈다.

아까는 반절이 접혀 보이지 않았던 ‘동아리 신청서’가 선명하고 굵은 볼드체로 쓰여 있었다.

제이의 입이 턱, 벌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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