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새로운 인연 (17)
성큼.
주춤.
성큼.
주춤, 주춤.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뒷걸음질 치는 도현에 루카는 양몰이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재밌는데?
루카의 얼굴에 진심으로 즐거운 미소가 올라왔다. 히이익, 도현이 기겁하며 파드득 물러났다.
“나, 난 이곳을 나가야겠어!”
투다닥!
도현이 허둥지둥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퉁!
무언가에 튕겨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드니, 동그란 무언가가 보였다. 도현은 자신이 부딪힌 게 누군가의 배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너….”
도현이 말을 잇지 못하자, 양심에 찔려 차마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던 브레디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미, 미안!”
처음부터 계획된 거구나.
완전히 함정에 빠진 거였어!
투욱.
도현의 어깨 위에 루카의 손이 내려앉았다. 도현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자, 루카가 부드럽게 웃었다.
“포기해.”
“…이건, 이건 감금이야! 범죄라고! 미국 사회에서 이런 행위는 범법…!”
“그건 네가 우리 부원이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 우린 평범하고 건전하게 동아리 활동을 하는 중일 뿐인걸? 오히려 지금 나가면, 넌 동아리 활동에 무단으로 빠진 게 되는 거야.”
쿠궁!
도현의 머리 위로 커다란 돌이 떨어지는 환상이 보였다. 완전히 충격을 받아 굳어버린 도현에 루카가 협박에서 회유로 방식을 바꾼 듯 가식적일 정도로 친절하게 말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동아리 활동일 뿐이잖아. 원한다면 여기서 게임을 해도 좋아. 인원수만 채워줘도 되거든.”
계속되는 설득에 도현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정말이야?”
“그럼.”
안경 아래로 언뜻 비치는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루카는 승리를 직감했다.
* * *
브레디는 눈을 도로록, 굴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대단해.’
자신이 서 있는 공간과 도현과 루카가 있는 공간이 유리된 거 같았다. 두 사람이 연기할 때마다 종종 느꼈던 감각이었다.
분명 한 화면에 잡히고 있는데 스포트라이트가 모조리 두 사람에게 쏠린 느낌.
두 사람의 연기는 날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졌다. 이젠 이렇게 가까이 서 있는데도 도현과 루카가 아닌 제이와 캐시 같았다.
촬영장의 분위기도 그랬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루카는 주인공이니까 당연하다고 쳐도, 도현까지도 그 중심에 있었다.
이유를 모를 수는 없었다.
저렇게 빛이 나니까.
멋있는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잘생긴 역할을 맡은 것도 아닌데, 도현이 연기하는 제이는 어딘가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제이가 내비치는 엉뚱함과 순진함이 바보 같다기보다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랑은 달라.’
이래서 루카도 도현을 좋아하는 걸까?
브레디의 눈에 잠시 부러움의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질투하기도 어려울 만큼, 도현은 자신과 그저 다른 존재 같았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뭔데?”
“아무리 그래도 엄연한 동아리인데, 네가 제대로 활동하지 않으면 좀 곤란하잖아. 아냐, 속인 거 아니니까 끝까지 들어. 아니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말해봐.”
“그러니까, 열심히 활동할 부원이 필요하다는 거지. 새로운 부원을 찾게 너도 협조해.”
“! 그럼 새로운 부원을 찾으면 난 자유,”
“아니, 그건 아니고.”
루카의 말에 도현의 어깨가 축 처졌다. 기대감이 어렸던 눈동자에 빛이 다시 꺼졌다.
루카가 도현의 대사를 기다렸다.
캐시의 함정에 완전히 빠져버린 제이는 캐시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그게 현재 장면의 마지막 대사였다.
“…알았어. 협조할게.”
루카가 기다리던 대사가 나왔다.
이제 곧 컷 소리가 들릴….
척!
힘이 빠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도현이 별안간 턱을 치켜올렸다. 꾹 다문 입매가 비장해 보였다.
“하, 하지만 나는 지금 힘에 굴복한 게 아니라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판단한 끝에 이성적인 결정을 내린 거란 걸 알아둬!”
루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대본에 없는 대사였다.
그리고.
대본보다 더 제이 로빈 같은 대사였다.
* * *
“컷!”
컷을 외친 스티브 로이 감독이 잠시 도현을 쳐다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껏 도현은 대본에 충실했다. 다른 아이들이 가끔씩 애드리브를 던질 때도, 도현은 그저 대본을 그대로 따라갔다. 스티브는 그가 꽤 고지식하고 성실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현의 애드리브가 의외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거기까진 의외긴 해도 놀랄 이유는 아니었다. 스티브 로이 감독은 애드리브에 관대한 감독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스티브가 놀란 이유는.
‘정확하게 해석했어.’
스티브 로이가 생각했던 제이 로빈이라는 인물.
조별 활동 때 제이가 마테오에게 맞선 건 단순히 제이가 눈치가 없거나 사회화가 조금 이상하게 된 어린 괴짜라서가 아니었다.
스티브가 생각한 제이 로빈은 반골 기질이 있었다.
제이 로빈은 그동안 ‘민주주의 사회에 어긋나서’, ‘올바르게 사회화된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서’, ‘범법 행위라서’ 등을 이유로 들며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이 로빈이 순진하게도 사회에서 말한 올바른 기준대로 융통성 없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제이의 딱딱한 행동과 기계와 수학을 좋아하는 성향까지도 그러한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다.
사실 그게 아니었다.
캐시의 압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것도, 마테오의 부당한 권력 남용에 순종하지 않은 것도, 그가 입력한 대로 사고하는 딱딱한 기계 같은 인물이라서가 아니었다.
그 모든 대사와 행위는 부당한 행위에 반발하는 감정적인 충동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제이 로빈은 실은 막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캐시 와일드만큼이나 감정적이고 무모하며 충동적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만약 캐시가 계속해서 제이를 협박하고 내리눌렀다면, 제이는 계속해서 반항했을 것이다. 캐시가 협박에서 회유와 설득으로 방법을 바꾼 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걸 도현이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하하. 이걸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스티브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가 생각했던 캐릭터를 정확하게 알아봐 줬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스티브가 모니터링을 하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도현을 불렀다. 도현이 가까이 오자, 그가 재밌다는 표정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안 거야?”
“네?”
“제이가 반골 기질이 있다는 거 말이야.”
도현이 눈을 깜빡이다가 말했다.
“대본에 나와 있었으니까요.”
그러다 설명이 좀 부족한 걸 알았는지, 덧붙였다.
“제이가 원리 원칙을 중요시하는 것처럼 말하긴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학교에 게임기를 가져올 리가 없잖아요.”
“어? 진짜 그렇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루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보니 모순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 대사를 한 거구나…!”
제이 로빈이 캐시와 마테오에게 원리 원칙을 들먹이며 반항한 건, 정말 그걸 중요시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적 행동을 합리화할 가장 적당한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루카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도현의 연기가 유독 생동감이 느껴지는 이유. 제이라는 캐릭터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
그건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의 차이였다.
도현은 제이 로빈의 대사 하나, 행동 하나의 이유까지 완벽하게 해석한 것이다.
괜히 진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가,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경쟁심에 불타올랐다.
다시 찐한 눈으로 쳐다보는 루카에 도현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 * *
루카가 응원의 눈빛을 보내는 것에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시 촬영 시작합니다.”
주디스가 후우, 숨을 내쉰 후 그랜드 피아노 위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레디, 액션!”
~♬ ????
오케스트라 음악이 잔잔하게 울렸다. 얌전히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범생이 같은 안경을 쓴 아니사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건반을 눌렀다.
“자, 좋아요. 바이올린 소리 좀 더 크게. 박자 놓치지 말고. 음, 잠깐, 잠깐.”
음악 소리가 뚝 멈췄다.
오케스트라 담당 선생님이 인상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아니사?”
“네, 선생님.”
“피아노 소리가 너무 튀는구나. 저번에도 말했잖니.”
“…네.”
“이건 그렇게 밝고 통통 튀는 음악이 아니야. 좀 더 고풍스럽고 우아한 느낌으로. 우리 학교에서 제일 뛰어난 동아리인 오케스트라부의 품격에 걸맞게. 알겠니?”
“주의할게요.”
“제 연주는 이번에 어땠나요? 조금 실수한 거 같은데.”
“마테오! 실수했다니. 선생님이 듣기엔 완벽했는걸? 역시 우리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야.”
의도했던 대로 칭찬이 돌아오자 마테오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마테오를 본 아니사가 꼴 보기 싫은 걸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자, 다시 가볼까? 원, 투.”
아니사가 한숨을 뱉고선 다시 손목을 들어 올렸다.
우아하게, 고풍스럽게.
튀지 않게.
피아노를 치는 얼굴에 잠깐 지겨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호오.”
그걸 지켜보는 한 마리의 하이에나가 있었으니.
오케스트라 동아리 내부를 비추던 카메라가 점점 뒤로 멀어지며, 복도 창문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세 아이를 비추었다.
“이, 이러다 걸리면 어떡해?”
“안 걸려, 안 걸려.”
엘비가 불안하게 움찔거리며 묻자, 캐시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렇다.
그들은 지금, 염탐 중이었다.
이 상황이 된 건 전날로 돌아가야 했다.
동아리실에 동그랗게 모여 앉은 세 아이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새로운 록 밴드부원을 들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동아리에 안 든 애가 지금 옆 반의 마이클이랑….”
캐시가 무언갈 끄적끄적 적으며 스토킹 계획을 세울 때였다.
그때.
“꼭 동아리에 안 든 애여야 해?”
엘비가 슬쩍 손을 들더니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아, 아니, 나처럼 동아리 그만두고 나올 수도 있으니까….”
시선이 모이자 금방 얼굴이 빨개진 엘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있던 캐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 하이에나!”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웃는 캐시에 제이가 깜짝 놀라며 그 주변에서 멀어졌다.
“다른 동아리에서 빼 오면 되는 걸!”
그리하여 지금이었다.
엘비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꼬, 꼭 이 동아리여야만 해?”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캐시가 심드렁히 말했다.
“우리 말고 음악 동아리는 여기가 유일하잖아.”
“성가대 동아리도 있는데….”
“거, 거긴 안 돼.”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한 캐시였다. 제이가 놀란 눈초리로 쳐다보자 캐시가 버럭 성을 냈다.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사실, 캐시는 이미 성가대 동아리에 당당히 침입한 전적이 있었다.
한창 찬송가를 부르는 동아리실을 벌컥 열어젖히고, 당당하게 동아리실 벽에 부원 모집 포스터를 붙였다.
[록 밴드부원 절찬 모집 중. 선착순 두 명!]
그리고 뒤돌아서 기회를 줄 테니 지원하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 어머, 록 밴드 동아리가 네 동아리였니?
그게 시작이었다.
- 온 김에 과자 좀 먹고 가!
- 아름다운 푸른 눈이구나! 아아, 네 눈 속에는 분명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
- 우리 같이 성경 287페이지에 있는 구절을 읽어볼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캐시가 질끈 눈을 감았다.
…성가대는 강적이었다.
캐시는 과자를 배불리 먹고 자신을 둘러싼 채로 손을 잡은 성가대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서 하얗게 질린 채로 찬송가를 삼 절까지 들은 후 완전히 너덜너덜해져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휙! 휙!
캐시가 고개를 세게 저으며 기억을 털어냈다.
쓰라린 패배를 겪었지만, 두 번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캐시가 맹금처럼 눈을 번뜩 빛냈다.
캐시의 시선 끝에는, 반듯하게 앉아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니사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