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새로운 인연 (18)
“자, 좋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음 촬영 이어 갑니다!”
몇 번의 재촬영 끝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여러 번 칭찬을 들은 주디스의 안색은 아침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밝아져 있었다.
“왜 루카랑 도현이 촬영하는 걸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진짜 재밌어. 놀이기구 타는 느낌이야.”
도현은 놀이기구를 타본 적은 없으나, 주디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집중하고, 내가 내가 아니게 된 것 같은 감각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었다.
자신감이 붙은 모습이 보기 좋아 도현이 웃을 때였다. 좀 전의 촬영을 주제로 떠들던 주디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나도 그런 거 해보고 싶다.”
“어떤 거?”
루카의 질문에 주디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 그걸 뭐라고 하더라? 뭐라고 하는지 까먹었어. 아까 도현이 했던 거 있잖아.”
“내가 했던 거?”
내가 뭘 했지?
도현이 의아해하는데, 루카가 손뼉을 쳤다.
“알겠다. 애드리브 말하는 거지?”
“맞아! 그거!”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더니, 이내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다가 폈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데….”
“하면 되잖아?”
“용기가 안 나. 괜히 애드리브 했다가 더 별로면 어떡해.”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표정이었다.
도현이 말을 얹었다.
“그래도 감독님은 괜찮아하실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으, 아니야. 너희들은 이해 못 할 거야.”
주디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주디스를 보던 루카가 말했다.
“그럼 도와줄까?”
“응?”
“애드리브가 더 별로일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같이 고민해서 생각해내면 대본보다 더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잖아.”
“저, 정말 같이 생각해줄 수 있어?”
“응, 별거 아니잖아.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 그리고 나랑 도현은 그런 얘기 자주 하는걸.”
도현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루카와 도현은 종종 서로의 연기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럼 도와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나도 괜찮아.”
세 사람은 ‘주디스의 애드리브’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세 사람은 계속해서 툭툭 아이디어를 내뱉었다.
“음, 그것도 좋지만 뭔가 임팩트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때, 도현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 장면이라면….
잠시 생각하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때?”
* * *
털썩.
의자에 앉은 도현이 다리를 쭉 폈다. 고개를 돌리자, 한쪽에서 주디스와 루카가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
도현의 아이디어에 엄지를 치켜올린 주디스가 흥분한 채로 연습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애드리브가 들어가는 장면은 주디스와 루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루카는 주디스에게 도와주겠다고 말했고, 딱히 할 일이 없어진 도현은 쉬러 가겠다고 말한 후 의자에 앉은 참이었다.
달랑달랑.
도현이 다리를 작게 흔들었다. 의자에 앉으니 다리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병원에서 나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체력이 늘었는데, 촬영이 오후까지 길어지면 어김없이 다리가 아팠다.
‘운동을 좀 더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후 달리기를 안 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된 것이다.
산책이나 스트레칭은 자주 하지만, 그 정도로는 촬영 기간에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하기는 부족했다.
‘체력이랑 근력을 길러야겠어.’
일단, 바로 시작하면 오히려 힘들어서 촬영에 지장이 갈지 모르니까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가볍게 산책 횟수를 늘리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도현이 다시금 운동 욕구를 되살리고 있을 때, 누군가 도현의 옆에 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세트장의 조명이 비춰 거의 하얗게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으, 피곤해.”
헤레이즈가 의자에 목을 기대고 고개를 뒤로 넘겼다. 그 움직임에 따라 머리카락이 뒤로 쏟아져 내렸다.
‘헤레이즈구나.’
도현은 익숙하게 고개를 돌린 후 다시 다리를 달랑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헤레이즈는 쉴 때 종종 도현의 주변에 와서 앉았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도 가끔 고개를 둘러보면 가까운 위치에서 백금발이 왔다 갔다 할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헤레이즈는 도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처음 몇 번은 신경 썼지만 이젠 도현도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했다. 도현이 무거운 안경을 벗고 의자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눈을 감아서 사람들은 종종 자는 거라고 오해하지만, 실은 머릿속으로 연기할 장면을 시뮬레이션 돌리는 중이었다. 눈을 감은 도현을 흘긋 쳐다본 헤레이즈는 다시금 고개를 뒤로 떨궜다.
그 광경을 보던 스태프 한 명이 웃음을 참았다.
‘꼭 고양이 두 마리 같아.’
흰 고양이랑 검은 고양이.
사실 저 두 사람의 조합은 촬영장 내에서 꽤 소소한 화제였다.
두 사람이 워낙에 눈에 띄는 편이기도 했고, 딱 봐도 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틈날 때마다 가까이 붙어 있는 게 너무 웃기고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휴식 시간 끝났습니다. 다들 더 쉬고 싶겠지만, 힘내서 촬영 빨리 끝내고 쉽시다!”
휴식 종료를 알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그만 자.”
도현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암흑에 익숙해져 있어서, 세트장의 강한 불빛에 적응이 되지 않아 눈을 찡그렸다.
잠든 적은 없지만, 일단 깨워줘서 고맙다고 하려는데 헤레이즈는 이미 세트장으로 가 있었다. 도현은 눈을 깜빡이다가 마찬가지로 세트장으로 향했다.
“씬 넘버 52부터 갑니다.”
도현은 아까 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던 걸 다시 한번 천천히 복기했다.
도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스태프가 뒤로 빠졌다.
“레디, 액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들 수고했어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악기를 정리한 후, 동아리실을 나갔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 아니사는 조용히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괜히 아이들 틈에 껴서 가기 싫어서 다 나간 후 나가려고 미적거리던 때였다.
문 앞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아니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에는 마테오와 보라색 브릿지가 인상적인 소녀, 캐시 와일드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신경 꺼.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까.”
“하! 그럼 누구 보러 왔는데? 너 친한 애도 없잖아.”
“이건 하이에나와 원시인… 흥미롭….”
거기엔 컁컁대며 캐시에게 들이받는 마테오와 귀찮다는 얼굴을 한 캐시가 있었다. 옆에서 누군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 같긴 한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니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쟤는 왜 매번 겁먹으면서 저렇게 시비를 거는 거지?’
아니사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못 말하겠지? 내 말이 맞잖아. 너 염탐하러 온 거!”
“아니라니까. 정말 볼 사람이…, 아 저기 있다!”
아니사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학 온 날부터 괴상한 차림새로, 그다음에는 차림새보다 괴상한 성격으로 화제의 중심이 된 전학생과 친한 사이인 인물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없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자 의아한 얼굴을 한 아니사가 다시 정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뭐, 뭐야?”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사가 당황해 굳어 있는 사이, 캐시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안녕! 내 밴드 새 멤버!”
“……?”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아니사가 캐시의 손에 이끌려 마테오 앞에 섰다. 캐시가 친근하게 아니사의 팔에 팔짱을 꼈다.
“자, 인사해. 내 록 밴드에 들어온 신입 멤버야. ‘전’ 오케스트라 부원이고.”
마테오의 시선이 아니사에게 향했다. 아니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그러나 아이들의 의심 어린 눈초리는 여전했다. 웅성거리는 아이들에 아니사는 진심으로 억울해져서 외쳤다.
“나는 얘랑 대화도 지금 처음 해본단 말이야!”
“괜찮아. 대화야, 앞으로 많이 하면 되니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화법이었다!
아니사가 어이가 없어서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뻐끔거리는데, 어느새 다가온 제이가 아니사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이에나의 사냥감으로 찍히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하이에나는 자신보다 몸집이 몇 배는 큰 맹수도 약점을 공략해서 사냥할뿐더러, 한번 선점한 먹잇감은 놓치는 법이 없거든. 버팔로를 사냥할 때도 어미 버팔로가 새끼 버팔로를 놓고 도망가면 새끼 버팔로의 숨통을 끊어놓고 어미 버팔로를 따라가는 집요함까지….”
얜 또 뭐라는 거야!
아니사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초면이나 다름없는 전학생은 팔짱을 끼고선 내가 밴드부원이라고 우기지, 평소에 데면데면한 사이던 제이 로빈은 다큐멘터리라도 보고 왔는지 헛소리를 하지, 마테오는 천하의 역적을 보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지!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한 건지 신세 한탄을 하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사가 간신히 멘탈을 수습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체 새끼 버팔로가, 아니, 이게 아니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정말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현 상황에 관한 억울함과 불만의 토로에 가까웠다.
그러나 캐시가 보인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팔짱을 풀고 아니사를 마주 본 캐시가 말했다.
“오케스트라 동아리에서 피아노 치는 거 재밌어?”
아까와 다르게 꽤 진지한 어투였다. 미친 소리만 하다가 정상적으로 물으니 적응이 안 됐다.
아니사가 망설이자, 캐시가 다시 물었다.
“더 재밌는 거 하고 싶지 않아?”
캐시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쓱 쓸어 넘겼다. 보라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사는 훤히 드러난 캐시의 푸른 눈동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더 재밌게 해줄 수 있어. 할 수 있다면 마음껏 튀어도 좋아. 네가 연주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 물론,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나보단 못하겠지만 말이야.”
잘 말하다가 삐끗했다. 제이가 눈치를 주는 것에 캐시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밴드에 오면 네가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아니사! 설마 저런 헛소릴 들을 생각은 아니지? 매번 축제에서 일 등을 한 우리 동아리와 저런 이상한 동아리를 비교하는 것조차 수치….”
“엘비.”
“미, 미안!”
엘비가 마테오의 입을 막았다. 마테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팔다리를 움직이며 발악했지만, 체급 차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읍! 으읍!”
어디선가 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캐시는 가볍게 무시했다.
“난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것보단 시끄럽고 정신없는 게 좋아.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부수는 걸 더 좋아하고. 너는 어때?”
캐시가 아니사의 답을 재촉했다.
아니사가 굳은 채로 캐시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은 명백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매일 아침.
화장대 앞에 앉은 아니사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땋아주며 엄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좋은 성적을 받고 착하게 굴어야 한단다. 알겠지, 아니사?
언젠가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나를 위한 거라고 했다. 내가 나중에 좋은 집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나를 위해서….
“계속 그렇게 답답하고 꽉 막힌 채로 살 거야?”
엄마의 당부 어린 목소리 위로 캐시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리고.
아니사가 고개를 떨궜다.
미동 없이 있는 아니사에, 캐시의 눈에 실망이 떠오르고 버둥거리던 마테오가 썩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
캐시와 마테오, 스티브 감독의 눈에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다만 차이라면, 캐시는 연기고 두 사람은 진심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숙였던 고개를 든 아니사가 고개를 거칠게 털었다. 머리 끈이 풀린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지며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까보다 단정치는 않았지만, 훨씬 생기 있는 모습을 한 아니사가 캐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피아노 포지션은 비었지?”
캐시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방금 찼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