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새로운 인연 (19)
“컷!”
컷 소리가 울리자 주디스가 긴장 어린 눈으로 스티브 감독을 쳐다보았다. 스티브가 잠시 허허, 웃더니 말했다.
“그 애드리브는 언제 생각한 거야?”
“방금 휴식 시간에요.”
모여서 쑥덕대던 게 이거였나.
“정말이지….”
꿀꺽.
스티브 로이의 말에 주디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도현은 가만히 스티브를 쳐다보았고, 루카는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듯 미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스티브 로이가 방금 봤던 장면을 다시 돌려 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원래의 대본을 떠올렸다.
캐시 : (도발하는) 계속 그렇게 답답하고 꽉 막힌 채로 살 거야?
아니사 :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떨궜다가 고개를 들며 결심한 듯이) 피아노 포지션은 비었지?
캐시 : (만족스럽게 웃으며) 방금 찼어.
아니사가 단정하게 땋은 머리카락을 푸는 행동은 대본에는 없었던 애드리브였다.
그러나.
‘훨씬 캐릭터가 풍부해졌어.’
스티브 로이는 인정했다. 주디스가 만들어낸 아니사가 기존의 아니사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머리카락을 푸는 간단한 행위일 뿐인데,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아니사라는 캐릭터를 훨씬 입체감 있게 만들었다.
그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
“그런 애드리브를 한 이유가 뭐야?”
순간, 탓하는 줄 알고 어깨를 움츠렸던 주디스가 도현이 눈짓을 보내는 걸 보고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주디스는 조금 전의 대화를 기억해냈다.
도현이 아이디어를 낸 후,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쏙 든 주디스는 곧바로 연습해보려 했다. 그걸 말린 건 도현이었다.
- 애드리브를 어떻게 할지는 정했지만, 아직 끝이 아니야.
- 그게 무슨 소리야? 연습 말하는 거야? 연습이라면 지금부터 하려고….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 배우가 무대에서 취하는 모든 일은 목적이 있어야만 해. 아니사가 머리카락을 푸는 행위도 마찬가지야. 너는 아니사가 머리카락을 푼 목적이 뭐 때문이라고 생각해?
진지하게 묻는 도현에 주디스도 덩달아 진지하게 고민한 후 답했다.
- 아니사는 모범생이야.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착한 아이처럼 굴었지만, 실은 그걸 답답하게 생각했어. 아니사가 머리카락을 푼 건 달라지고 싶은 결심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 그러면, 왜 결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푸는 행위’를 선택했을까? 모범생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라면 안경을 벗어도 되고, 넥타이를 풀어도 되잖아.
- 어…?
도현의 질문에 주디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 아니사가 굳이 ‘머리카락을 풀기로’ 했다면 그 행위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야만 해. 무대에서 배우의 모든 행위는 논리적이고 일관적이어야만 하거든. 배우의 행동에 목적과 이유가 없다면 관객들은 납득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으니까.
주디스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말이었지만, 무엇을 뜻하는지는 언뜻 알 것도 같았다.
주디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해?
- 상상력이야.
도현이 재차 말했다.
- 아니사에게 있을 법했던 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해야 해. 대본에는 나오지 않은 부분, 아니사의 비어 있는 여백을 말이야.
주디스가 도현의 검은 눈을 한번 보았다가, 스티브 감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에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움츠러들진 않은 기색으로 천천히 말했다.
“아니사에게 땋은 머리카락은 착한 아이의 상징이거든요.”
스티브 로이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가 더 말해보라는 듯이 잠자코 있자, 주디스가 이어서 자신이 생각했던 걸 말했다.
“아니사의 머리카락은 매일 아침 엄마가 땋아줘요. 아니사의 부모님은 아니사를 사랑하지만, 아니사를 올바르게 키우는 방법은 아니사가 ‘얌전하고 착한 아이’가 되도록 하는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얌전하고 착한 아이처럼 보이도록, 그런 아이가 되도록 매일 아침 머리카락을 땋아주는 거예요.”
스티브 로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솔직히, 물어는 봤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했을 거라고 기대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주디스는 스티브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러니까 땋은 머리카락을 푼 건 아니사의 결심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어요.”
“기대 이상이야. 대단해.”
스티브 로이는 굳이 숨기지 않고 느낀 그대로 감탄했다. 주디스의 얼굴이 기쁨으로 붉어졌다.
“도, 도현이 도와줬어요.”
홀로 칭찬받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주디스가 말을 얹었다. 갑자기 시선을 받은 도현이 당황하자, 루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이 한 박자 늦게, 대부분 아니사가 한 거라고 말했지만 스티브 로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많은 영향을 끼쳤겠지.’
스티브 로이가 봐온 도현은 정말이지 영리했다. 그리고 그 나이에 드물게도 연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줄 알았다.
아마, 주디스가 이토록 깊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도현의 도움 덕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대단하다니까.’
보면 볼수록 미래가 궁금해지는 아이였다. 배우로서도, 그냥 한 사람으로서도.
그래도 지금은 이걸 생각해 봐야지.
주디스의 대답을 들으며,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촬영한 장면을 돌려 보며 스티브 로이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스티브 로이가 주디스를 불렀다.
“주디스, 잠깐 이리 와볼래?”
“아, 네!”
쪼르르 달려간 주디스가 의문을 담고 쳐다보자, 스티브 로이가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장면을 좀 추가할 거 같아서 말이야.”
“…장면을요?”
예상치 못한 말에 주디스가 얼이 빠진 채로 답했다.
“그래. 네 대답을 듣고 생각난 게 있어.”
한 박자 뒤에, 그 말을 이해한 주디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 * *
“잘 가!”
주디스가 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도현도 주디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해 주었다.
“주디스랑 많이 친해진 거 같네?”
“네, 아마도요.”
애드리브를 생각해 내도록 도와준 것에 생각보다 더 고마움을 느낀 것 같았다. 도현에게 가진 호감이 급속도로 상승한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도현의 입장에서는, 루카가 두 명이 된 기분이라 조금 얼떨떨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도현은 네 덕분에 분량이 늘어났다며 기뻐하던 주디스를 떠올리다가 픽 웃었다.
도현이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매자, 오스카가 말했다.
“이번에 오랜만에 쉬겠네.”
“그러게요.”
오늘 촬영 이후 도현은 삼 일 동안 촬영 일정이 없었다. 일주일에 근로할 수 있는 시간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쉬는 날이 종종 있었다.
“쉴 때 뭐 할 예정이야?”
“아, 아빠가 오시기로 했어요.”
“아빠? 한국에 계신다는?”
“네.”
오스카가 잘됐다며 축하해줬다. 오랜만에 보는 거니 아빠랑 같이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라는 덕담을 해주는 것에 도현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언제 오시는데?”
“내일이요.”
“내일? 오… 그런 중요한 일을 하루 전날까지 말 안 했다는 거지?”
말하고 나니 괘씸했는지 오스카가 쓰읍,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뭐 할 거냐고 묻지 않았으면 오늘도 말 안 했겠네?”
“…….”
정곡을 찔린 도현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장난스럽게 흘겨본 오스카가 차가 멈춘 틈을 타 도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요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네 부모님이면 내게도 중요하신 분들이니까, 다음에는 이야기해줘.”
매니저와 아티스트의 관계는 단순히 비즈니스적으로만 정의할 수 없었다. 일상부터 업무적인 부분까지 케어하는 매니저는 아티스트의 가족과도 친분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오스카의 경우도, 서혜나와 셋이서 식사를 종종 할 정도로 꽤 교류를 나누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래, 그래. 그러면 언제까지 미국에 계실 예정이야? 한 번쯤 인사하면 좋을 거 같은데.”
“꽤 오래 계실 거예요. 오스카도 만나볼 수 있을걸요.”
도현의 말에 오스카가 잘되었다며 답했다.
소소하게 떠들다가, 피곤했는지 어느새 조용해진 도현이 차창에 기대에 자고 있었다. 오스카는 작게 웃은 후,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샌디에이고로 향하는 차가 어둑해지는 도로 위를 내달렸다.
* * *
“도현아!”
유리로 된 함에 예쁘게 보관되어 있는 드라이플라워를 보던 도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의자에 걸쳐 놓았던 외투를 꿰어 입고는 방을 나섰다.
도현이 일 층으로 내려가자, 평소보다 좀 더 차려입은 서혜나가 도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을 위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인지, 공항에 오는 사람을 마중 나가는 게 아니라 어디 출국을 나가는 거 같은 패션이었다.
“얼른 가자. 다 챙겼지?”
“네.”
“이거, 가면서 배고프면 안 되니까 과자 하나 챙기고. 응, 이제 가자.”
서혜나는 평소보다 들뜬 모습이었다.
도현은 서혜나와 함께 차에 탔다.
“아빠는 한 시 반에 도착한다니까, 지금 출발하면 삼십 분 전에는 도착할 수 있겠다. 도착하면 공항 카페에서 맛있는 거 먹고 있을까?”
“좋아요.”
서혜나가 즐거운 얼굴로 시동을 걸었다.
오늘따라 차가 막히지 않아서 예상 도착 시간보다 이십 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서혜나가 말했다.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네. 일단 저쪽으로 가자. 저기에 음식점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서혜나를 따라 걸었다. 매번 느꼈던 건데, 공항은 참 활기찼다. 지친 얼굴도 있었고, 기대감을 가득 품은 얼굴도 있었다.
도현이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데, 서혜나가 말했다.
“도현아, 시간이 애매하니까 지금 그냥 점심 먹을래?”
“점심이요?”
“응. 점심 먹고 나오면 딱 맞을 거 같은데.”
“그럼 아빠는요?”
도현의 우려에 서혜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기내식 먹고 올걸? 시간이 시간이니까.”
“아, 그렇겠네요.”
서혜나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그런지, 음식점에 사람들이 많은 게 보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좋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한번 둘러봐도 돼요?”
“당연하지.”
서혜나와 도현이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고른 곳은, 다름 아니라 패스트푸드점이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도 있었지만, 그렇게 여유를 즐기면서 먹을 만큼 시간이 많은 건 아니라서 간단히 먹기를 선택했다.
밀크셰이크에 감자튀김, 그리고 햄버거까지.
미국의 패스트푸드 하면 바로 생각나는 메뉴들이었다.
감자튀김은 바삭하지 않고 좀 눅눅한 편이었지만, 두 사람은 모두 불만 없이 맛있게 먹었다. 도현은 기름이 묻은 손가락을 냅킨에 닦고는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1:13 PM]
밥을 먹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도현은 핸드폰을 닫으며 생각했다.
아빠가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으로 가겠단 걸 말하겠다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