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마주하는 것 (2)
“아,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
거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이장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입가에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익숙하지 않은 아침이다. 서혜나가 늦게 일어나는 편인 건 아니었지만, 도현의 기상이 워낙에 빨랐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일 층에 내려오면 보통 고요했다. 그러나 요 며칠 사이 그 광경이 바뀌었다.
텅 빈 소파 대신에,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아빠가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응, 좋은 아침. 오늘도 마당에 나갈 거지?”
“네, 잠깐 돌고 돌아오게요.”
“그럼 아빠도 같이 가자.”
커피는 이미 다 마셨는지,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가벼웠다. 이장혁이 근처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 도현은 그가 옆에 서자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아침 공기가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여름이어도 아침에는 미약한 바람이 불어 선선한 편이었다. 새벽 공기가 내려앉은 정원은 평소보다 채도가 한 단계 정도 낮아 보였다.
이장혁이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근에 수영하는 사람이 없어 수영장의 물을 빼내서, 물이 반짝이며 출렁이는 건 볼 수 없었다. 그건 좀 아쉽지만 예쁘게 조성된 꽃들도 충분히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그가 찌뿌드드한 팔을 쭉 펴서 기지개를 한번 한 후 말했다.
“왜 네가 아침마다 정원에 나오는지 알 것 같아.”
사실 도현은 모를 테지만, 이장혁은 일이 없을 때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늦게 일어나면 일어났지. 이장혁이 이렇게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건 다름 아닌 도현 때문이었다.
자주 통화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 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 년에 몇 번 보지도 못하는데 그 소중한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촬영장까지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그 외의 시간에는 최대한 같이 보내고 싶은 마음에 생활 패턴을 도현에게 맞추는 중이었다.
처음 며칠은 좀 피곤했지만, 익숙해지니까 꽤 기분 좋았다. 부지런한 사람이 되는 감각도 나쁘지 않았을뿐더러, 아들과 나란히 걷는 시간이 평화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아들과 아내가 나가고 나면 할 일도 없으니 쉬는 건 그때 하면 됐다. 이장혁은 주어진 휴가를 아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이따가 엄마 일어나면 오랜만에 달리기나 할까?”
이렇게 걷다 보니, 한국에서 아침에 달리기했던 게 생각난 이장혁이 제안했지만,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촬영 때문에 좀 힘들 거 같아요. 가서 피곤할까 봐요. 한번 해봤는데, 오후가 되니까 체력이 부족해서 졸리더라고요.”
“오….”
열 살짜리 아들이 직장에 찌든 현대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이장혁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이대로 괜찮은 걸까? 도현이 원해서 하는 것도 알고 좋아하는 것도 아는데 뭔가, 아들에게 잘못하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촬영 끝나면 운동을 시작하려고요.”
“달리기?”
“그것도 괜찮지만, 다른 운동도 한번 생각해보는 중이에요.”
이장혁이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운동 하나 배우면 좋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촬영하는데 체력이 부족해서 컨디션이 일정하게 유지가 안 되더라고요.”
“오….”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이장혁은 또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아니, 아들이 본인의 일에 책임감을 갖는 건 좋긴 한데… 아니, 진짜 대견한데….
아들이 책임감이 너무 강하고 자기 할 일을 너무 야무지게 잘해서 고민이라고 하면 어디서 몰매를 맞을 거란 걸 알고 있긴 하지만, 마냥 좋아하기엔 미묘했다. 무리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걱정되기도 하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이장혁이 뭔지 모를 혼란스러운 기분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고개를 살짝 틀어 그를 올려다본 도현이 물었다.
“아빠는 계속 달리기하시고 계세요?”
“어, 응? 아빠?”
“네.”
“응. 계속하고 있어. 그 공원 기억나지? 아침마다 거기 달리는 중이야. 그런데 처음엔 좀 허전하더라. 같이 달리다가 혼자 달리려니 심심하기도 했고….”
운동은 역시 같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즐겁다고 말하는 이장혁에 도현이 대답 없이 짧게 웃었다.
이장혁이 주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가볍게 환기했다.
“촬영은 언제까지 한다고 했지?”
“확실하진 않지만,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는 끝날 거 같아요. 촬영이 밀리면 며칠 정도 늘어날 수도 있지만요.”
“작년에는 그때 베니스에 있느라 학교에 못 갔잖아.”
“진이 반 배정을 알려줬죠.”
도현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먼 이탈리아에서 반 배정 소식을 듣고 기뻐했던 것도.
“이번에는 그 전에 끝나서 새 학기 시작할 때 친구들이랑 인사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친한 친구가 있어도 개학 날 가는 편이 적응하기 수월하니까….”
도현은 이장혁이 걱정하는 바를 깨달았다. 도현이 개학식 날 빠져서 아이들이 무리 지은 틈에 못 끼어들까 봐 걱정인 거 같았다.
자신은 딱히 걱정되지 않는…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학년 때야, 진과 니콜라스가 모두 같은 반이니까 같이 다니는 게 당연했고, 한참 베니스로 관심이 쏠렸던 때라 학교에서도 주목의 대상이라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 거란 걱정을 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과도한 관심과 친근함의 표출이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러웠지.
그렇다고 해서 걱정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냥 아빠가 우려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싶은 게 전부였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불안함을 느낄까?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해는 할 수 있어도 공감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미래의 일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법이니 나중에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반에서 혼자 지내더라도 딱히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런 건 정말 별거 아니었으니까….
“촬영은 일정대로 가고 있으니까,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개학 전에 끝날 거예요.”
NG가 적은 편이라서 촬영은 늘 예상한 시간보다 빠르게 끝났지만, 그렇다고 다음 날 있을 촬영까지 이어서 하지는 않았다. 보통 끝나면 끝나는 대로 해산을 했기 때문에 일정대로 가는 중이었다.
개학 날 학교에 못 가게 되더라도 문제 될 건 없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도현은 적당히 해야 할 말과 숨겨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았으니까.
“그래, …아, 엄마 일어났나 보다.”
이장혁이 불이 켜진 거실을 보고는 말했다. 두 사람은 딱히 말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미 며칠간 반복된 일이었기 때문에 따로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왔어? 아침부터 둘 다 부지런하네.”
서혜나가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그녀가 이장혁에게 고생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휴가 중에도 이른 기상을 하는 이장혁의 숨겨진 노고를 알고 있는 탓이었다.
‘나도 전에는 그랬는데 말이지.’
서혜나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조금 어이없었던 옛일이 떠올라 가볍게 웃었다.
도현이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지났을 때, 서혜나는 아침에 도현을 깨워주려고 했지만, 도현이 먼저 일어나 있었던 탓에 실패했다.
그 후로 꼭 깨우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기상 시간을 이르게 당기며 시도했지만, 몇 번을 해도 실패였다.
야금야금 당겨진 기상 시간이 다섯 시에 가까워졌는데도 도현은 매번 침대에 앉아서 멀뚱한 얼굴로 서혜나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진짜 자고 있겠지, 하고 방문을 열었던 서혜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얼굴에는 졸음기 한 점조차 없었다.
…얘는 잠이 없나?
대체 아들이 잠을 자긴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서혜나는 뒤늦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도현이 잠귀가 밝은 탓에 서혜나가 방 근처에 오는 순간 발소리를 듣고 깨어버린 것이었다.
잘 자고 있던 애꿎은 아들을 일찍 깨워버렸단 사실을 깨닫고 서혜나는 도현을 깨우기를 포기했다. 다섯 시를 넘어 네 시가 되기 전에 깨닫고 포기한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저 그럼 방에 가서 씻고 올게요.”
“그래. 아, 오늘 아침은 토마토 스튜 괜찮아? 어제 새우랑 조개 사 왔는데, 그거 넣어서 만들어줄게.”
“네, 좋아요.”
해산물은 도현이 좋아하는 식재료 중 하나였다. 서혜나가 팔을 걷으며 주방으로 들어가고 도현은 이 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거실에 남은 이장혁은 물이나 한잔 마시자는 생각에 발걸음을 떼다가, 불현듯이 멈춰 섰다.
아.
알았다. 아까부터 기분이 계속 오묘했던 이유.
서운함이었다.
이장혁이 앓는 소리를 냈다. 몇 박자 늦게 깨달은 자신의 진심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면목 없기도 했다.
도현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이장혁이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솔직히 물질적인 지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못 해줬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도현이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그것도 자기 일을 알아서 척척 잘하니까 서운해진 거다. 내가 없어도 괜찮은 거 같아서.
아들이 제 할 일을 알아서 잘하는데 서운함을 느끼다니. 아빠 실격이었다.
이장혁이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에 든 생수를 꺼냈다. 찬물을 마시니까 좀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좀 더 기대주면 좋을 텐데.
도현에게 하지 못할 말은 물과 함께 목구멍 뒤로 삼켰다.
* * *
“…너 기분 안 좋아?”
위로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느릿하게 내려갔다.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도현이 진심으로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요즘 평소와 조금 다르게 굴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방금 전에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 소리가 나올 이유가 없는 거 같은데.
도현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루카가 조금 눈매를 찡그렸다.
“아니.”
못마땅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잖아.”
그 불만에 도현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루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생각을 바꾸었는지, 침착하게 말했다.
“웃는 얼굴이 이상했다면 유감이지만, 난 별일 없어. 기분이 안 좋지도 않고.”
“그러시겠지.”
전혀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정말 웃는 게 이상했나. 도현이 뺨을 슬쩍 문지르다가, 아침에 아빠와 나눴던 대화가 다시금 떠오르자 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때까지 도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던 루카가 여봐란듯이 말했다.
“역시 기분 안 좋잖아.”
“…아니야.”
스스로 듣기에도 썩 믿음이 가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루카도 마찬가지였는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 오히려 간단하게 해결될 일일지도 모르잖아?”
루카 나름대로 걱정이 담긴 조언이었다. 반쯤은, 어떤 일로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벼운 감정이었고.
“루카! 잠깐 이리 좀 와볼래?”
“네! 잠시만요!”
루카가 도현에게 가보겠다고 말한 후 스태프가 부른 쪽으로 뛰어갔다. 촬영장에서 뛰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스태프에 혼내지도 못하게 웃으면서 왜 불렀냐고 물었다. 결국 스태프는 잔소리를 그만두고 웃고 말았다.
도현은 스태프가 루카를 불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도현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약하게 요동치는 눈동자가 그가 느끼고 있는 혼란을 드러내었다. 길게 내려진 앞머리 덕에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앞으로 쏠린 머리카락에 표정이 완전히 감춰졌다.
방금, 분명.
- 너한테는 모든 게 다 쉬워?
마음속 한구석, 있는지도 몰랐던 지저분한 감정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불쑥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만약 루카가 자리를 뜨지 않았더라면, 무슨 말을 입 밖으로 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럴까.
루카는 분명 순수한 선의와 호의에서 꺼낸 말이었다. 이런 생각은 이성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니까 꼭….
내가 평소에 루카를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잖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