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마주하는 것 (3)
촬영은 거의 막바지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촬영장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자유로웠다. 스티브 로이 감독의 성향, 아이들이 주역이라는 특수성, 순조로이 진행되는 촬영에 온풍기를 튼 듯이 훈훈한 촬영장의 분위기가 삼위일체가 되어 만들어진 현상이었다.
어느 정도로 자유로웠냐면, 아이들이 제각기 애드리브 경쟁을 할 정도로 자유로웠다.
그전에도 루카가 자주 애드리브를 시도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된 건 주디스가 애드리브에 도전해본 날 이후부터였다.
늘 무리의 중심에 있고 존재감이 강한 루카나, 연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가끔 넋을 놓게 되는 도현이 하는 애드리브는 아이들의 도전 욕구를 자극하지 못했지만, 주디스는 달랐다.
‘나도 해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스티브 로이 감독은 막지 않았다. 촬영이 너무 산으로 갈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는 건 촬영장의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어려서 뇌가 유연하기 때문인지, 아직 고정 관념이나 편견이 확립되기 전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생각해내는 것은 때때로 그를 놀라게 했다.
아이들이 즉흥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시도하는 애드리브를 살릴 건 살리고 과한 건 쳐내면서 촬영을 진행하니 촬영장 분위기가 점점 더 활기차졌다.
누구 하나 대충 하는 사람 없이 몰입해서 불타오르니, 매일매일 눈 깜짝할 사이에 촬영이 끝나 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일정도 여유로우니까.’
빠듯하다면 모를까, 시간도 여유로운데 배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컷! 그 부분은 원래대로 가자.”
“으아… 네! 죄송해요!”
“아니야. 괜찮았는데, 원래대로 가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느낌일 거 같아서 그래. 다시 한번 가보자.”
“네!”
물을 준 식물처럼 다시 파릇하게 살아난 주디스가 기합을 잔뜩 넣고는 대답했다.
배우가 너무 나아가면 자신이 커트하면 되니까.
스티브는 촬영장에 있는 대다수의 아역이 이 영화가 첫 출연이라는 걸 알았다. 감독으로서, 막 발돋움하는 어린 배우들이 이 자유로운 촬영을 밑거름으로 해서 좋은 배우로 성장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준비됐지? 레디, 액션!”
촬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 * *
캐시, 엘비, 제이, 아니사, 조지까지.
우여곡절 끝에 다섯 명이 모임으로써 밴드부는 정식으로 인정받는 동아리가 되었고, 캐시는 이로써 밝고 창창한 미래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캐시의 공갈과 협박, 사기 및 스토킹으로 모인 멤버일뿐더러, 새로 생긴 동아리이니만큼 운영 방침이 확립되지 않아 제대로 굴러가기가 어려운 게 원인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망하겠다 싶었을 때.
상황을 변화시킨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밴드부 폐지 위기였다.
이를 설명하려면 조금 더 과거로 흘러가야 했다. 아니사 영입 당시, 눈앞에서 피아노 담당을 빼앗긴 마테오는 복수의 날을 갈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이 아주 헛것은 아니었다. 마테오는 힘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캐시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게 너무나도 굴욕적인 경험으로 인한 깨달음이란 게 치가 떨렸지만….
아무튼, 마테오는 조금 더 영리하고 현명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큰 힘은 더 큰 힘으로 다스리는 법.
마테오는 교감 선생님을 찾아갔다.
마테오의 엄마는 학부모 대표로 산타 모니카 아카데미에서 꽤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교감 선생님은 명예욕과 권력욕이 강할뿐더러, 자신이 명문 사립학교의 교감이라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구슬리기는 매우 쉬웠다.
품격 높고 전통 깊은 산타 모니카 아카데미에 어떻게 굴러 들어온 건지 모를 전학생 하나가 물을 흐린다며, 저급한 록 음악이 학교의 격을 해칠까 우려된다고 속살거리는 걸로 충분했다. 마테오의 얼굴은 상당히 가식적이었지만, 평소 마테오를 예뻐하는 교감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록 밴드부는 동아리를 해체하라는 교감 선생님의 일방적인 통보를 들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동아리의 담당을 맡은 담임 교사가 이건 불공평한 일이라며 항의했지만, 교감 선생님의 마음은 확고했다.
캐시가 저 교감 선생의 약점을 어떻게 잡을까 궁리하고 있을 때, 아니사가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 저희가 학교 축제에서 일 등을 하면요?
- 뭐? 그게 무슨 소리니.
- 교감 선생님의 말씀은, 록 밴드부가 학교의 격을 낮출까 봐 걱정이라는 소리시잖아요. 그러니까 저희가 동아리의 격을 증명해 볼게요.
모두가 놀란 눈으로 아니사를 쳐다보았다. 아니사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당당히 말했다.
- 이번 축제에서 일 등을 거머쥐는 걸로요.
- 허, 참나. 그게 가능하다고 보니? 학교 축제에서 일 등은 지난 육 년간 오케스트라부의 차지였어.
- 그러니까, 교감 선생님께서는 상관없으신 거 아닌가요? 저희가 일 등을 하지 못하면 교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체하게 될 테니까요. 아니면 오케스트라부가 저희한테 질까 봐 걱정돼서 그러세요?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잔뜩 성이 난 교감 선생님이 축제 끝나면 바로 해체해야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고 사라지고, 남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아니사가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 캐시를 따라 해봤는데, 어땠어?
- 넌 정말, 최고야.
캐시가 아니사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그리하여 지금.
어떻게든 이 오합지졸로 축제에서 일 등을 먹어야 하는데….
뿅! 뿅! 피융!
캐시의 매서운 눈빛이 한쪽으로 향했다. 엘비가 몸을 흠칫 떨었다. 당장 그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무언의 의사 표현에도, 제이는 게임기에 코를 박고 고개를 들 생각을 안 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캐시가 아니었다.
“……! 뭐야!”
게임기를 빼앗긴 제이가 발버둥 쳤다. 캐시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위로 들었다.
“내 게임기 돌려줘!”
“안 돼.”
“왜! 왜 그러는데!”
“방금 너도 들었잖아.”
“뭘?”
진심으로 모르는 듯, 어벙한 표정을 짓는 제이에 캐시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축제 때 일 등 하지 못하면 동아리를 없애겠다는 거.”
이쯤이면 알아들었겠지.
캐시가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의 반응을 기다리는데, 그가 보인 반응은 캐시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눈을 끔뻑이던 제이가 말했다.
“그게 왜?”
“그게 왜라니?”
납득하지 못한 캐시의 얼굴에 제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난 물질이 열역학적 변화를 일으킬 때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일로 전환될 수 없는, 유용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엔트로피 같은 포지션이잖아?”
스티브 로이가 슬쩍 웃었다. 영화의 배역 중에서 대사가 가장 어려운 인물은 다름 아닌 제이 로빈이었다. 일단 제이 로빈은 투머치 토커였고, 그 내용도 일반적이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발음이 몇 번 꼬일 법한데도 도현은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딱히 발음 교정을 하거나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은데, 저토록 정확하고 빠르게 말을 내뱉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배우들이 정확한 대사 전달을 위해 딕션 연습에 힘을 쓴다는 걸 생각하면, 도현은 상당히 축복받은 쪽이었다.
제이가 빠르게 내뱉은 말에 잠시 얼굴을 찡그리던 캐시가 제이를 흘긋 내려다보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휘었다.
분명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제이는 설레기는커녕 두려워졌다. 제이의 낯빛이 점점 안 좋아지는 반면 캐시의 웃음은 짙어졌다.
“엔트로피는 관심 없고, 아직도 모르겠어?”
뭘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영원히 모르고 싶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이의 바람이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넌 이미 한배를 탔어.”
한 글자 한 글자 악센트까지 주어가며 말하는 캐시에 제이의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그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깨달은 건 이곳이 마굴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엘비는 도망을 막으려는 심산인지 이제 캐시의 지시 없이도 슬금슬금 문 쪽으로 가고 있었고, 조지는 혼자만 당할 수 없다는 듯 캐시를 응원했으며, 아니사는 그냥 제2의 캐시, 혹은 캐시 주니어였다.
마지막 희망인 선생님을 쳐다보았지만, 선생님조차 고개를 슬쩍 돌리며 제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건,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분명 머릿수만 채워주면 된다고 했으면서!”
단말마의 비명 같은 마지막 반항이었지만, 캐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캐시는 이럴 순 없다며 항변하는 제이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이에게는 불행히도, 캐시는 이미 그를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캐시가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는 구슬리듯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너무 우울해하지 마. 잘 생각해보면, 게임이나 이거나 다를 것도 없어.”
“대체 어디가?!”
제이의 반발에 캐시가 태연히 말했다.
“퀘스트 종류는 선택 불가능한 메인 퀘스트. 달성 목표는 ‘학교 축제에서 일 등 먹기’, 주어진 기간은 두 달, 실패 시 페널티는 동아리 존속 위기, 캐시 와일드의 분노.”
제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보상은, 산타 모니카 아카데미 최고의 동아리라는 칭호와 우릴 엿 먹이려던 사람들의 멍청한 얼굴, 그리고 학교의 인기인 등극까지.”
제이는 저게 헛소리라는 걸 알았지만, 자꾸만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할 거 같은 충동이 들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제이는 이성보다 욕망의 손을 들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아니사가 감탄사를 흘렸다.
캐시 와일드는 정말, 타고난 수완가였다.
* * *
도현이 오스카가 가져다준 생수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뻑뻑했던 목이 부드럽게 풀렸다.
정식으로 쉬는 휴식 시간이 아니라, 잠깐 감독이 모니터링을 하는 사이 난 틈을 타 목을 축이는 것이기 때문에 금방 돌아가야 했다.
뚜껑을 잠그자, 오스카가 자연스럽게 도현의 손에서 물병을 가져갔다. 도현이 습관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니 오스카가 일일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며 도현의 등을 살짝 도닥이듯 밀었다.
도현은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다시 세트장으로 돌아갔다. 바닥에 길게 놓인 전기선을 밟지 않도록 보폭을 좀 넓게 해서 피한 후, 제이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드럼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할 일이 없어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스태프 두 명이 다가와 도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들이 물러나고 나자 다음으로 온 건 루카였다.
“아, 도현! 나 고민 중인 거 있는데 뭐가 더 낫나 봐줄래?”
“뭔데?”
“이거… 이렇게 할 때, 고개를 좀 드는 게 나을까, 아니면 이렇게, 트는 게 나을까?”
브레디가 옆에서 ‘대체 뭐가 다른 거지’하는 표정을 보고 있었지만, 진지한 눈으로 루카를 보던 도현이 입을 뗐다.
“두 번째가 나은 거 같아. 카메라를 저쪽 방향에서 찍으니까 첫 번째는 표정이 좀 가려질 거야.”
“아, 역시! 나도 이게 좀 더 괜찮은 거 같았어. 그럼 두 번째로 해야겠다! 그리고 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루카의 말을 듣고는, 나름의 근거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를 잠깐.
“씬 넘버 79. 밴드부실, 드럼 연습 장면부터 촬영갑니다!”
도현이 눈을 조금 길게 감았다 떴다.
안경 너머의 총기 어리고 야무졌던 눈이 순진하고 어벙한 빛을 띠었다. 반듯하게 펴졌던 어깨도 조금 둥글게 말려 아래로 쳐졌다.
방금까지 루카와 대화하던 도현은 사라지고, 제이 로빈이 거기에 있었다.
첫 대본 리딩 때 루카에게 패배감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촬영을 시작하며 꽤 많은 시간 동안 근거리에서 보았지만, 여전히 저렇게 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야, 여전하지만.
“레디.”
단순히 승부욕만 들지 않는 건, 그동안의 시간이 도현이 얼마나 좋은 애이고, 또 얼마나 특별한지 알기에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딘가 또래 같지 않은 차분함, 묘한 음울함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다정한 검은 눈동자, 목소리를 높이는 법 없이 침착한 말투,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섬세함과 세심함까지.
처음에는 그저 흥미로움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도현이라는 친구가 좋았다. 어쩌면 최근 들어 루카에게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이 캐시 역을 맡은 것보다 도현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액션!”
루카는 도현과 연기하는 게 진심으로 즐거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