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04)화 (205/582)

제204화. 마주하는 것 (4)

“리듬 게임이라고 생각해. 네가 좋아하는 ‘배틀로얄 스플래쉬 플레이트 스타 시즌4’도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각도로 눌러야 하잖아? ‘드럼 비트 시즌1’도 마찬가지야.”

뻔뻔하게 ‘드럼비트 시즌1’을 입에 올리는 캐시를 제이가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말거나,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캐시가 말을 이어갔다.

“정확한 박자에 맞춰서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힘으로 타격해야 하는 거야. 자, 메트로놈을 켜줄 테니까 내가 하는 대로 해봐.”

딴 따다 따!

캐시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불만 가득한 낯으로 내내 소심하게 투덜거리던 제이가 캐시의 시선에 입을 다물곤 스틱을 쥐었다.

그리고.

딴 따다 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소리가 울렸다. 캐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 다시 해봐.”

딴 따다 따!

“이거는? 이것도 할 수 있어?”

허겁지겁 핸드폰을 든 캐시가 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잠깐 동영상을 보던 제이가 스틱을 잡고는 경쾌하게 내리쳤다.

따다단 따다 딴!

“이것도?”

따단 따단 따 치잉!

“미친….”

놀란 눈으로 보는 주변 사람들에 제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어리숙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에 뭐가 있나 찾는 모습이 바보 같았지만, 아무도 그걸 비웃지 않았다.

뭐지?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제이가 다시 고개를 들어 멀뚱히 캐시를 올려다보았다.

캐시가 말한 대로 게임하듯이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파워로 타격했을 뿐이었으니, 자신이 무언가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했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캐시의 눈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단언컨대, 제이가 지금까지 본 캐시의 눈빛 중에서 가장 생기 있었다.

“너, 진짜 터무니없구나.”

“?”

전혀 이해하지 못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캐시가 제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 주었다.

“너 스크립트 프로그램 같다고.”

“!!”

이번에는 단번에 이해한 제이였다.

* * *

“전에 봤을 때보다 드럼을 더 잘 치는 거 같은데? 그동안 더 연습했어?”

“아, 드럼 학원 계속 다니고 있거든.”

삼 주에 걸친 밴드 연습이 끝난 후에도 도현은 계속 학원에 다니며 드럼을 익히는 중이었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같이 다녔고, 촬영을 시작한 후에는 일주일에 한 번, 많을 땐 두 번 정도 꼴로 학원에 갔다.

단순히 립 서비스나 격려 차원으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도현은 콜린의 말처럼 전보다 드럼 실력이 좋아졌다. 도현에게 드럼을 가르쳐 주었던 앵거스 크러머가 보았더라면 깜짝 놀랐을 정도로.

콜린이 감탄한 낯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나도 나름 연습해서 실력 늘었는데… 너는 훨씬 더하네.”

멈칫한 도현이 콜린을 바라봤지만, 두 눈에는 그저 감탄과 놀람의 기색만 있을 뿐이었다. 도현이 반 박자 정도 늦게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기타는 손가락 움직임이 좀 더 섬세해야 하니까 실력이 빨리 늘기 힘들잖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브레디랑도 자주 연습하잖아?”

콜린과 브레디는 둘 다 기타 포지션이다 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길 하다가 친해진 거 같았다. 주로 기타에 능숙한 브레디가 콜린에게 도움을 주는 식이었다.

“어… 그런가?”

콜린이 목 뒤를 쓸며 웃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갑작스럽게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대사 중에서 뭐지… 스크립트 프로그램?”

“응, 스크립트 프로그램 맞아.”

“그래, 그거! 그게 무슨 뜻이야?”

평소 게임보다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콜린은 캐시가 스크립트 프로그램을 언급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현도 모르고 있다가, 할리와 브라운과 어울려 놀면서 알게 된 단어였다.

“불법 소프트웨어를 지칭하는 말인데, 메모리나 스크립트를 변조해서 프로그램이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이도록 하는 거야. 하지만 비인가 프로그램이라서 엄연히 불법이야.”

콜린이 눈을 깜빡였다.

“…게임에서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고 반칙을 쓰는 거야. 캐시는 제이의 능력이 사기 같아서 그렇게 비유한 거고.”

“아! 그렇구나!”

콜린이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브레디가 ‘아까 본 상황인 거 같은데….’라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스티브 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장면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잠깐 연주 부분 리허설 먼저 하고 갑시다!”

도현이 몸을 일으켰다.

다음 장면은 아이들이 처음으로, 엉망진창이지만 ‘밴드’ 연주를 하게 되는 장면.

밴드가 처음으로 제대로 뭉친 순간이기도 했다.

도현이 드럼 의자에 가서 앉았다. 이제는 손에 익은 스틱을 쥐고는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리허설 시작이었다.

* * *

“흐음….”

루카가 길게 소리를 내뱉었다.

어딘가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거 같은 껄쩍지근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도현이 스틱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경계 어린 눈으로 루카를 쳐다보았다.

“좋아. 다 좋은데….”

말꼬리를 흐리던 루카가 손뼉을 짝! 치더니 말했다.

“알겠다! 다 좋은데, 너무 딱딱하잖아. 네 연주에는 록 스피릿이 부족해.”

“…….”

“좀 더 반항적으로. 이 세상이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는 듯이, 어?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다 찢고 태우고 부수고 싶다는 것처럼, 알겠어?”

“그건 범죄 아니야?”

옆에서 콜린이 태클을 걸었지만, 쌈박하게 무시한 루카가 도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헝클어트렸다. 안 그래도 길게 자라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이 되었다.

“머리도 좀 풀어 헤치고, 넥타이도 좀 풀고. 음, 좋았어.”

루카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도현의 행색이 불량해졌다. 거침없는 손길에 도현은 반항도 못 한 채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뒤늦게 팔을 들어 올리며 제 행색을 살폈다.

루카가 뿌듯한 눈으로 도현을 보며 말했다.

“내면의 자유는 외면의 자유로부터 오는 법이거든. 자, 이제 겉모습은 록 스피릿에 가까워졌으니까, 다시 연주해봐.”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

“당연하지. 답답하게 옥죄었던 게 없잖아. 이제 자유로운 기분 그대로 연주해봐.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탁.

도현이 스틱으로 베이스 드럼을 가볍게 쳤다. 루카가 웃으며 더 해보란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탁, 타닥, 챙!

처음에는 눈치를 보느라 중간중간 끊기고, 어설프기까지 했지만 갈수록 드럼통이 울리는 소리가 커졌다.

“좋아, 계속 그대로.”

루카가 벽 한 면에 기대어 놓았던 일렉 기타를 어깨에 멨다.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자리 잡고.

치잉-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루카의 손이 기타 위에서 경쾌하게 움직였다. 도현이 만들어낸 박자 위로, 루카의 연주가 얹어졌다.

도현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솔직히….

그래, 솔직히 재미있었다.

딴, 따라, 따

브레디가 반주를 넣기 시작했다. 반주를 넣는 브레디를 보던 콜린도 우왕좌왕하더니, 에잇 모르겠다라고 하며 그가 칠 수 있는 단 하나의 코드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숙한 실력에 종종 현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났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마저도 음악의 일부였다.

마지막으로-

루카의 눈빛을 받은 주디스가 슬쩍 웃더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피아노음이 선율 위에 얹어지며, 동아리실을 가득 채웠다.

정해지지 않은 박자.

정해지지 않은 멜로디.

온통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연주는 화음도 맞지 않고 엉망진창에 오합지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흥겨웠다. 그 불협화음조차도 화음처럼 느껴졌다.

분명 록 음악은 엔트로피의 소용돌이처럼 무질서하고 어지러운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 지금, 속이 뻥 뚫린 듯한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넥타이를 풀고 나니 목이 좀 더 자유로웠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흔들었다.

합리, 이성, 규범. 온갖 것들을 입에 달고 사는 제이 로빈이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 무질서의 세계에 빠진 순간이었다.

스틱을 내리치는 손이 점차 빨라졌다.

따다따다따다.

따다 딴!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거 같아.

빠르게 베이스 드럼을 내려친 도현이 순간적으로 오른손에 들린 스틱을 바라보았다.

충동은 한순간이었고, 실행은 빨랐다.

도현과 눈이 마주친 루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들려 있던 스틱이 어느새 허공에 띄워져 있었다.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스틱이 도현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빨려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정적인 착지였다.

따다 딴!

그대로 자연스럽게 스틱을 쥔 도현이 곧장 박자를 이어 나갔다. 즐겁다는 듯이, 입매는 위로 쭉 올라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예정되지 않은 퍼포먼스에 놀라 멈칫하던 스티브 로이가 몇 초 후, 재밌다는 얼굴로 웃었다. 두 눈에는 옅은 쾌감이 스쳤다.

그래, 이런 거.

‘이렇게 재밌는 장면이 나오니까, 애들이 마음대로 폭주하는 걸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이런 변수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진 상자를 주웠는데, 거기에 환상적인 시나리오가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아주 즐겁다는 소리였다.

“컷! 좋아! 리허설인데 이렇게 잘해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도현!”

도현이 고개를 들어 스티브 로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떻게 반응할까.

솔직히, 이 퍼포먼스를 집어넣은 건 충동적이었다. 그냥 그 순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제이 역할을 꽤 오래해서 그런가.’

제이의 충동적인 면을 닮아가는 기분이었다. 유 역할을 할 때 나를 완전히 지우고 유가 되었던 것 정도는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한 가지 배역을 맡으면 그 배역에 점점 물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스티브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 퍼포먼스, 또 할 수 있지?”

다행스럽게도, 스티브 감독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도현이 표정을 풀며 대답했다.

“네, 할 수 있어요.”

사실 정말 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스틱을 던졌다 받는 퍼포먼스를 보인 것과는 별개로, 도현은 실제로 평균 이하나, 혹은 가까스로 평균인 수준의 운동 신경의 소유자였다.

방금 전,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운동 신경이 타고나서가 아니라, 이전에 혹독하게 체화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 역할을 맡느라 나이프는 수도 없이 던졌다 받아 봤으니까.’

그래도 아무리 열심히 연습했었다고 한들, 시간이 꽤 지난 일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충동적으로 스틱을 던진 후에 짧게 후회했다.

스틱이 허공을 유영하는 짧은 찰나. 도현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은 ‘떨어지면 망하겠네’였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몸이 기억했는지 손은 자연스럽게 스틱을 낚아챘지만 말이다.

도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스티브 로이는 시원시원한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다가 저런 행운이 굴러 들어왔는지, 가끔가다 신기할 정도였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투자금 걱정 없지, 배우들은 연기 잘하는 것도 모자라 성격마저 순한데, 재능까지 넘치지.

지금 환경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다음 작품을 찍을 때 비교될 거 같다는 게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스티브 로이가 가볍게 웃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컷! 오케이!”

“후우….”

도현이 반사적으로 숨을 내뱉었다. 실수할까 걱정했는데, 이번에도 깔끔하게 던졌다가 받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감탄하며 대단하다는 듯이 보는 것에 도현은 왠지 사기를 치는 기분이 들어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오케이 사인이 나자 루카가 곧바로 도현에게 다가왔다.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미리 연습해 온 거야?”

“스틱 던졌다가 받는 거?”

“어! 그거!”

루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리허설 끝나고 바로 묻고 싶었는데, 촬영이 바로 시작돼서 말을 못했다. 촬영을 하면서 다시 본 퍼포먼스는 두 번 봐도 멋있어서 루카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미리 연습한 거는 아니야. 그냥, 내가 던졌다 받는 건 잘하는 편이거든.”

잘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연습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적당히 자른 말이었다. 그걸 상상하지 못한 루카는 도현이 운동 신경이 뛰어나다고 받아들였다.

사실, 도현이 워낙에 뭐든 잘할 것 같은 우등생 이미지이고 실제로도 뭐든 척척 해내는 모습만 봐서 당연히 운동도 잘하겠지란 생각도 있었다.

“정말? 운동 신경이 되게 좋나 보네. 나도 운동 잘하는데, 한번 연습해볼까?”

루카의 말에 도현은 대답 없이 웃었다. 루카는 몇 마디 더 하다가, 주디스의 부름에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것도 그런 걸까.’

루카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 깊게 침잠했다.

나답지 않은 감정.

낯선 감각.

이것도 제이 역할을 너무 오래했기 때문일까?

‘그런 거면 좋을 텐데.’

도현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져나갔다.

그날부터, 울렁거림이 계속해서 커져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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