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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05)화 (206/582)

제205화. 마주하는 것 (5)

최선의 대처가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이든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최근, 도현의 기분은 바닥을 기는 상태였다. 한국에 가겠다는 말, 그 간단한 한 문장을 꺼내지 못해서 끙끙 앓으며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알고 싶지 않았던 본심까지 까발려졌다.

머릿속에서 몰아내려고 해도 이미 한번 인지하게 된 것을 알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평소에 관심조차 없었던 사소한 것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과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걸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것, 무슨 행동을 하든 두려움 하나 없이 자신감이 넘치는 부분까지. 이러한 것들이 전과는 다르게 미묘하게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은 달갑지 않다. 하물며 그게 누가 보아도 못나고 추악한 종류라면 더더욱.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어서 자괴감 속에서 허우적댔다.

도현의 머릿속을 알 리 없는 루카는 그에게 사뭇 친근하게 굴며 자주 다가왔는데, 그럴 때마다 도현은 더욱 착잡해졌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 루카가 눈에 보일 때면 꾹꾹 눌러 둔 감정이 자꾸만 고개를 치켜드니, 그를 대하는 게 점점 더 불편해져만 갔다.

어느 순간에는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 루카에게 원망과 짜증이 일어 화들짝 놀라 벽에 이마를 박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진짜 최악이다.’

도현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더욱 실망스러운 건, 이 순간조차도 아무래도 복잡한데 고민거리가 더 늘어났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고 있다는 거였다. 겉모습만 멀쩡할 뿐 속은 완전 진창이었다.

도현이 손바닥에 박았던 얼굴을 들었다. 그러고선 고개를 옅게 좌우로 털어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는 거란 걸 안다.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생각할 거리가 늘길 원하지 않았다.

그냥 고요히, 평온하게 있길 원했다.

나약하고 비겁한 마음이 스스로를 설득했다. 어차피 네 마음은 아무도 모르니까, 계속 그렇게 모른 척 굴자고. 그건 아주 달콤한 선택지였다.

도현에겐 그걸 거절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도현이 선택한 최선의 행동은 문제의 원인을 직면하지 않는 것.

즉, 루카를 피하는 것이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을 피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판단하의 행동이었다. 정말 합리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도현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 * *

근래 들어 심해진 두통 때문에 눈썹 뼈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두통이 생기는데, 그 두통으로 인해서 또다시 스트레스가 쌓이니 악순환뿐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고개가 한 곳에서 멈춰 섰다.

까탈스러운 것처럼 굴면서, 쉴 때면 꼭 늘어진 빨래처럼 소파에 녹아내려 있는 헤레이즈였다. 도현은 걸음을 빠르게 재촉하여 헤레이즈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팔자 좋게 늘어진 채로 눈을 내리뜨고 있던 헤레이즈가 눈알만 굴려 옆에 앉은 상대를 확인했다.

눈이 마주쳤지만, 양쪽 다 별다른 제스처는 없었다. 헤레이즈는 곧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어쩌면 눈을 감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최근, 헤레이즈와 도현의 포지션은 반대가 되었다.

전에는 도현이 있는 곳에 헤레이즈가 맴돌았다면, 요즘에는 헤레이즈가 있는 곳에 도현이 따라다녔다.

헤레이즈는 굳이 도현의 주변을 따라다닐 필요가 없어서 편한 듯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도현이 헤레이즈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간단했다.

헤레이즈만이 도현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루카를 피하기 시작한 이후, 처음 며칠간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그렇지, 생각 없이 겉으로 티를 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촬영장이니만큼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기도 했고.

처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낯선 감정을 대면했을 때라면 모를까. 이미 상황을 파악한 후에 표정을 관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기는 도현이 자신 있는 분야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티가 안 난다고 해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어느 순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주변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주디스였다.

주디스는 이상한 책임감이 생긴 건지, 아니면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자꾸만 루카와 자신을 붙여 놓으려고 했다. 도현이 짐작하기로 저번에 애드리브를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주디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도현의 괴로움만이 증가했다.

브레디나 콜린이라고 괜찮은 건 아니었다. 콜린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꾸만 알고 싶어 했고, 브레디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을 자꾸만 보냈다.

마냥 착하고 얌전하기만 한 줄 알았던 친구의 눈에 미약한 비웃음과 질척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간 걸 본 순간, 도현은 더 이상 브레디를 편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오로지 헤레이즈만이 전과 다름없이 한결같았다. 도현은 누군가의 무관심이 이렇게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병실에 있었을 때는 누군가 관심을 주길 바랐는데.’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다고.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기적 같은 상황 속에 있으면서,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느끼는 자신이 황당하고 어이없었다.

그때 느꼈던 절박한 감정이 가벼웠던 건가 싶어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루카는….

스윽-

눈앞에 보라색 실이 산들거렸다.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해를 등지고 선 루카가 활짝 웃었다.

“여기 있었네!”

털썩!

루카가 도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양손으로 의자를 잡고 다리를 달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곧 흥미를 잃은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도현이 입을 작게 오므렸다가 폈다.

사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주변이 눈치챌 정도로 피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천천히, 조금씩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이건 마치 스트레스성 두통과 상황이 비슷했다.

도현이 루카를 피하기 시작하니, 눈치를 챈 건지 아니면 본능적인 영역에서 느낀 건지 루카는 도현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현은 더 불편해지고…. 도현이 계속 피하니 루카는 더 다가오고…. 다시 불편해지고….

무한의 고리 같은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평소 두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아이들이 무언가를 눈치채는 상황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어서 도현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그때, 옆에서 멍하니 있던 루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경치가 좋아서 여기에 자주 있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건 아니네.”

그렇게 말하던 루카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대며 웃는 얼굴에 도현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꾹 웃음을 눌러 내린 루카가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마고도 이런 구석지고 어두운 곳 좋아하거든. 마고랑 잘 맞겠다, 너.”

“마고?”

“내 동생.”

동생이 있었구나.

새로 알게 된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루카가 덧붙였다.

“종족은 고양이야.”

“…….”

“아하학! 너 지금 표정 진짜 웃겨! 네가 이걸 거울로 봐야 하는데!”

루카가 의자 손잡이를 치며 웃었다. 한참을 시원하게 웃은 후,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아까보단 보기 좋네. 아까는 삼 일 동안 기다렸다가 구매한 초콜릿을 눈앞에서 빼앗긴 얼굴이었거든.”

멈칫.

대체 그게 무슨 얼굴일까 생각하며 뺨을 더듬자, 루카가 도현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지금도 좋지만, 웃으면 더 좋을 텐데.”

아무런 의도도 없다는 듯, 정말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오히려 그 배려 가득한 행동에 도현은 가슴이 꽉 눌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입 안을 살짝 깨물며 괜히 와이셔츠 칼라를 만지작거리던 때였다. 루카가 도현의 무릎 위에 무언가를 툭 떨어트렸다.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그거 먹어. 애들이랑 나눠 먹으려고 가져왔거든. 아, 감독님한테는 들키지 않게 먹어야 해. 간식을 너무 자주 먹으니까 뭐라고 하시더라고.”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춰 소곤소곤 말한 루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현의 옆에서 빈둥빈둥대던 헤레이즈에게도 초콜릿을 내밀었지만, 헤레이즈는 카카오 함량이 몇 퍼센트냐고 묻더니 70% 아래의 초콜릿은 먹지 않는다며 딱 잘라 말했다.

루카는 거절당했다는 것에 별생각이 없는지 ‘아, 그래?’라고 하더니 도현을 쳐다보았다. 손, 하며 말하는 것에 반사적으로 손을 내민 도현은 손바닥에 있던 초콜릿이 두 개로 증식된 것을 보았다.

“헤레이즈는 안 먹는다니까 네가 두 개 먹어. 더 먹고 싶으면 말해. 꽤 많이 가져와서.”

“아…. 고마워.”

“겨우 초콜릿인데 뭘. 난 다른 애들 나눠주러 가볼게. 잘 쉬고 있어!”

제멋대로 온 것처럼 대답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가는 루카였다. 도현은 손바닥에 굴러다니는 초콜릿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봐야 했다.

바스락.

손을 꼼질거리자, 포장지가 마찰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까서 먹을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도현은 계속해서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체온 탓에 초콜릿이 녹아내려 단단한 네모 모양이었던 것이 물렁해진 후에야 아차 하며 손을 뗐다.

뒤늦게 손을 치워봤자 이미 초콜릿은 녹아서 흐물흐물해진 후였다. 포장지를 까면 닥치게 될 참사가 쉽게 예상되었다.

도현은 납작해진 초콜릿을 심란한 눈으로 내려 보았다.

“생각대로 되는 게 없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고민 끝에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선택지를 골랐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오히려 역효과가 생겨났으니까.

루카의 태도는 전과 비교했을 때 명백히 달라졌다. 도현을 더욱 신경 쓰게 된 것이다. 도현의 의도와는 아주 정반대였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두 사람이 자라난 환경과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처음 결정을 내릴 때.

도현은 일방적으로 피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긴 했어도,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면 멀어지리란 사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거리를 둔다면, 도현은 관계가 변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테니까. 누구든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자신을 투영하듯이, 도현도 루카에게 자신을 투영해서 판단한 것이었다.

도현이 이러한 성향을 띠게 된 건 끈기가 없어서도, 관계에 미련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도현의 관계는 언제나 불가피하고 제어 불가능한 상황에서 변화했다.

불완전한 영혼일 때 모두가 그를 싫어했다가, 영혼이 완전해지고 나니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호의와 관심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쉽게 내어졌던 경험은 도현의 뼛속 깊이, 영혼까지 각인되어 버렸다.

도현에게 관계란 그랬다.

언젠가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 영원하리라고 믿고 싶었던 형과의 관계도 결국 그의 희생으로써 변화하고 말았으니,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초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루카는 달랐다.

루카는 언제나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이었다.

관계가 변화한다면 그건 루카의 변심으로 인한 일이었고, 상대의 변화로 인한 일이더라도 그건 루카에게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커다란 세계에서 작은 무언가가 달라지거나 사라진다고 해서 눈에 띌 리가 없으니까.

결국, 루카는 도현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게 애초에 불가능했다. 도현이 예측하기에는 두 사람은 너무 달랐으니까.

그게 도현의 실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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