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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06)화 (207/582)

제206화. 마주하는 것 (6)

도현이 피하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게 ‘자신이 싫어서’라고는 조금도, 추호도 생각하지 않을 뿐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흠집 낼 수 없으리만치 단단한 자기애가 밑바탕 된 판단이기는 하지만, 루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생각한 결과였다.

실제로 자신과 도현 사이에 별다른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생긴 적도 없었을뿐더러, 그 전부터 도현의 상태가 살짝 맛이 가던 중이었으니까.

그러니 루카의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 생긴 것 같은 친구를 혼자 둘 수가 없었다. 힘들 때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군가 함께하는 걸 좋아하는 루카였기에 도현도 그러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평소라면 루카의 생각을 금방 눈치챘을 테지만,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른 전개에 당황해서 허둥지둥대느라 이 사실을 몇 박자 정도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 예상과 달리 움직이는 루카에 당황했던 도현은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다.

둘 다 서로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판단한 결과, 각자의 최선의 행동은 최악으로 이어졌다.

최선의 방법이 언제나 최선의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어, 멀리서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루카를 보았다. 염색물이 조금 빠져 옅어진 보라색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더욱 하얗게 보였다.

도현이 저도 모르게 초콜릿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좋을 텐데.”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바로 옆에 있는 헤레이즈조차 바람 소리라고 느낄 정도로 작고 미약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 목소리가 상대에게 닿지 않았음을 아는데도 심장이 쿡,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 * *

오스카의 옆자리에 앉아 차창을 바라보며 도현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맨날 혼자 고민하고 혼자 상처받고 혼자 예민하게 반응하고….

도현은 자신의 이런 점이 너무 싫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상상만 하며 살았던 탓인지 머릿속에서 생각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늘 홀로 있으니 아무리 생각하고 상상해도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러지 않으면 나를 유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공간을 나온 지금은 그 습관이 독이 되고 있었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데 그것 하나하나에 주석을 달며 생각을 이어가니, 머릿속이 고요할 새가 없는 것이다.

도현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알고 있었다. 얌전하고 차분한 아이. 예의 바르지만 가끔은 낯설 정도로 어른스러운.

실상은 전혀 아니지만.

‘덩어리 님한테 털어 놓… 아니야, 안 돼.’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경고를 했는데 어기고 어리석게 굴면 실망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하나둘씩 기대다 보면 멈추지 못하게 될 테니까.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순간 메리가 떠올랐지만, 이내 한숨과 함께 역시나 선택지에서 사라졌다. 메리와 나눈 이야기는 언제, 어떻게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게 될지 몰랐다. 그래서 도현은 부모님이 알아도 상관없을 문제들만 메리에게 상담했다.

그러면 친구들은….

‘안 되지.’

답은 고민할 새도 없이 빨리 나왔다.

친구한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친구들한테 말하라니. 얼마나 못나 보일까 생각하니 상상조차 하기가 싫었다. 자존심을 세우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에 가까웠다.

선택지를 하나씩 삭제하다 보니 남는 게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기분만 더 우울해졌다.

그사이, 집까지 도착한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도현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오스카도 내리니, 집 문이 열리며 서혜나와 이장혁이 나왔다.

세 사람이 인사를 나눴다. 이장혁이 미국에 있는 동안 오스카는 도현의 가족과 두어 번 정도 같이 식사했는데, 그래서 꽤 친근감이 쌓인 상태였다.

“이번 주에 가신다고 했죠?”

멈칫.

도현이 눈을 굴려,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장혁이 하하, 웃으며 토요일에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쉽다고 말하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도현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린 오스카가 웃었다.

“집에서 부모님이랑 잘 쉬고. 내일 다시 데리러 올게.”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도현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인 오스카가 서혜나와 이장혁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차를 몰고 사라졌다.

“오늘도 수고했어.”

이장혁이 도현의 어깨를 감싸서 집 안으로 들이며 말했다. 서혜나는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때.

도현의 발이 우뚝, 멈췄다. 갑자기 안에 들어가다 말고 멈춰 서자 이장혁이 차에 뭐 놓고 내린 물건이라도 있냐고 물었지만, 도현이 입 밖에 낸 건 대답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

“응, 왜? 정말 놓고 온 거면 오스카한테 연락을,”

“저 할 말 있어요.”

“할 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문 두 사람이 도현을 응시했다. 도현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

“저….”

“아! 세상에, 지금 피자 구워놨지. 도현아, 일단 저녁부터 먹을래? 식으면 맛이 없거든.”

“…….”

지금 피자가 중요한 게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도현은 서혜나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갔다.

식탁에 앉자, 정말 서혜나의 말대로 갓 구워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자가 보였다. 방금 막 오븐에서 꺼내서 그런지 치즈가 쭈욱 늘어났다.

“너 올 시간 맞춰서 구워놨거든. 네가 좋아하는 파인애플도 올렸어.”

“어….”

“당신 먹을 조각에는 안 올렸어.”

“오!”

이장혁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장혁은 과일을 구워 먹는다는 발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로, 파인애플 피자를 끔찍이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이장혁의 반응에 서혜나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다가, 도현의 접시 위로 피자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치즈 굳기 전에 얼른 먹어. 지금이 제일 맛있을 때야. 아, 뜨거우니까 데지 않게 조심하고!”

“…잘 먹겠습니다.”

도현이 피자를 한 입 물며 생각했다.

그래, 엄마가 정성 들여 만든 피자인데. 기껏 만든 걸 다 굳은 뒤에 먹는다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도현은 일단 피자를 먹고 말하기로 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도현은 식탁 위를 응시했다. 빈 접시만 가득한 식탁에 도현은 진짜로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저, 엄마, 아빠.”

“아, 맞다! 새로운 코코아 하나 사다 놨는데. 마트 갔더니 못 본 브랜드가 있더라고. 그거 한번 먹어볼래?”

“…네.”

그래. 아빠가 기껏 날 생각해서 마트에서 코코아를 사 왔는데 안 먹겠다고 하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도현은 일단 코코아를 마시고 말하기로 했다.

코코아는 맛있었다. 도현이 평소에 즐겨 마시던 코코아에는 작은 마시멜로가 여러 개 들어가 있었는데 이건 커다란 마시멜로우를 집어넣어서 먹는 거라 독특하기도 했다. 도현이 홀짝홀짝 잘 마시는 것에 이장혁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어느새 코코아 잔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탁.

유리와 잔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도현이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가져갔다. 그 움직임에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사람의 눈이 도현에게로 향했다.

“다 마셨어?”

“네.”

도현은 엄마 아빠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저 두 분께 할 말이 있어요.”

“두 분이라니. 너무 딱딱하다….”

“아.”

약간 상처 입은 듯한 이장혁에 도현이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가 덧붙였다.

“엄마 아빠한테요.”

일단 말을 정정한 후, 도현이 굳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더 이상 주제에서 벗어난 대화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눈빛이었다.

“저 있잖아요….”

“도현아.”

나직한 부름이었다. 아까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에 도현은 말하려던 것도 잊고 입을 다물었다. 서혜나가 찻잔을 매만지던 손을 떼고는, 도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뭐지?’

심상치 않은 기색에 도현이 뻣뻣하게 굳었다. 부모님이 이런 분위기로 도현을 응시한 적이 없던 탓도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떠오를 때였다.

서혜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괜찮아.”

아주 다정한 눈동자였다.

도현은 제가 들은 말이 이해되지 않아 그저 눈만 깜빡였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

도현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평소의 침착함을 잃은 아들의 모습을 두 사람은 차분히 바라보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언제나 이토록 아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항상 무엇을 더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피고 있는데.

도현이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 그게 우리 가족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 하지만 말하길 두려워한다는 것.

사실, 도현이 말을 꺼내려고 했던 거의 모든 순간, 두 사람은 눈치채고 있었다.

알면서도 도현을 재촉하지도, 그렇다고 안다는 티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평소처럼 도현을 대했다. 사실, 오히려 몇 번은 지금처럼 방해했다.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표정이 어두워서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랬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뭐 때문에 그렇게 망설이는 건지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게 이토록 도현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면….

“엄마 아빠는 안 들어도 돼.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야.

도현이 곧바로 부정했다. 부정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뭘 안다고 그래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내가 어떻게 낸 용기이고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괜찮아.”

모르니까 그런 거다.

몰라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안다면 이토록 태연하게, 정말 괜찮다는 듯이 굴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는 걸 아는데도 도현은 저 말에 자꾸만 기대고 싶어졌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지난다면 더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예지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말할 거라면 지금 해야 한다고, 겁쟁이가 간신히 용기를 낸 순간은 지금뿐일 거라고.

그런데….

“자, 코코아도 다 마셨으니까 이제 올라가서 씻고 잘래? 내일도 촬영 있으니까 일찍 자야지. 너무 늦게 자면 내일 피곤하잖아. 따뜻한 코코아도 마셨으니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거야.”

“…네.”

그런데 정말 지금 잠이 든다면 기분 좋게 잠들 것만 같아서 도현은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 * *

…바보다.

진짜 바보다.

세상에 이렇게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또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도현이 겉으로는 절대 티가 나지 않는 고요한 낯으로 자학했다.

“도현! 이리 와봐.”

“네, 감독님.”

도현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곤 벌떡 일어섰다. 쪼르르 달려온 도현에게 스티브 로이 감독이 입을 열었다.

“수정된 대본은 확인했지?”

“아, 네.”

며칠 전.

도현은 새로운 대본을 받았다. 촬영 도중에 대본이 수정되는 일은 꽤 자주 일어난다는데, 도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었다.

바뀐 부분은 그다지 크진 않았다. 하지만 수정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서 임팩트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늘 그 부분 촬영할 건데,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

“아니요, 괜찮아요.”

“혹시 찍다가 헷갈리면 말하고.”

수정된 대본이니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한 말이었다. 물론, 도현이 정말로 헷갈려할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솔직히 이런 장면을 넣으면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 싶어서 꽤 여러 번 고민했다. 그러다가 뚜렷한 장점이 있는데 그걸 썩히는 것도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닌 거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분위기는 처음 의도했던 것과 같으면서 조금 다르게 찍히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눈앞에 있는 소년이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도, 스크린에서 봤을 때 존재감이 장난이 아니란 것도 이미 다 알고 캐스팅한 건데 직접 본 도현은 더했다.

제이가 등장하는 장면일 때면 유독 제이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제이가 등장하는 부분의 분량이 조금씩 늘어났다.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제이의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관객들에게 제이를 눈도장 찍을 만한 장면이 하나쯤 들어가도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다.

이게 무슨 하이틴 로맨스 영화인 줄 아냐면서 반대했던 제작사와 투자자도 촬영본을 확인하더니 나쁘지 않을 거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브 로이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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