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07)화 (208/582)

제207화. 마주하는 것 (7)

낡고 어지러운 밴드부실 안.

바닥에 빙 둘러앉은 아이들을 보던 캐시가 말했다.

“일단 공연할 장소는 구했어.”

산타 모니카 아카데미는 동아리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한곳에 모여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각 부스를 운영하는 식으로 돌아갔다.

도서부는 도서관에서 추천 도서 및 독후감 전시를, 천체 관측부는 관측한 천체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을 라운지에 전시하는 등 다양했다.

밴드부는 넓은 무대가 있는 강당을 빌렸다. 장소는 오케스트라부를 비롯한 다른 공연을 하는 동아리와 동일하지만, 시간대가 달랐다.

한 팀의 공연이 끝났을 때 바로 이어서 공연하기보다는 최소 30분에서 최대 1시간 정도 텀을 두었다. 때문에 강당에 오는 이들은 특정 동아리의 공연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발걸음을 했다.

부잣집 자제들만 모아놓고 엘리트 교육을 하는 명문 사립학교답게, 각 동아리의 경쟁을 부추겨 서로를 라이벌 삼아 발전하라는 의도였다.

“작년에 가장 관객이 많았던 동아리가 어디지?”

“오케스트라부야.”

아니사의 대답에 캐시가 인상을 구겼다. 아니사가 안경을 짧게 추켜올리더니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오케스트라부는 워낙 유명하다 보니 언제나 관객이 많았어. 하지만 밴드부는 이번에 새로 만들어졌으니까, 다들 잘 모를 거야.”

“관건은 관객 확보라는 소리군….”

어느새 밴드부에 완전히 스며들다 못해 진심이 되어버린 제이가 진지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조지가 공을 품에 안고선 어루만지고 있다가 고개를 슬쩍 들더니 끼어들었다.

“구경하러 오게 하려면 우리가 이런 공연을 할 거란 걸 알려야 하잖아?”

“호, 홍보 말하는 거지?”

엘비가 용기 내어 말하자, 캐시가 손뼉을 세게 마주쳤다. 두 눈에는 깨달음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홍보!”

홍보를 해야겠다며,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보자는 캐시의 말에 제이가 손을 들었다.

아까 조지가 손을 들고 말하길래 따라 한 것이었다. 의도대로 시선이 제게 쏠리자, 제이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홍보해도 관객 확보는 쉽지 않을 거야.”

“뭐? 왜?”

“그야, 당연하잖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들에 제이가 되레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데이터는 나름의 쓸모가 있지. 지난번에 하이, 아니, 캐시 와일드가 밴드부원을 모집하기 위해 홍보를 했을 때를 생각해봐. 그때 관심을 보인 건 고작 5퍼센트의 학생들뿐이었고 남은 30퍼센트는 불편함을 호소하며 회피, 55퍼센트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회피….”

“그건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캐시가 무서웠던 게 아닐까?”

“…오,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야.”

아이들의 시선이 캐시에게로 향하자,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캐시가 ‘뭐, 어쩌라고’라는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그 눈빛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기 때문에 다들 얌전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관심을 끌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사실 오케스트라부는 별로 홍보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작년에는 마테오가 홍보지를 돌려서 여자애들이 많이 왔었어.”

캐시의 눈썹이 모이며 산 모양을 그렸다. 마테오가 홍보지를 돌렸다는 말과 여자애들이 많이 왔다는 말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캐시가 인과관계 파악을 위해 뇌를 굴렸지만, 여전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의문이 가득한 얼굴에 잠시 떨떠름한 낯을 하던 아니사가 덧붙였다.

“재수 없지만 잘생겼잖아.”

“아, 맞아. 걔가 우리 학년에서 제일 인기 많아. 인기투표에서 매번 일등 하던데.”

“뭐? 우웩.”

매 학기마다 산타 모니카 아카데미 학생들은 게시판에 ‘가장 훌륭한 학생’이라는 주제로 투표를 진행했다.

본래 의도는 가장 모범적으로 학교생활을 한 학생을 뽑는 거지만, 실상은 인기투표에 가까웠다.

추천을 받은 학생의 사진을 게시판에 걸면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인데, 조지의 말에 따르면 마테오는 이번 년에 두 학기 모두 ‘가장 훌륭한 학생’으로 뽑혔다고 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돼. 다들 눈이 발바닥에 달린 거야?”

작년에 마테오를 뽑았던 엘비가 캐시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떫은 표정을 한 캐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대뜸 팔짱을 꼈다.

그러고선 새파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아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캐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다들 눈이 발바닥에 달린 거 같으니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반사적으로 웃음을 터트린 조지가 즐겁게 웃더니, 공을 끌어안으며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내가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인기 많은 편은 아닌걸.”

“나, 난 안 돼…!”

도리도리도리!

엘비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홍보지를 나눠주라고 시키면 그대로 기절할 거 같은 낯이었다.

캐시의 시선이 자연히 제이에게로 향했다.

“?”

멀뚱한 얼굴의 제이가 캐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캐시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마치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했다.

“너…, 안경 한번….”

말을 하던 캐시가 도중에 멈추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표정을 누그러트리더니 살래살래 손을 저었다.

“됐다, 내가 무슨 생각을…?”

“…어, 안경 벗어보라는 줄 알고 벗었는데… 다시 쓸까?”

한 손으로 안경을 든 제이가 머리카락이 눈을 찌르는지 미약하게 눈매를 찡그리더니, 안경을 들지 않은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잘 깎은 석상처럼 반듯한 이마가 슬쩍 드러났다가 도로 가려졌다.

차양처럼 드리워졌던 속눈썹이 눈의 움직임에 따라 위로 올라갔다. 그 아래에, 두꺼운 안경 너머로 늘 흐릿하게 보였던 검은 눈동자가 훤히 드러났다.

해변가에 살아서 조금은 탄 밀색의 피부, 뺨과 눈가에 뿌려져 있는 주근깨가 액세서리라도 되는 것처럼 소년과 잘 어울렸다.

심지어 볼 때마다 거슬리던 더벅머리조차도 어디 패션 잡지 촬영을 위해 일부러 독특하게 스타일링한 것처럼 과감하고 도전적인 스타일로 느껴졌다.

‘너드’가 ‘너드미’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Oh my god….”

누군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 없는 캐시의 행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머리를 한번 긁은 제이가 도로 안경을 썼다.

검은 눈동자가 다시 두꺼운 안경 뒤로 가려지고 어딘가 후광이라도 비춘 것처럼 반짝거리던 건 사라졌지만, 아이들의 눈은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매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 * *

“오올….”

“이야….”

“우와….”

차례대로 루카, 콜린, 브레디였다. 루카가 음흉하게 웃으며 팔꿈치로 도현의 팔을 툭툭 쳤다.

도현의 눈동자가 잠시 방황했다.

현재, 그들은 방금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하는 중이었다. 도현이 안경을 벗는 장면이 나오자마자 아이들은 제각기 이상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화면 속에서 도현이 멀뚱한 낯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찍은 건지, 효과를 넣지도 않았는데 그 주변만 화사했다. 아마 조명인 거 같은데….

문제는.

“아이고, 진짜 잘생겼다니까? 이 장면 추가하길 잘했지.”

스티브 로이 감독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도현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궜다. 귀는 미약하게 붉어져 있었다.

도현은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고 듣는 게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이 꽤 그럴듯한 외양을 갖추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솔직히 스스로 보기엔 속눈썹이 좀 길어서 눈에 띄는 것 빼고는 평범한 것 같아서 별로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평소에 진이 주접을 떠는 것도 부끄러운데, 이런 장면을 촬영하자니 낯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촬영할 때야 연기에 집중한 상태니 아무런 생각이 안 든다고 해도 이렇게 다 같이 촬영본을 확인하니 정말 숨고 싶어졌다.

도현의 고통과는 별개로 스티브 로이는 다시 한번 해당 부분을 반복해서 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어울리면 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일단 수정된 대본이 통과되기는 했다고 해도, 언제든지 다시 수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넣은 장면이고 캐릭터 특성을 변경하는 부분이다 보니 해당 장면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해치면 삭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촬영한 것을 확인해 보니 꽤 괜찮았다.

눈치가 없는 제이 로빈을 표현한 도현의 연기가 과하지 않고 적당해서 오글거리는 느낌 없이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고.

가족 영화이자 음악 영화에 갑자기 하이틴 로맨스 클리셰 같은 설정이 등장한 게 상당히 엉뚱하게 느껴졌는데 그게 또 제이 로빈과 잘 어울렸다.

워낙에 독특한 캐릭터성을 구축했다 보니 그것마저도 하나의 캐릭터성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잠깐의 분위기 전환.

그리고 무엇보다, 화제성.

은 상업 영화였다. 영화의 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화제성을 끌어모을 수 있는 부분이라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마땅했다.

도현은 몇 달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로 화제가 되기도 했고 인기 시트콤에 등장한 이후로 ‘에이미 남자친구’로 인기몰이를 했다.

짧은 장면 하나 집어넣어서 관객에게 반응이 온다면 남는 장사였다.

“좋아. 이거 쓰자.”

스티브 로이가 시원하게 결정했다.

* * *

한창 바쁜 세트장에서 조금 떨어져 대본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옆에 섰다. 뭔가 말이 들릴 줄 알았는데 주저하는 모양새에 도현이 대본에 고정했던 시선을 돌렸다.

“그으…, 바빠?”

“아니. 그냥 대본 읽고 있었어. 왜?”

도현은 브레디를 보며, 그와 단둘이 대화를 나눈 게 며칠 전인지 떠올렸다. 그의 꺼림칙한 눈빛을 본 후로 도현은 주로 혼자 있거나, 헤레이즈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브레디와 말을 할 일이 없었다.

사실 혼자 있을 때는 자꾸 다가와 말을 걸려고 하길래 헤레이즈와 더 자주 붙어 있는 감도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브레디는 헤레이즈와 있을 때면 다가오는 법이 없었다.

“너 루카랑 화해한 거야?”

“뭐?”

맥락 없이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본이 살짝 구겨진 것에 혀를 한번 찬 도현이 손가락에 힘을 풀며 브레디를 응시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 아니… 아까 둘이 전처럼 대화 나누길래 화해했나 해서….”

조금 수그러든 브레디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까라면, 모니터링을 할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정신이 없어서 루카가 친근하게 구는 것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더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당황스러웠지만.

도현이 눈 끝을 찡그렸다가 말했다.

“나 루카랑 싸운 적 없어.”

“거, 거짓말은 안 해도 돼.”

“내가 그런 거짓말을 왜 해?”

도현이 기가 차다는 듯 숨을 토해냈다.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고, 그 상대가 브레디이니 더 불편했다.

“뭐? 하지만 분명….”

“그냥 요즘 혼자 있는 게 편해서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오해를 한 것 같네.”

도현이 태연하게 말하자 브레디는 정말인가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다.

최근에 루카뿐만 아니라 그와도 별로 대화를 하지 않았으니 믿지 않기 어려울 터였다.

결국 브레디는 도현의 말이 진실이라고 판단했는지 잠시 눈을 깜빡이다 짧은 탄식을 흘렸다. 그러곤 멋쩍은 얼굴로 목 뒤를 긁었다.

“미안, 진짜 내가 오해했나 봐. 난 둘이 싸운 줄 알았거든.”

“…괜찮아.”

“으응, 그럼 난 자리 비켜줄게!”

아까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말한 걸 기억했는지 브레디가 순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도현은 다시 대본을 보았다가, 돌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시야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주디스와 콜린, 그리고 브레디가 보였다.

어쩐지 저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기분을 모르면 좋겠다.

순간적으로 브레디의 눈에 스쳐 지나갔던 실망감을 읽었던 도현이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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