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08)화 (209/582)

제208화. 마주하는 것 (8)

“여기에서 좀 더 강한 어조로 말해도 좋을 거 같은데.”

“이렇게?”

헤레이즈가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목을 한번 풀더니 대사를 씹듯이 내뱉었다. 아까보다 좀 더 강세가 들어간 대사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나은 것 같긴 하네.”

헤레이즈가 별다른 말 없이 수긍했다. 두 사람은 짧게 대화를 나눈 후 곧 각자의 대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음 장면을 위해 대본을 확인하던 헤레이즈가 옆에서 조용히 대본을 눈에 담고 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흰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사각,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헤레이즈의 표정이 편안하게 풀렸다. 따뜻한 난롯가에서 몸을 웅크린 작은 동물처럼 예민해 보이는 낯이 부드러워졌다.

역시 조용하고 거슬리는 냄새도 안 나서 좋아.

헤레이즈는 조금 유별나리만치 예민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스스로 인정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일부러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이 헤레이즈에게는 참을 수 없는 요소로 다가왔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은 거부감이 일어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었다. 비린내가 나는 해물류가 그랬고, 잡내 나는 고기가 그랬다. 그 외에도 조금이라도 물컹거리거나, 덜 신선하면 헛구역질이 났다.

더럽고 지저분한 것도 싫어했다. 먼지가 내려앉은 공간에 있으면 저절로 재채기가 났고, 온몸이 가려워지는 기분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예민한 성정 탓인지 후각도 남들보다 민감한 편이라,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냄새가 있으면 단순히 ‘싫다’를 넘어서 속이 울렁거리고 멀미가 일었다.

처음, 촬영장에 갈 때 몰래 마스크를 챙기려 했지만 부모님한테 딱 걸리고 말았다. 부모님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헤레이즈를 부드러이 달랬다.

-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힘들겠지만 참을 줄도 알아야 해.

그럴 바엔 그냥 안 어울리는 게 나은데. 헤레이즈는 치고 올라오려는 말을 애써 삼켰다. 연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건너야 할 관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만을 눌러 내린 채 촬영장에 도착했다. 제발 촬영장이 깨끗하고 환기가 잘 되는 곳이길 바라면서.

그리고 루카 하퍼를 봤다.

좋은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과 깨끗한 피부, 그리고 손톱 밑에 때가 낀 채 돌아다니는 또래들과 달리 손끝까지 깔끔하게 관리된 모습. 거기다가 활기차기는 했지만 방정맞을 정도로 말이 많지도 않았다.

헤레이즈는 루카가 마음에 쏙 들었다.

친해지고 싶었다. 영화의 주연이라는 것까지 마음에 들었다. 얘라면 가까이 있어도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루카는 자꾸 다른 애의 이야기만 꺼냈다.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헤레이즈는 워낙에 까다로운 탓에 곁에 두는 사람이 몇 없었다. 그런 힘든 기준을 통과한 건데, 막상 루카는 헤레이즈가 가진 호감의 반조차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았다.

서운한 감정은 애꿎은 곳으로 튀었다. 얼마나 잘났길래 그래. 얼굴도 본 적 없는 애의 정보가 쌓여가는 동시에, 헤레이즈의 반발심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막상 이야기의 주인공을 보았을 때는-

‘뭐야. 왜 이렇게 음침해.’

지저분한 머리카락과 저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인 안경까지. 헤레이즈의 입장에서는 최악인 첫인상이었다. 안경 너머로 드러난 얼굴이 예상외로 깨끗하고 반듯해서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인상이 한번 변화한 건, 헤레이즈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머리카락이 배역을 위한 거란 걸 알게 된 후였다.

그날, ‘관리 안 하는 것 같은 애’에서 ‘그렇게까지 더럽진 않나 보네.’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다음은 촬영 도중 휴식 시간이 주어졌을 때였다.

헤레이즈는 쉴 곳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백금발이 고갯짓을 따라 여리게 흔들렸다.

스태프들이 많은 곳은 땀 냄새가 나서 싫었다. 무거운 장비를 옮기고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다 보니 땀이 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땀 냄새뿐이면 몰라, 어른들은 종종 향수를 뿌리는데 후각이 예민한 헤레이즈에게는 고통이었다.

헤레이즈의 시선이 이동했다. 이내,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에게로 닿았다. 콜린과 주디스가 제일 눈에 띄었다.

‘쟤네는 너무 시끄러워.’

헤레이즈도 떠드는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쉴 틈 없이 떠드는 건 귀가 아팠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번에 콜린이 크게 웃다가 그에게 침을 튀긴 적이 있었는데, 헤레이즈는 기겁을 하며 뒤로 파드득 물러났었다. 그 후로는 말을 할 때 가까이 가기가 꺼려졌다.

한쪽에서 쉬는 건지, 눈치를 보는 건지 모를 브레디도 있었지만 썩 끌리진 않았다. 브레디는 이름처럼 빵을 좋아하는지 가끔 빵 냄새가 날 때가 있었는데, 헤레이즈는 빵 냄새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사람에게서 나는 빵 냄새는 싫었다. 음식 냄새가 몸에 묻어난다는 게 그냥 기분이 나빴다.

루카는 콜린이랑 주디스 사이에 있으니 제외하고… 그때 헤레이즈의 눈에 띈 건 한쪽 의자에 앉아서 쉬던 도현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과 어느 정도 거리도 떨어져 있고, 그리고 지금까지 본 것으로 봐서 말이 많은 성격도 아니고… 딱이다! 헤레이즈의 눈이 밝게 빛났다.

털썩!

그대로 헤레이즈는 도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역시나, 헤레이즈의 예상대로 도현은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덕분에 헤레이즈는 편하게 마음껏 쉴 수 있었다.

그 후로 쉴 곳이 필요하면 자동반사적으로 도현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그렇게 도현의 옆에서 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헤레이즈는 그가 꽤 괜찮다는 사실을 하나둘씩 깨달았다.

머리카락의 기장이 길어서 얼핏 지저분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늘 깔끔한 상태를 유지했고, 대본을 넘길 때 종종 본 손가락은 항상 깨끗하고 희었다. 그리고 땀을 잘 흘리는 편이 아닌지, 언제나 상쾌한 향기가 났다.

심지어 숨소리마저 작고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단정하니, 헤레이즈는 거의 뭐 운명의 단짝을 만난 기분이었다. 헤레이즈는 몰려오는 감동에 작게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으로 세리머니를 했다.

운명을 느꼈다고 하나, 도현과 가까워질 생각은 없었다. 지금 상태로 딱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름 방학이 지나면 다시 볼 일이 없을 얼굴이기도 했고.

물론 가끔가다 학교에 보쌈해 가서 옆자리에 앉혀 놓고 싶다는 충동이 일긴 했지만, 헤레이즈는 지극히 정상이었음으로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제가 향기 나는 인형쯤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도현이 여상한 낯으로 대본을 다시 한번 넘겼다. 검은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움직이며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잠시 그 표정을 관찰하고 있던 헤레이즈가 잠자코 입을 열었다.

“너.”

가만히 대본을 응시하던 두 눈동자가 들어 올려졌다. 두 눈에 담긴 건 가벼운 의문이었다.

헤레이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으로 돌아간 거 같네.”

뜬금없는 말에도 도현은 의아해하지 않았다. 되레 헤레이즈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에 놀란 눈치였다.

뭐, 나는 아예 모르고 있을 줄 알았나?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을 거라고 여긴 건가? 내가 그렇게까지 개인주의는 아닌데. 물론 관심 없는 건 사실이지만….

어? 그러면 개인주의 맞나?

헤레이즈가 속으로 헛생각을 하는 사이, 도현의 검은 눈동자가 느슨하게 도륵, 굴러 대본을 한번 봤다가 다시 헤레이즈를 응시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처럼 조용히 있다가, 곧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이즈도 딱히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말한 건 아니라서 고개를 마주 끄덕인 후 다시 대본을 펼쳤다.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은데 굳이 캐물을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그런 헤레이즈의 얼굴 위로 잠시 시선이 머물다가 곧 떨어졌다.

도현은 대본에서 눈을 떼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걸쳤다. 두 눈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잠잠했다.

며칠 전.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예감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정말로 말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면 초조하고 불안해할 이유가 없으니까. 결과를 예상했기에 그토록 압박을 받은 것이다. 머리가 아파올 만큼이나. 일이 벌어지고 나니 이토록 선명하게 보였다.

도현은 아빠가 떠났을 당시를 떠올렸다.

아빠가 비행기에 탑승하고, 공항에 엄마와 둘이 남은 도현은 허탈한 심정에 입매를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피곤한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를 때, 서혜나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한 곳을 가리켰다.

- 저기, 아빠가 탄 비행기 뜬다. 보여, 도현아?

이륙 중인 비행기를 보는 도현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복잡 미묘했다.

도현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서혜나는 ‘손 흔들자, 손!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하며 제 손을 열심히 흔들어 댔다. 도현은 어지러운 심정을 눌러놓은 채 서혜나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위치상, 아빠가 탄 곳에서 보일 리 없건만 이 의미 없는 행위가 서혜나는 즐거웠던 모양인지 웃음소리를 흘렸다. 엄마가 즐거워한다면 못 할 것도 없어서 도현은 비행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엄마와 함께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한참을 흔들었을까.

- 이제 집에 돌아가자.

서혜나가 손을 내리고 상쾌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쳐다보는 얼굴에 도현이 대답했다.

- 네. 집에 가요.

차에 올라타는 서혜나를 따라 조수석에 타면서, 도현은 깨달았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상황이 닥치기 전까진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저조했는데, 막상 닥치고 나니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그냥 ‘아,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도현은 조금 복잡한 것 빼고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와서,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촬영장에 와서 연기했다.

그리하여 지금이었다.

도현은 헤레이즈의 말에, 뒤늦게 미루어 두었던 상황 분석을 시작했다. 헤레이즈는 생각에 빠진 도현을 가만히 두는 편이라서 도현을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주디스가 몰래 다가와 헤레이즈를 툭툭 치는 것도, 주디스와 도현을 번갈아 보던 헤레이즈가 그 뒤를 따라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도현은 실패의 원인부터 분석했다.

가장 큰 원인이야, 결정을 내려놓고서는 실행은 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겁쟁이인 자신에게 있겠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오롯이 자신의 탓만은 아니었다.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탓에 알아채는 게 늦었는데, 도현이 그 수많은 시도에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건 부모님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

왜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하려고 할 때마다 타이밍 좋게 화제를 바꿨으니까.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걸 보면 여유가 없긴 없었구나 싶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말하고자 했다면 말할 수 있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 상황의 원인이 오롯이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게 자꾸만 어떠한 위안이 되어 다가왔다.

‘합리화하는 게 버릇이 되면 안 되는데.’

도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두려워했던 거만큼 상황이 나쁘진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과장해서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꽤나 태평했다.

역시나, 그동안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건 무의식중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놓고 있었던 거 같았다. 뭐 간간이 치고 올라오는 자괴감이나 자기혐오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야 도현에게는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반응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앞으로를 생각해야 해.’

이미 지나간 일이다. 붙잡고 있어봤자 해결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애초에 처음부터 여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것부터가 문제였을 수도 있어.’

다 같이 얼굴을 보고 있을 때 말하는 게 제일 좋기야 하겠지만,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엄마는 같이 사니 매일 얼굴을 봤고, 아빠는 매일, 혹은 이틀에 한 번씩 통화하니까 말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었다.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모든 게 망해버린 것처럼 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일단, 촬영부터 마치고 생각하자.

도현은 또다시 마주하기보다는 좀 더 쉬운 선택지를 골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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