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09)화 (210/582)

제209화. 마주하는 것 (9)

“도현! 이리 와볼래?”

때마침 스태프가 도현을 불렀다. 도현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부르는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 앉아봐. 일단 머리부터 손질하자.”

도현이 다시 메이크업을 받는 이유는, 다음에 촬영할 장면 때문이었다. 머리 위로 드라이기와 고데기가 몇 번 지나가더니, 이내 뒤로 시원하게 넘겨졌다.

“이거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리는데? 웃긴 게 아니라 귀여워.”

스태프의 말에 도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구불구불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이 머리띠로 인해서 시원하게 뒤로 까져 있었다. 머리띠에는 노란색과 분홍색의 플라스틱 하트가 번갈아 가며 달려 있었는데, 스태프의 말대로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빼내며 적당한 볼륨감을 넣은 후, 얼굴에도 메이크업이 들어갔다. 희고 깨끗한 피부를 좀 더 어둡게 만들고. 눈가와 뺨에 주근깨를 찍고. 손이 슥슥 움직일 때마다 인상이 휙휙 바뀌어 갔다.

그때, 한 스태프가 소품을 가져왔다. 도현은 그가 건네는 대로 목에 플래카드를 걸었다.

도현은 여기서부터 불안함을 느꼈다.

잠시 후.

목에 해골 모양 목걸이가 달리고 손가락에는 하트 모양 반지가 끼워졌을 때, 도현은 인정했다.

대본에 ‘괴짜 같은 차림새를 한’이라는 지문이 있긴 했지만, 기껏해야 캐시 와일드 정도의 차림새를 생각했지 이토록 인지 부조화가 오는 차림새를 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캐시는 일관성이라도 있지. 이건….

“자, 마지막으로 포스터! 이건 들고 있기 힘드니까 촬영 들어갈 때 들어.”

“…네.”

도현은 토끼로 추정되지만 뭔지 모르게 불량해 보이는 토끼가 잔뜩 그려진 포스터를 잠자코 보다가, 얌전히 대답했다.

찰칵! 찰칵!

“?”

갑작스레 들린 카메라 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문 아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소년의 낯이 대번에 떨떠름해졌다.

“…….”

“여기 좀 봐봐! 으학! 나랑 사진 찍자! 치즈-”

“나도! 나도!”

루카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헤레이즈도 아닌 척 가까이 오더니, 사진을 하나 찍어 갔다. 핸드폰을 보는 얼굴에 떠오른 웃음은 분명히 비웃음이었다.

도현이 떫은 눈초리로 헤레이즈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핸드폰을 닫았다. 뭐지. 도현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찰칵!

그때, 카메라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사진 찍기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뒤늦게 울리는 카메라 소리에 도현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잠시 침묵하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오스카?”

“어? 하하, 부모님한테 보내드리면 좋아할 거 같아서….”

당황한 듯 슬쩍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시선을 마주친 오스카가 이내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속셈인지 어색하게 웃었다. 도현이 대답 없이 쳐다보자 웃음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싫어? 싫으면 안 보낼게.”

“아니요…. 괜찮아요.”

그 대답에 오스카의 표정이 도로 밝아졌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사진이 흔들렸다며 새로 몇 장 더 찍어 갔다. 그런 오스카를 도현은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빈말이 아니라 도현은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은 좀 그렇긴 해도…. 어차피 배역을 위한 분장인데 부끄러워한다는 게 도현의 입장에서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와 별개로 거울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볼 때마다 인지 부조화가 오는 기분인걸.’

아무튼, 오래 눈에 담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도현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스티브 감독의 앞까지 달려간 루카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감독님! 저 이거 제 계정에 올려도 돼요?”

“응? 어디 한번 봐봐… 하하! 귀엽게 잘 나왔네. 그래, 올리고 싶으면 올려도 돼.”

내 의견은…?

도현이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행히 도현을 잊지는 않았는지 루카가 도현에게로 달려오며 물었다.

“도현! 이거 사진 올려도 돼?”

기대감 어린 눈이 도현을 향했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는 날이 맑은 날 펼쳐진 바다처럼 쨍한 색감이었지만, 도현은 그 눈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고 미묘하게 시선을 흘렸다.

루카가 도현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처럼 고개를 기울이자, 도현은 그냥 이 순간을 빨리 넘기고 싶은 마음에 루카가 보여주는 사진도 본 둥 만 둥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성의 없는 태도에도 마냥 좋은지, 루카가 신난 얼굴로 핸드폰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올렸다! 이따 확인해 봐! 너도 계정이 있었으면 태그했을 텐데. 계정 만들 생각은 없어?”

“응, 나중에 확인할게. 계정은 생각 없어.”

여전히 도현은 계정을 만들지 않은 상태였다. 오스카가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권유하기는 했지만, 도현은 썩 끌리지 않았다.

형도 따로 계정을 운영하지 않기도 했고. 거기다 일상을 공유하는 거라는데, 자신의 일상을 굳이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도현의 대답에 루카는 아쉬워하더니 나중에 만들게 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도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티 나지 않게 자리를 피했다.

아니, 어쩌면 조금 티가 났을 수도 있겠다. 너무 조급하게 움직였나 싶어 슬쩍 뒤를 돌아보자 금세 다른 아이들과 떠들며 노는 루카가 보여,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문제를 미뤄두기로 해서 전보다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루카를 마주할 때 불편한 건 여전했다. 이미 도현의 마음속에서 두 사건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오 분 뒤에 촬영 시작합니다!”

“아.”

도현은 정신을 차리고선, 한쪽에 놓인 포스터 뭉치를 들었다. 그러다가 포스터에 그려진 토끼와 눈을 마주쳤다.

…일단 뒤집어서 들고 있기로 했다.

* * *

복작복작한 복도.

아이들이 각각 보호자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도현은 어지러움을 꾹 참았다.

“잠깐, 실례합니다. 이거….”

시야보다 한참 아래.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학부모는 시선을 내리고서야 도현을 발견했다. 그러고선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분홍색과 노란색 하트가 잔뜩 달린 머리띠로 앞머리를 시원하게 까고선, 목에는 ‘Rock&Roll’이라고 새빨갛게 써진 플래카드를 메고는, 불량해 보이는 토끼가 잔뜩 그려진 포스터를 내미는 소년은 부조화 그 자체였다.

한쪽에서 촬영 장면을 보고 있던 오스카가 소리 없이 숨죽여 웃었다.

겉으로 불만을 표시한 건 아니지만, 거울을 기피하는 걸로 봤을 때 자신의 차림새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오스카가 보기에는 상당히 귀여웠다.

좀 괴짜 같긴 했지만… 어린애가 괴짜 같아 보이는 건 조금 특이하게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오스카의 눈에만 콩깍지가 씐 건 아니라서, 스태프들 몇몇이 귀엽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여기 포스터 한 장만 받아주세요.”

도현이 꽤 성실하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포스터를 나눠주었다. 소년의 차림새와 포스터를 본 사람은 각각 기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축제 당일이라 특별히 더 우스꽝스러운 꼴을 했다지만, 이미 며칠 전부터 하이에나에 의해 몇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했다. 더는 수치스러워할 기력조차 없었다.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옴에도 검은 눈동자는 해탈한 듯 잠잠하기까지 했다.

“포스터 받아 가세요. 두 시에 강당에서 공연이 있어요.”

기계처럼 행동을 반복하는 도현을 본 루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포스터를 받아 든 한 여성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세상에, 록 밴드? 네가 연주하는 거니?”

“네, 저는 드럼 포지션이에요.”

“기대되는구나. 꼭 보러 갈게.”

이렇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밴드? 록?”

“네.”

“얘야, 그런 거 하면 부모님이 안 말리니? 어릴 때부터 그런 거에 물 들으면 괜히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단다. 우리 딸, 너는 저런 거에 관심 가지면 안 된다. 알겠지?”

“어, 엄마….”

며칠 전에 도현에게 포스터를 받은 적이 있던 여자애 한 명이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았다. 지금은 웃긴 꼴을 하고 있다지만, 저번에 포스터를 나눠줄 땐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여서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가자는 듯 옷깃을 잡아당겨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못마땅한 얼굴로 도현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담임 선생님이자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 끼어들려던 순간이었다.

“저, 말씀하시는 도중에 죄송하지만, 정당한 근거 없이 상대방을 모욕하는 건 명예 훼손에 해당해요. 혹시 모르실까 봐 알려 드리자면 연방법 차원에서는 명예 훼손에 대한 처벌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주 법원 차원에서는 24개의 주가 형사 처벌이 가능한데 캘리포니아주는 형사 처벌이 가능한 곳이고요.”

“뭐, 뭐? 너 지금 어른한테 뭐라는 거니?”

“어른이라고 함은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법적으로 성년을 넘은 사람을 칭하는 건데, 어른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미성년자인 저의 정당한 의견을 묵살하려는 행위는 어른으로서도, 올바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적절하지 않아요. 자녀분을 위해서 해당 부분은 고쳐야 할 필요성이 있겠네요.”

말을 끝낸 도현이 멀뚱한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잔뜩 붉으락푸르락해져서 기분이 나빠 보이는데도, 상대가 왜 화가 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순진한 눈망울이었다.

나는 그냥 맞는 말을 했을 뿐인걸?

딱 그런 생각이 드러나는 표정에, 오스카는 속으로 감탄했다.

안경을 썼을 때도 연기에서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건만, 안경을 벗으니 확실히 달랐다. 도현 특유의 전달력과 섬세한 연기가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뒤에서 보고 있던 아이들이 조용히 엄지를 치켜올렸다. 자신한테 할 때는 골 때려도, 남한테 할 때는 속이 시원한 법이었다.

“뭐 이런 애가 다…!”

“아하하! 어머님,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안 그래도 캘리가 반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전화드리려고 했는데, 만나 뵌 김에 직접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뒤처리는 선생님이 맡았다. 기가 찬 듯 ‘허, 허!’거리는 여성에게 선생님이 캘리의 칭찬을 마구 퍼부어 주자, 기분이 풀린 듯 일그러졌던 얼굴이 점차 풀렸다.

“흠, 흠. 캘리가 그렇게 똑똑하다고요?”

깔끔한 마무리였다.

툭!

어느새 다가온 콜린이 도현의 어깨를 쳤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너 제법 하더라?”

“?”

물론 평소처럼 말했을 뿐인 도현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 * *

이후, 아이들이 홍보하는 장면을 몇 차례 더 찍은 후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도현은 불편한 분장을 모두 풀고는 접시를 받아 들고선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첫날 이후, 테이블에 앉는 아이들은 거의 고정 멤버가 되어 버렸기에 다들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와서 앉았다.

도현에게는 최근 들어서 가장 불편한 시간이기도 했다.

어쩌다 보니 자리 배치도 첫날 앉았던 대로 쭉 이어졌는데, 도현의 자리가 루카와 마주 보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뭐야.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네?”

요란하게 꾸몄던 모습에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도현에, 루카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도현의 머리나 목을 보는 게, 상당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없어서 다행이지. 그거 보면서 밥 먹으면 웃겨서 못 먹을 거 같았거든.”

도현의 옆자리에 앉은 콜린이 웃으며 말했다. 콜린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도현이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내젓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도란도란 떠들며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아, 잠시만. 나 보여줄 거 있어.”

루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도현의 눈앞으로 화면을 들이미는 행동에, 도현은 먹던 걸 멈추고 화면을 쳐다보았다가.

“픕! 흠!”

하마터면 먹던 걸 도로 뱉을 뻔했다.

헤레이즈가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에 도현이 목을 고르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거 봐. 좋아요랑 댓글 엄청 많이 달렸지!”

루카의 말대로였다. 도현의 눈동자가 댓글들을 훑었다. 영어가 압도적이었지만, 가뭄에 콩 나는 정도로 간간이 한국어도 보였다.

도현의 옆에 찰싹 붙어서 같이 댓글을 구경 중인 콜린이 눈에 띄는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귀엽다… 저건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야? 음, 둘이 잘 어울린다, 음음, 그리고… 저 소년은 천사가 틀림없어…? 큽, 부, 분명 날개가 달려 있을 거야…?”

도현은 잠시, 제가 아는 천사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사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짧게 고민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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