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마주하는 것 (10)
“너랑 같이 찍은 사진 올릴 때마다 유독 좋아요 수가 많은 거 알아? 너 누구냐는 댓글도 많고.”
“아… 그래?”
“반응이 왜 이렇게 미적지근해?”
루카가 자기 말 못 믿겠냐며, 게시물을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루카의 말대로 도현이 나온 사진이 다른 게시물보다 조금 더 좋아요가 많긴 했다.
음, 딱히 내 탓은 아닌 거 같은데.
도현이 함께 올라간 게시물이 겨우 두 개뿐이니 표본이 너무 적어 뭐라 말하기도 그랬다. 도현은 그냥 우연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하면 루카가 끈질기게 잡고 늘어질 거 같아 겉으로 수긍하는 척을 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점심 식사를 끝낸 도현이 콜린과 브레디, 헤레이즈와 함께 양치하고 돌아올 때였다. 오스카에게 대본을 받아서 좀 더 대본을 보고 있을지 아니면 그냥 쉴지 고민하며 걷는데 브레디가 말을 걸었다.
“저, 도현.”
도현이 말하라는 듯이 쳐다보자 브레디가 흘끔 콜린을 보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나누는 걸 별다른 생각 없이 보며 아까 하던 고민을 마저 하던 중이었다.
브레디가 말문을 떼었다.
“아까 주디스가 너랑 할 말이 있다고 했거든.”
“주디스가?”
“응. 그… 옆 교실에서 기다린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브레디의 말을 들은 도현이 촬영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주디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옆 교실은 촬영장으로 쓰이지 않아서 아이들이 쉬고 싶을 때나 놀고 싶을 때 종종 찾는 곳이었다. 거기로 부른 걸 보니 무언가 비밀스럽게 말하고 싶은 거 같은데….
아.
도현이 눈매를 미약하게 찡그렸다. 주디스가 지금 시점에서 도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야,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게 내린 앞머리에 가려져 찡그린 눈매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도현이 대꾸 없이 생각에 빠져 있자 브레디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브레디를 뒤늦게 눈치챈 도현이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어, 응! 지금 가보려고?”
“응. 기다리고 있다며?”
“어, 어. 맞아…!”
브레디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가 봐야겠다고 말하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조금 거리가 벌어지자, 콜린과 브레디가 작게 성공이라고 외치며 서로의 손바닥을 부딪쳤다. 뿌듯한 표정이 떠오른 둘과 달리, 헤레이즈는 속에 무언가 얹힌 듯이 묘하게 심기 불편한 표정이었다.
콜린과 브레디도 그 표정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기실, 헤레이즈는 루카나 도현과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조금씩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한번 제대로 말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도대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펼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디스는 티가 날 만큼 노골적으로 루카와 도현을 붙여 놓으려고 굴곤 했다.
애드리브를 도와준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본인은 선의로 하는 행동이겠지만…. 아니야. 더 생각하지 말자. 주디스는 이제 겨우 열 살이었다. 열 살짜리 애가 하는 행동에 너무 과민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어, 왔네!”
도현을 반겼지만, 내심 긴장한 기색이 보였다. 도현은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잠시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교실 안에는 주디스와 도현, 둘뿐이었다. 도현은 경계심을 조금 내려놓았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용건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예의상 묻는 말이었다. 먼저 묻지 않으면 주디스가 한참 망설일 것 같기도 했고. 뭐가 되었든 빨리 끝내고 가고 싶었다.
“그, 일단… 내가 이렇게 끼어드는 게 불편할 수 있겠지만, 둘 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친구라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
본론은 언제 나올까.
도현은 스치듯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가, 다시 주디스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심드렁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 * *
“하, 괜히 신경 쓰이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던 헤레이즈가 느닷없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겼다.
그는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몸에 힘을 뺐다가, 주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허탈하게 힘을 빼었다. 다시 한번 의자에 몸을 기댄 헤레이즈는 몇 시간 전, 주디스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짧은 대화 이후, 또다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버린 도현을 보며 ‘쟤 또 저러네’라고 가벼이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 일도 없으니 대본이나 봐야겠다는 생각에 무릎에 올려놓았던 대본을 들어 올릴 때였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주디스가 헤레이즈의 어깨를 툭 쳤다.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게 조용히 접근한 탓에 헤레이즈는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 쉿.
주디스가 성질을 내려는 헤레이즈에게 검지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헤레이즈는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그 말대로 따라주었다.
따라오라는 신호에 옆을 돌아보았지만, 도현은 여전히 혼자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헤레이즈는 고개를 젓고는 주디스를 따라갔다.
얘가 날 왜?
청회색 눈에 작은 의문이 서렸다.
주디스와 헤레이즈는 단둘이 이야기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아니었다. 주디스는 헤레이즈의 까다로운 기준을 넘지 못했고, 그는 기준을 넘지 못한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주디스가 어디 모자란 건 아니었다. 기준을 넘은 루카나 도현이 좀 특별한 편이지.
주디스를 따라간 곳에는 그녀뿐만 아니라 콜린과 브레디까지 있었다. 콜린을 보자 그의 침이 튀었던 게 생각난 헤레이즈가 티 나지 않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 우리가 계획 중인 게 있어.
- 계획?
- 응. 너 도현이 요즘 좀 이상한 건 알지?
- 뭐어….
헤레이즈가 대충 수긍하자, 주디스가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도현이 어딘가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 그리고 루카와 사이가 멀어진 것. 거기까지는 다 아는 이야기여서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 그런데 요즘 루카가 좀 힘들어해.
- 루카가?
헤레이즈가 눈을 깜빡였다. 루카가 힘들어한다니. ‘힘들다’라는 단어에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루카 하퍼였다.
누구든 루카 하퍼를 본다면 곧바로 느낄 것이 분명했다.
아, 사랑받고 자랐구나, 라고.
헤레이즈도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긴 했지만, 루카는 좀 달랐다. 그냥 자존감과 자기애가 똘똘 뭉치면 저렇게 생겼을 거 같았다.
헤레이즈가 의외의 말을 듣고 놀라워하는 사이, 주디스가 설명을 이어갔다.
- 응. 너도 루카가 도현에게 계속 다가갔던 건 알지? 걔가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같이 있어 주려고 그런 거거든. 근데 오히려 더 피하는 것 같으니까, 삼촌한테 상담했다나 봐. 그런데 삼촌이 이야기 듣고선 걔가 널 싫어하는 거 같은데 왜 자꾸 자존심도 없이 달라붙냐고 말했다는 거야.
- 걔가?
헤레이즈는 어느 상황이고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초연한 낯을 하고 있던 소년을 떠올렸다. 걔가 누굴 싫어한다고? 누굴 싫어하느니, 관심을 안 가질 거같이 생겼는데. 헤레이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 우리야, 걔가 누굴 싫어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루카 삼촌은 모르잖아.
주디스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주디스의 말의 요지는 이랬다.
처음에는 루카도 그 말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도현이 자꾸 피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 아무튼. 도현은 진짜 루카가 싫어서 피하는 게 아니거든. 저번에 브레디가 들었어. 그렇지?
- 응, 맞아.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했어.
브레디가 주디스의 말에 동의했다. 주디스가 다시 헤레이즈를 돌아보았다.
- 그런데 내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믿질 않더라고.
- 그래서?
- 루카가 도현의 진심을 들으면 괜찮아질까 해서!
주디스가 줄줄 늘어놓는 계획에 헤레이즈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게 정말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진심으로?
- 그걸 꼭 해야겠어?
- 촬영도 곧 있으면 끝나는데 이대로 헤어지면 아쉽잖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한 번 더 말려볼까. 헤레이즈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털어내었다. 저 얼굴을 보건대, 말린다고 들을 거 같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말렸으면 할 만큼 한 거지, 뭐.
- 나는 빼고 해.
- 뭐어? 왜?
아이들이 붙잡았지만 헤레이즈는 질색하며 떨쳐내었다. 이런 일에는 관심 없기도 했고, 이렇게 오지랖 부릴 만큼 도현과 가까운 사이인 것도 아니었다.
루카는 모르겠지만… 뭐, 루카는 헤레이즈가 일방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있을 뿐 본인은 헤레이즈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특히나 요즘엔 더 도현에게 신경이 쏠려서 헤레이즈는 안중에도 없는 거 같았다.
알아서 하라지. 괜히 부아가 치미는 기분에 헤레이즈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자리에 돌아왔다. 그사이에 도현은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는지 다시금 무표정한 낯으로 대본에 집중하고 있었다.
헤레이즈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보았다. 볼 때마다 자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검은 더벅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씨….”
헤레이즈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 * *
“그러니까, 너 루카가 싫은 건 아니지?”
길고 긴 서론에 지쳐갈 즈음에야 본론이 등장했다. 도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주디스를 응시했다.
짧은 침묵 후, 도현이 도로 되물었다.
“브레디한테 들었잖아?”
“어… 그건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말인지 주디스가 당황해하며 잠시 버벅거리더니, 이내 주절주절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브레디한테 듣긴 했지만, 걱정되어서 그런다… 내가 직접 듣고 싶었다…. 대강 그런 뜻인 거 같은데 당황해서 그런지 횡설수설이었다.
도현은 그 과한 당황에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이상한 부분을 찾지 못했다. 주디스의 말을 적당히 흘려 넘기며 무슨 말을 꺼내는 게 좋을지 머리를 굴렸다.
처음엔 브레디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으려고 했다. 그게 가장 모범 답안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면?
굳이 예측할 것도 없었다. 전보다 더 불편한 상황이 도현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이렇게 따로 불러서 물을 정도인데,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면 얼마나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한숨이 새어 나갈 뻔했다.
검은 눈동자가 주디스를 가늠하듯이 훑어보았다. 분위기가 바뀐 듯한 모습에 주디스가 떠들던 것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도현은 주디스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도움이 되는가와는 별개로 주디스의 행동은 온전한 호의였다. 애드리브를 도와준 이후 도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도현이 계산을 끝마쳤다.
“신경 써주는 건 고맙게 생각해.”
잠시 말을 끊은 도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한테만 솔직하게 얘기할게. 이 얘기는 교실을 나가면 잊어줬으면 좋겠어.”
무엇을 기대하는 건지, 주디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기대하는 거와는 다른 대답일 텐데. 도현은 입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이게 좋은 방법일지 아닐지 고민하며 망설였지만, 찜찜함을 한 구석으로 미뤄둔 채 말했다.
“네 말대로 루카를 싫어하지는 않아.”
“역시…!”
“그냥 가까워지고 싶지 않을 뿐이지.”
* * *
…지금 망한 거 같은데.
결국, 거슬림을 참지 못해 찾아온 헤레이즈는 문에 기대선 루카의 표정이 차갑게 굳는 것을 보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