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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11)화 (212/582)

제211화. 마주하는 것 (11)

도현은 완전히 당황한 낯의 주디스를 차분히 응시했다. 주디스가 충격받은 얼굴을 하는 것도, 그 눈빛에 초조함과 불안이 섞여 있는 것도 그저 당황의 일환이라고 여겼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주디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왜?”

처음에는 더듬거리며 말하더니, 이내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빠르게 뱉었다.

“말도 안 돼. 너희 분명 친했잖아!”

“네 말이 맞아.”

도현이 별다른 부정 없이 수긍했다. 주디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은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낼지 머릿속으로 골랐다. 제 속내를 일부 꺼내어 보여 주었지만, 주디스에게 루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정리를 끝낸 도현이 평소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못을 박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내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 거란 걸 알아. 하지만 루카를 싫어하는 것도, 그렇다고 루카가 내게 무언가를 잘못한 것도 아니야. 주디스, 확실히 말하겠는데 이건 순전히 나의 문제야.”

“왜? 싫은 것도, 잘못한 것도 아니면 친하게 지내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도현은 적당히 거짓과 진실을 섞기로 했다. 완전히 거짓도 아니고 완전히 진실도 아닌 것.

“너도 알다시피 최근에 내가 생각이 좀 많았어. 그런데 나는 한 가지에 신경이 쏠렸을 때 다른 것까지 신경 쓰지는 못하는 편이거든. 내가 그렇게 여유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마지막 말은 진심이었다. 도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혼자 있기를 원한 거고, 루카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하고도 거리를 뒀어.”

“하지만 너는 루카한테만 유독….”

“나한테 가장 많이 다가오는 사람이 루카니까 그렇게 보였던 게 아닐까.”

주디스는 점점 납득한 얼굴이 되어갔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다른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놀 때 배우라는 길을 선택할 정도로 똑똑하고 야무졌다. 주디스에게 도현의 말뜻을 이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도현의 생각처럼 주디스는 완전히 이해했다. ‘힘들어하니까 같이 있어 줘야지’라는 그들의 생각이 오롯이 그들만의 생각이었음을.

“그, 그럼 루카나 내가 네가 혼자 있을 때 다가갔던 게 결국… 널 더 힘들게 한 거야?”

입을 열려던 도현은 엉겁결에 다시 다물고 말았다. 도현을 쳐다보는 갈색 눈동자가 명백히 상처받은 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당혹스러운 감정에, 넋을 놓은 채로 주디스를 쳐다보았다.

왜?

이게 그렇게까지 상처받을 일인가?

지금 주디스의 표정은 명백히, 도현의 계산 밖이었다.

주디스가 도현에게 일방적인 호감이 있다고 하나 실제로 두 사람이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다 같이 어울려 놀기는 해도, 따로 특별한 친분을 쌓지는 않은, 딱 그런 정도의 사이였다.

게다가 주디스의 행동 방식의 근원으로 올라가면, 호감보다는 보은의 사고가 더 앞서 있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갚아야겠다는.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저 조금 놀라고, 어쩌면 부끄러워할 수도 있고, 섣불렀던 행동을 후회할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지만….

너한테 상처 주려는 건 아니었어.

짧은 찰나, 갈색 눈동자에 떠오른 빛에 기시감이 느껴졌고, 그걸 인지하자마자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투영되었다. 그건 아주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마치, 트라우마처럼.

교실, 그것도 촬영장 바로 옆에 있는데 도현은 하얀 공간 어딘가로 내던져진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동시에 끊임없이 상처받고, 흉터가 아물기도 전에 여린 살을 파헤쳐졌는데 그 누구도 동정 삼아 값싼 연고 하나 던져준 적 없던 과거가 환영처럼 드리워지자, 조금 아득한 심정이 되었다.

도현은 물처럼 밀려드는 감정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제 상태를 침착하게 파악했다.

- 너는 그저 덮어두고 있는 거야.

언제일까. 도현과 몇 번 만나지 않았을 적 메리는 우려가 가득한 낯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무 담아두려고 하지 말라고, 마주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원하지 않은 때에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그녀의 말이 옳았다.

저 자그마한 눈빛에 꼼짝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잔잔했던 호수가 일렁이는 바다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격한 감정은 언제나 수치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본의 아니게 긴 침묵을 만들어 내어서 다른 이들에게 긍정의 답으로 전해졌다.

도현이 뒤늦게 무언가 수습을 해보려고 입을 열 때였다.

“그런 거면 그냥 말하지 그랬어.”

휙!

도현이 크게 떠진 눈으로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렁이는 푸른빛을 마주했다.

* * *

왠지 불안하더라니.

도현의 말이 길어질수록 헤레이즈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점차 굳어가는 루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지 않기도 어려웠다.

제발 그만 말해. 헤레이즈는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서 도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물론 생각으로 그쳤지만.

“너도 알다시피 최근에 내가 생각이 좀 많았어. 그런데 나는 한 가지에 신경이 쏠렸을 때 다른 것까지 신경 쓰지는 못하는 편이거든. 내가 그렇게 여유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헤레이즈는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교실 안에 있고, 헤레이즈는 복도에 있었으니까.

물론 바로 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더래도 알 수 있었을 거 같지는 않았다. 지독하리만치 무표정한 낯이 그대로 떠올랐다.

다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잔잔한 태도와 고저 없는 목소리가 상황과 맞물려 어떠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꼭 귀찮아하는 거 같았다. 주디스를 비롯한 아이들과 이 상황, 어쩌면 과거의 모든 행위까지도.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주제에 목소리에 여유가 넘치는 것처럼 보여서 더 그랬다.

물론, 평소의 모습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기엔 저 애는 주변 아이들을 과하게 신경 쓰는 편이었으니까.

말 한마디에도 멈춰 서서 귀 기울이고, 조그마한 변화에도 유심히 지켜보고. 대화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닌 헤레이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무슨 음식을 싫어하는지도 다 알고 있을 만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식판을 채우고 있을 때, 옆에 서 있던 콜린이 이것 좀 같이 담아달라며 조개가 들어간 파스타를 멋대로 헤레이즈의 접시에 올렸던 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헤레이즈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

조개 냄새가 접시에 있는 모든 음식에 밴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접시를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굴면 콜린과의 사이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콜린과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곳이 촬영장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는데 손에 들린 접시가 사라졌다. 뭐지, 싶어서 멍하니 고개를 드는데 손이 다시 무거워졌다.

- 콜린은 내 옆자리니까, 내가 이 접시로 먹을게.

그렇게 말한 도현은 태연히 접시에 다시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헤레이즈는 제 손 위에 놓인 접시를 보았다. 막 담기 시작한 참인지, 접시에 올라간 건 과일샐러드밖에 없었다.

헤레이즈는 정말로 뒷목을 잡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누가 귀찮은 애들을 저렇게 신경 써.

‘그런데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지금 쟤네들 오해하잖아.

“그, 그럼 루카나 내가 네가 혼자 있을 때 다가갔던 게 결국… 널 더 힘들게 한 거야?”

헤레이즈가 손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왜 또 대답을 안 하는데. 차라리 그러면 그렇다고 대답이라도 하든가.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손바닥에 묻었던 고개를 든 헤레이즈가 조심스럽게 루카를 쳐다보았다. 루카는 미동 없이 있었는데, 그게 꼭 가만히 곱씹고 있는 거 같았다.

“그….”

헤레이즈는 무언가 말을 꺼내 보려다가, 이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이 끝난 듯 빛이 돌아온 푸른 눈동자에 맴돌고 있는 건 분명히, 실망과 분노였다.

* * *

단숨에 눈에 들어올 만큼 채도 높은 푸른색을 마주한 순간, 도현은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냈다.

도현이 느릿하게 시선을 굴려 주디스를 쳐다보았다. 주디스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로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풍랑처럼 몰아쳤던 감정이 삽시간에 빠져나가고,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었다가, 이내.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지금까지 최대한 조심스럽게 굴었는데. 이런 사적인 이유로 촬영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머리가 깨질 거 같아도, 속이 울렁거려도 내색 한번 없이 멀쩡하게 굴었다. 자신이 아프다는 걸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루카 일도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하게 주변에 들키게 되었지만, 여전히 가만히 두기엔 이상하지만 지적하기엔 애매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노력이 단숨에 무너졌다.

촬영이 거의 끝나 가는데. 지금까지 잘했는데 이제 와 이런 이유로 모든 게 틀어졌다고 생각하니 잠시 이성의 끈을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굴 탓할 것도 없었다.

전부 내 탓이었으니까.

검은 눈동자에 일었던 거친 파도가 잠잠해졌다. 망연하게 흔들렸던 낯빛은 이제 담담해 보였는데, 어딘가 체념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내가 바보같이 널 귀찮게 하는 게 싫었다면 그냥 말을 하지 그랬냐고.”

루카는 완전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뒤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화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루카가 분한 어조로 씹듯이 뱉었다.

“네가 뭔데 날 바보 취급해.”

그런 적 없어. 도현은 말하려고 입술 끝을 달싹였지만,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완전히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한 무슨 말을 하든 또 다른 바보 취급이 될 테니까.

도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루카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항상 밝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물들자 도현은 속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해졌다.

“내 말 다 취소야.”

화가 난 듯, 아니면 속상한 듯 묘하게 가라앉은 어조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루카가 눈을 한번 깜빡였다가.

잠깐의 침묵 후, 끝을 맺듯이 딱딱한 투로 말했다.

“너 하나도 재미없어.”

말을 마친 루카가 미련 없이 뒤돌아 교실을 나갔다. 도현은 루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도, 도현….”

작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주디스가 잔뜩 주눅 든 기색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도현과 교실 문을 번갈아 보는 것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거 같았다.

“따라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주어가 생략되었음에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주디스가 멈칫하더니 물었다.

“그, 그러면 너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태연히 대꾸하자 주디스는 어쩐지 안색이 더욱 파래졌다. 곧이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것에 도현이 괜찮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괜찮다고 했음에도 몇 번이나 도현을 흘끔흘끔 쳐다보던 주디스가 주먹을 한번 꽉 쥐더니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루카를 찾으러 가는 모양새였다.

교실에 홀로 남은 도현이 생각했다.

한국에 관련된 일도 그런 식으로 해결되더니, 이것도 그러네.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는 거 없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스스로의 재주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더 보탤 것도 없이 다 시원하게 망해버리니, 되레 머릿속이 맑아졌다.

도현은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이 일의 첫 시작부터, 아니, 처음 마주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리고 그보다 전에, 자신의 근원까지 되돌아가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생각했다.

아, 그래.

도현은 루카처럼 그 자체로 온전한 인간을 처음 보았다. 마주하는 순간 그냥 알았다. 루카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의 세계에는 아주 단단하고 견고한 성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어떤 허점도, 위기도 그 성의 성주인 소녀를 무너트리지는 못할 거 같았다.

내 일을 쉽게 말하는 네가 싫었다는 건, 어쩌면 핑계였을지도 몰라. 그냥 널 싫어할 계기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도현이 그를 거부할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다가왔다. 그건 도현의 태도가 바뀐 뒤에도 여전했다.

자신을 싫어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그 믿음. 어떻게 해도 조금의 흠집도 낼 수 없을 거 같은 단단함. 그게 싫었다.

여전히 말 한마디 할 때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상대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혹시라도 말을 잘못 뱉은 날에는 하루 종일 후회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사람들이 날 좋아할지 계산하고 예측하고. 아무도 날 싫어할 수 없게 친절함과 합리성으로 온몸을 두르고.

나는 그러는데, 너는.

왜 너는 당연하게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리라고 믿는지. 상대가 너의 말을 듣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지. 네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지.

그런데도 왜 모두가 널 좋아하는지.

이제 그 답을 알았다.

아마 너 자체가 빛나기 때문이겠지. 사랑받고 사랑하며 자라서. 그 어떤 것도 널 해친 적 없이 아주 견고한 성안에서 세상을 바라봐서.

너와 내가 다른 것도, 내가 널 예측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네가 높은 성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때, 나는 성 밖의 길가에서 말라비틀어진 잡초를 뜯어 먹으며 자랐으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불가능했던 거야.

도현은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는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더듬거리며 깨달아갔다.

처음 본 순간 거부감이 든 이유. 멀리하고 싶었던 이유. 불협화음처럼 맞지 않을 거라며 스스로의 눈을 가린 이유. 그 모든 것들의 이유가 점차 형체를 그려가더니 이내 선명해졌다.

그 존재 자체가 자신의 결핍을 자극했다. 있는지도 몰랐던, 있는 걸 알아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들을 기어코 알게 만들었다.

내가 미약한 비바람에 휘청이며 땅에 들러붙을 때까지 밟혔던 보잘것없는 풀이라면, 너는 나무였다. 뿌리가 너무 깊고 튼튼하게 박혀서 가지 몇 개쯤 떨어진다고 해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나무.

조금씩 밀려오며, 마음속 끝자락부터 갉아먹는 감정. 무른 자두 속을 파고들어 결국엔 숭숭 구멍이 나게 하는 작은 애벌레처럼, 초라한 속을 그대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

열등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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