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마주하는 것 (12)
복도에 나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자리에 되돌아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았을 때, 헤레이즈가 옆자리에 와서 앉은 게 얼핏 떠오르기는 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오후에 진행된 촬영에서는 루카와 도현이 단독으로 마주하는 장면이 없었다.
최악이 아닐까 싶은 상황과는 다르게 촬영은 여전히 순탄하게 굴러갔다.
의외로 주디스는 콜린과 브레디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는지, 두 사람은 그저 호기심 어린 낯으로 루카와 도현을 흘끗거렸고, 헤레이즈는 평소와 같았다.
주디스는 루카에게 자꾸만 말을 붙이려고 애를 쓰면서도 도현과 시선이 마주칠 때면 파드득 놀라 고개를 돌렸고, 그리고.
루카는…, 모르겠다. 일부러 그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도현, 이제 가자.”
“아, 저기에 겉옷을 두고 왔어요. 잠시만요.”
도현이 의자에 걸어두었던 얇은 점퍼를 들고선 팔에 걸었다. 그러다가 한쪽에서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루카를 발견해, 황급히 시선을 틀었다.
“도현?”
“가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오스카에게 다가간 도현은 그의 옆에 서자 걸음을 살짝 늦추었다. 오스카도 도현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아, 샌드위치 하나 사 뒀어. 네 자리에 뒀으니까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거 먹어.”
“오스카 건요?”
“난 아까 먹었지.”
촬영이 평소보다 늦게 끝날 때마다 오스카는 간단한 샌드위치를 사 오고는 했다.
촬영이 크게 늦어진 적은 없지만,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차이만으로도 도로 사정이 달라져서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훨씬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고맙다고 말하자 오스카가 대답 대신 어깨를 토닥이듯이 툭 쳤다.
“루카. 루카?”
“…아, 응.”
촬영장을 빠져나가는 작은 뒤통수를 보고 있던 루카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서는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저녁 준비하지 말라고 해.”
“갑자기?”
저녁에 친구들을 불러 저녁을 먹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루카가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자, 매니저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너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본다고 좋아했잖아.”
“그냥, 오늘은 싫어.”
“그럼 친구들한테는 네가 말할 거야?”
“응.”
이상하리만치 건성건성인 대답이었다. 루카야, 원래 다른 아이들보다 그 싹이 노란 편이었지만 이렇게 대충 대답하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니저는 루카의 말대로 집에서 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고용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 * *
부스럭.
조수석에 놓인 종이봉투를 연 도현이 샌드위치를 꺼냈다. 집에 가서 밥을 먹을 것을 고려해 속 재료가 이것저것 들어간 샌드위치가 아닌 햄과 버터가 전부인 샌드위치였다.
아마, 촬영장 주변에 프랑스 제과점이 있다고 한 거 같은데 거기서 사 온 거 같았다.
도현이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자, 시동을 걸던 오스카가 말했다.
“이따 밥 먹어야 하니까 배부르면 많이 먹지 말고.”
“네.”
씹던 것을 꿀꺽 삼킨 후 대답한 도현이 얌전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사이 차는 부드럽게 출발하여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여름의 나무들이 노을 속에 서 있었다. 주의 깊게 보려고 해도 휙휙 지나가는 바람에 볼 수 있는 건 짧은 잔상뿐이었다.
무얼 보려는 건지, 아니면 그저 넋을 놓고 있는 건지 가만히 창밖을 보던 도현이 입가에 가져다 댔던 샌드위치를 도로 내렸다. 거의 먹지 않아 그대로 남은 모습에, 도현의 손을 한번 본 오스카가 물었다.
“입에 안 맞아?”
“…아니에요.”
도현은 다시 기계적으로 빵을 씹기 시작했다. 다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는데, 생각 없이 씹어 넘기다 보니 다 먹어버려서 오스카가 짧게 기함하기도 했다.
집에 가서 저녁은 어떻게 먹으려고 그러냐는 오스카의 걱정 어린 말에 도현은 ‘그러게요’라며 심심하다 못해 성의 없는 대답을 해서, 오스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즈음이었다.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같은 길을 왕복하다 보니 도현도 길을 어느 정도 외우게 되었다. 곧 있으면 도착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이라고는 몇 없었다. 진, 니콜라스. 잊을 만하면 문자를 보내는 할리, 그리고 그보다 더 드물게 연락하는 맥 정도.
그러나 발신인은 도현의 예상에서 완전히 빗겨 간 인물이었다.
[에드워드 녹스 : 아주 멋있던데? 사진 저장했어.]
사진?
화면을 보던 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진이라니, 무슨 얘기를….
“아.”
- 이거 봐. 좋아요랑 댓글 엄청 많이 달렸지!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어쩐지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져서 바로 생각해내지 못했다. 도현은 조금 오랫동안, 물끄러미 화면을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홀린 것처럼 키패드를 두드렸다.
[전송 완료되었습니다.]
메시지 전송 완료 알림이 뜨자 도현의 눈에 뒤늦은 후회의 빛이 떠올랐다.
…에드워드, 바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핸드폰을 쥔 손은 여전히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 * *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에 검은 정장을 늘씬하게 빼입은 남자가 나른한 낯으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각이 살아 있는 정장과 그 정장의 매력을 한껏 돋보이게 만드는 긴 기럭지도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건 남성적으로 단단하면서도 때로는 부드럽게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매력적인 남성은 지금.
“여기 감자튀김 더 있나?”
“자. 그런데 체중 관리는 안 해?”
제 앞의 감자튀김을 밀어주며 하는 말에 에드워드가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 얘기는 하지 말지.”
햄버거를 먹는 중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스튜디오로, 화보 촬영 중간에 짬을 내어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띵.
맑은 종소리가 얇게 울리는 소리에 에드워드가 반응했다. 한 손으로는 햄버거를 쥐고,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든 그가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 우리 꼬마 친구가 답장을….”
에드워드가 말을 하다 멈추자, 맞은편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던 매니저가 고개를 들었다.
“흠….”
에드워드가 짧게 소리를 내었다.
그가 햄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는 고민하는 것처럼 핸드폰 화면을 빤히 응시했다.
“왜 그래? 안 먹고. 지금 안 먹으면 저녁 먹을 시간 없어.”
“잠깐 기다려 봐. 지금 고민 중이야.”
그렇게 말하더니, 겨우 몇 초 후에 에드워드는 도로 입을 열었다.
“좋아, 결정했다.”
그가 손에 든 햄버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매니저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계속 먹고 있어. 난 잠깐 통화를 좀 해야 할 거 같아서.”
아까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냐며 붙잡는 그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두어 번 흔든 에드워드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매니저가 기어코 그의 손에 프로틴셰이크를 들려 주었다.
에드워드는 손에 들려 준 걸 들고서는 한적한 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위가 조금 조용해지자, 그는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도로 꺼내었다. 화면을 켠 그는 메시지 함으로 들어갔다.
[어린 콩 : 저는 배우가 될 자격이 없나 봐요.]
그가 판단하건대, 꼬마 친구는 지금 멘토가 필요한 거 같았다.
그는 이 어리고 미숙한 배우 꿈나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으니, 저녁 식사 정도는 희생하고 그의 멘토가 되어줄 의향은 충분히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울리고.
- 에드워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목소리는 평소랑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에드워드는 짧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데?”
* * *
침대에 앉은 도현은 조금 전, 에드워드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전화가 걸려오고.
대뜸 본론부터 내미는 에드워드에 도현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숨기기에는 보낸 메시지가 너무 의미심장했다는 걸 스스로도 알기 때문이었다.
엄마한테도 꺼내지 않은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에드워드에게는 술술 말이 나왔다. 어쩌면 그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사람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아니면 초점을 ‘관계’가 아닌 ‘배우’로 맞춰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지난번, 허무하게 캐스팅이 취소된 후에 에드워드가 해준 이야기는 도현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까.
도현은 너무 자세하지는 않게, 그렇다고 너무 생략하지는 않은 채 상황을 설명했다. 직접적인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고, 촬영장에서 만난 익명의 아이 A 정도로 말하며.
- 그러니까, 그 A란 아이를 처음 볼 때부터 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애는 너를 마음에 들어 해서 너와 친해지려 했단 거지?
“네.”
- 그런데 또 네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서 A가 불편해져서 A를 멀리하게 되었고? 그걸 걔가 눈치챘는데 피하기는커녕 더 다가왔고?
“맞아요.”
- 그래서 혼자 있고 싶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계속해서 A랑 붙여 놓으니까 불편해서 그게 싫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고? 그걸 또 A가 들어버렸고?
“…네.”
다른 사람이 정리한 말을 들으니 더욱 한심해지는 기분이라, 도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히 말을 한 걸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니 수치스럽고 두려웠다.
‘에드워드는 내가 한심하겠지.’
그는 배우라는 직업에 무척이나 진지한 사람이었다. 도현이 이렇게 개인적인 사감을 끌고 와 촬영장에서 문젯거리를 만들어 냈다는 걸 알았으니, 자신에게 실망했을 게 분명했다.
역시 괜히 말했어.
한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문자를 보낸 걸 후회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짧은 탄식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이 돌아올지 예상되어 도현이 입술을 질끈 깨물 때였다.
- 너 혹시 배우가 기계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
-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겠어. 네가 잘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도현, 네가 잊은 게 하나 있는 거 같거든.
짧게 텀을 둔 에드워드가 말했다.
- 도현, 넌 배우이기 이전에 사람이야. 그보다 더 전에는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고.
도현이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항변했다.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전 촬영장에 어린아이로 있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 있는 거였어요.”
도현의 반박에 에드워드는 차분히 응수했다.
- 네 말도 맞아. 넌 계약서를 쓰고 정식으로 고용된 한 명의 배우지.
그렇다면 왜. 도현이 입을 열려는 순간, 단호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타고 흘러 들어왔다.
- 하지만 도현, 배우는 연기하는 기계가 아니야. 관계를 맺고 쌓아가다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지. 물론 그게 촬영에 지장을 주면 안 되지만, 솔직히 네 나이의 다섯 배는 더 먹은 사람들도 촬영장에서 문제를 일으키는걸.
“그건,”
- 계속 들어봐. 그래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니까. 다만, 넌 그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지. 너는 배우지만 이제 고작 두 번째 영화에 출연한 신인이고, 그 이전에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어린아이잖아.
진지하게 말하던 목소리가 곧 가벼운 투로 변했다.
- 네가 시행착오를 겪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거야. 처음부터 완벽하길 바라는 건 너무 욕심 부리는 거 같지 않아?
도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게 아닌데, 여기서 반박하면 욕심쟁이가 되니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 수고했어.
갑작스러운 말에 도현이 우뚝, 굳었다.
- 내가 널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분명 네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서 너의 노력이 숨어 있겠지. 그 상황 속에서도 너는 최선을 다했을 거잖아, 그렇지?
도현은 그 말에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에드워드는 침묵 속에서 긍정을 읽어낸 거 같았다.
그는 그 후로도 도현을 탓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묻고, 곧 촬영이 끝나니 조용히 지나가도록 할 거란 도현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도현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위로 받으려고 그런 문자를 보낸 게 아닌데…. 아니, 아닌 게 아닌가. 사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해결된 건 하나도 없음에도, 왜인지 아까 전처럼 모든 게 끝나 버린 것 같단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