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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13)화 (214/582)

제213화. 마주하는 것 (13)

사실 원래부터 이 정도의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빠진 감상이 들 정도로 루카와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마치 그간 아무 일도 없었고, 친하게 지냈던 과거마저 싹둑 잘려 나간 것처럼.

평화로움은 차라리 낯설었다.

도현은 루카가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 다른 아이들에게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 맞을뿐더러, 그의 경험상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도현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답답한 낯으로 묻는 브레디와 콜린에 루카가 말하지 않았음을 완전히 확신했다.

그렇다고 도현을 피해 다니거나, 꺼림칙한 눈으로 보지도 않았다. 달라진 건 단 한 가지, 도현에게 다가오던 행동을 멈춘 것뿐이었다.

분명히 예상했던 상황보다 긍정적이고 촬영도 무사히 굴러가고 있으니 안심하는 게 맞을 텐데 기분은 더 저조해졌다.

이제 도현은 그 이유를 알았다.

또 비교되나 보지. 도현은 제 감정을 제3자처럼 쳐다보고는 짧게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촬영 일이자, 밴드 연주 장면을 찍는 날이 다가왔다.

* * *

“…기분이 이상하네.”

벌써 네 번째 반복하는 말이었다.

오스카는 도현보다 더 싱숭생숭해 보였다. 그가 심란한 낯을 하는 걸 보던 도현이 팔 부근을 도닥였다. 그걸 보고 또 표정이 흐트러진 오스카가 다섯 번째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태연한 척 오스카의 팔을 토닥이고 있지만, 사실 도현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한 가지 배역을 떠나보내는 것은 꼭 또 다른 나를 세상에서 지워내는 기분이었다. 혹은 아주 친밀했던 친구가 사라지는 기분이거나.

도현은 뭉글뭉글 피어오르려는 상실감을 덮어두었다. 아직 촬영이 남아 있었으니 이런 감정을 느끼기에는 좀 일렀다.

“자, 됐다. 원래도 열심히 했지만, 오늘은 더 열심히 했어.”

도현의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던 스태프가 손을 떼며 말했다. 도현의 머리에는 예의, 장난감 티가 팍팍 나는 하트 머리띠가 씌워져 있었다. 다만 전처럼 앞머리를 완전히 넘기지 않고 몇 가닥씩 자연스럽게 빼낸 상태였다.

촬영 기간 동안 머리카락이 더 자라서 이제는 목덜미를 덮을 정도가 되었다. 그 탓에 하트 머리띠를 쓴 도현은 언뜻 예쁘장한 여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현이 거울로 옷매무새를 확인할 때였다.

찰칵!

갑작스레 울린 카메라 소리에 도현의 어깨가 움찔했다.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지만, 아주 짧은 찰나라서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도 엄마한테 보내려고요?”

도현이 여전히 거울을 응시한 상태로 물었다. 그러자, 예상했던 인물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응, 하하. 저번에 사진 보내 드리니까 엄청 좋아하셨거든.”

마지막으로 길게 풀어진 넥타이에 추가된 해골 브로치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도현이 몸을 틀어 오스카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가 찍기 편하게 자세를 잡아주었다.

오스카가 만족스러워할 때까지 장단을 맞춰주던 도현이 슬슬 나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스치듯이 톡, 쳤다. 그동안 도현의 메이크업을 담당해 주었던 아티스트였다.

“나도 같이 찍어도 될까?”

갑작스러운 말에 도현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몇몇 스태프들이 자신도 같이 찍고 싶다며 말을 붙여왔다.

난데없이 펼쳐진 포토 타임이었지만, 도현은 크게 당혹스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스카는 즐거워하며 자청해서 사진기사 역할을 맡았다.

잠시 후.

각자 사진을 찍고 흩어지자, 오스카가 웃음기 어린 어투로 물었다.

“너 완전 태생부터 셀러브리티 아니야? 아까 엄청 자연스럽던데?”

누가 봐도 놀리려는 의도가 담긴 목소리였다. 도현은 그가 원하는 반응을 돌려주는 대신 차분하게 답했다.

“작년 영화 뒤풀이 때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그래요.”

“작년… 아, 말이구나.”

도현의 대답에 오스카가 수긍하더니, 새삼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지나면 이제 두 작품이나 찍은 게 되네.”

“개봉하려면 조금 더 걸리겠지만요.”

도현이 고저 없는 어조로 사실을 짚자, 오스카가 한숨을 터트리듯이 웃었다.

“너는 애가 낭만이 좀 부족한 거 같아. 가끔 네가 로봇이나 기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니까. 뭐, 로봇이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그는 자체적으로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홀로 납득한 기색에 도현은 잠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세트장 앞에서 대기하려는 심산이었다.

막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

살짝 허스키한 탄식 소리가 들렸다.

검은 눈동자가 일순 흔들리는 듯했지만, 루카가 그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도로 가라앉아서 루카는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스윽-

도현이 문고리를 잡은 채로 옆으로 비켜섰다. 공교롭게도, 루카가 입을 열려던 순간과 일치했다. 루카는 도로 입을 다물었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자리했다. 도현은 오스카가 이상하게 여기기 전에 입을 뗐다.

“들어가.”

평탄하리만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였다. 이렇게까지 차갑게 말할 생각이 없었던 도현은 내심 당황했으나, 밖으로 드러난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루카는 잠시 그런 도현을 응시하다가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활기차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세 시끌벅적해진 내부를 뒤로하고 도현은 밖으로 나왔다.

아까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을까.

분명히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이제는 알 수 없는 문제가 찌꺼기처럼 남아 달라붙었다. 왜 거기서 몸을 움직였지. 조금만 기다려볼걸. 의미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도 했다.

세트장으로 향하던 도현은 익숙한 낯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대도 도현을 발견했는지 반가운 표정을 하곤 손을 흔들었다.

“앵거스!”

ATT 밴드 멤버이자 도현의 드럼 멘토였던, 앵거스 크러머였다.

“오랜만이다, 도현.”

그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헤집으려다가 막 머리카락에 닿기 직전 손을 멈췄다. 자의에 의한 멈춤은 아니었다.

“무슨 짓이야, 앵거스! 머리카락 망가지잖아.”

불상사가 발생하기 전에 앵거스의 팔을 저지한 ATT 밴드 리더, 코먼 영이 질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아, 하며 입을 벌린 앵거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잘못하면 실수할 뻔했다.

조금 기가 죽은 앵거스를 놔두고 코먼 영이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 얘가 공연할 때도 자주 이러거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아무래도 앵거스 크러머는 상습범인 거 같았다. 한숨을 쉬며 말하는 코먼 영의 얼굴에 체념이 묻어났다. 도현이 옅게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머리에 닿지도 않았는걸요.”

“정말 다행인 일이지.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그 머리띠는 소품이야? 아주 잘 어울리는데.”

“네, 맞아요.”

“잠깐. 그러면 드럼 연주할 때 그러고 하는 거야?”

한쪽에 쭈글해져 있던 앵거스가 불쑥 끼어들어 물었다. 볼을 씰룩이며 묻는 그에 도현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웃음을 애써 참아내는 얼굴이 되었다.

“그, 흡, 머, 멋있겠네. 진정한… 록 스피릿이야.”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도현은 딱히 불만은 없지만, 저렇게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말을 할 거면 그냥 웃고 마는 게 나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도현이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걸 또 오해했는지, 코먼 영이 정말 잘 어울리니까 앵거스는 무시해도 좋다며 도현의 어깨를 두들겼다.

조금 뒤.

진정한 앵거스가 도현을 끌고 드럼 앞으로 갔다. 오랜만에 봤으니 실력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의도였다.

한참 세트장을 준비 중이라서 도현이 슬쩍 눈치를 봤지만, 어느새 다가온 스티브 로이 감독이 시작 전까지 연습하고 있으라며 말하고 떠나서 마음 편히 스틱을 쥐었다.

드럼 의자에 앉아서 손목을 가볍게 풀고 있는데,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앵거스가 말했다.

“그동안 연습은 계속했어? 혹시 실력 줄어든 건 아니지?”

“아,”

…니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도현은 말하던 입을 다물었다. 굳이 자세하게 이야기한다면, 아무리 바쁜 날에도 삼십 분은 꼭 쳤으며 주 1회에서 2회 정도는 학원에 나갔고, 쉬는 날에는 몇 시간이고 드럼 앞에 앉아 있었다고 말할 수야 있지만….

“앵거스가 보고 판단해요.”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그냥 보여주는 게 더 빠르단 생각이 들었다. 도현의 대답에 앵거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흥미로움과 즐거움이 섞인 얼굴로 웃었다.

도현이 손목 스트레칭을 끝내고 스틱을 든 손을 들어 올렸지만, 사실 앵거스는 듣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자신감이 없다면 저런 완벽한 대답이 나올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너 진짜 괴물이구나.”

결과는 앵거스의 예상대로였다.

시원한 드럼 소리가 울리자, 어느새 도현의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경쾌하게 울리는 박자에 리듬을 탄 사람들도 있었다.

앵거스는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내가 진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거든? 너무 뻔하잖아. 뻔한 건 싫어해서.”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건지, 사족이 많이 붙었다.

“내가 멘토멘티 활동하면서도 한 번도 이런 얘기 꺼내본 적 없거든. 네가 처음이야. 이 말은 진심이니까 믿어도 좋아.”

앵거스가 이렇게 본론을 꺼내지 않고 뱅뱅 말을 돌리는 건 처음이라서 도현이 조금 의아한 낯을 할 때였다.

“너, 밴드 할 생각 없어?”

“네?”

도현의 얼굴에 어이없음이 드러났는지, 앵거스가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네가 배우인 건 아는데, 너 아직 어리잖아. 내가 봤을 때 너는 드러머가 되면 내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을 거 같거든.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이까지도.”

마치 사탕으로 어린아이를 꾀듯이, 어울리지도 않는 부드러운 말투로 살살 꼬드기는 앵거스에 도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 제안은 감사하지만, 전 생각 없어요.”

“…확실히?”

“네.”

단호한 대답에 그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그를 달래야 하나 했는데, 의외로 앵거스는 회복이 빨랐다.

사실 앵거스는 한창 드럼을 가르쳐줄 때 여러 번 간을 봤었다. 그때마다 도현은 아주 철옹성 같은 반응을 보였고.

이번에 물어본 것도 될 거란 희망적인 예측을 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 놓치기 너무 아까워서 나간 말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에는 아쉬움이 그득 담겨 있었다. 아무리 봐도 록에 투신해야 할 인재인데, 애꿎은 곳에 가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도현이 최연소로 베니스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배우란 걸 떠올리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이들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각자의 선생님한테 확인을 받았다. 하지만 맞춰서 연주해 보지는 않았는데, 그건 카메라가 돌아갈 때 해야 한다는 스티브 로이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는 첫 번째로 연주한 게 가장 잘 나올 거라는 어떠한 미신을 믿고 있는 거 같았다.

물론,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현재 무대는 정말 ‘공연 무대’같이 꾸며져 있었다. 보조 출연자들이 가득 와서 세트장은 붐비는 상태였는데, 곧 있으면 저 출연자들이 모두 무대 아래, 관객석에 위치할 예정이었다.

그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가서 연주를 하는 건 사실상 실제 공연이랑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스티브 로이가 노린 부분은 그것이었다.

진짜 공연처럼 하는 것.

리허설 없이. 정말 학교 축제 날 무대 위에 선 아이들처럼. 그렇게 하면 실제로 긴장감이 들어 사실에 가까운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그의 의도는 정확히 들어맞아서.

덜덜덜덜덜.

콜린이 무섭도록 다리를 떨어댔다. 불편한 얼굴로 흘끔거리던 주디스가 인내심이 닳았는지 핀잔을 주었다. 콜린이 미안하다고 말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다리 떨림이 멎자 손을 떨기 시작해서 주디스는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디스가 멀쩡한 상태라는 건 아니었다. 힐끗, 주변을 둘러본 주디스가 이내 허옇게 질린 낯으로 말했다.

“어, 어떡해. 저 사람들이 다 우리 무대 보나 봐. 나 속이 울렁거려….”

주디스가 이내 멀미하는 거 같다며 멀미약을 찾아댔다. 그래도 콜린과 주디스는 그나마 나았다. 한쪽에서는 완전히 패닉에 빠진 브레디가 사고 기능을 상실했는지 기타를 아기처럼 끌어안고 넋을 놓고 있었다.

멀쩡한 건 도현과 루카 정도였다.

…정말 이게 맞는 걸까?

공연이 제대로 굴러갈지, 살짝 걱정되기 시작한 도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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