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14)화 (215/582)

제214화. 마주하는 것 (14)

강당 가득 사람, 사람, 사람.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본 엘비가 허옇게 뜬 얼굴로 헛구역질을 했다. 조지가 그런 엘비의 옆에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홍보가 너무 잘됐나 봐….”

작은 중얼거림의 주인은 아니사였다. 오늘만큼은 과감해지기로 마음먹은 건지, 곧은 직모였던 머리카락이 꼬불꼬불한 면발처럼 작은 컬이 가득 들어가 있어 방방 떠 있었다.

아이들이 긴장감에 잔뜩 굳어 있을 때.

제이가 안경 너머로 캐시를 보았다. 유심히 관찰하듯, 어딘가 집요한 눈빛이었다.

제이가 생각했다.

하이에나가 이상하다.

육식 동물이면서, 마치 초식 동물처럼 긴장한 채로 여기저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캐시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캐시가 답지 않게 여유를 잃고 흠칫 놀라는 것에, 제이가 캐시에게로 몸을 낮췄다. 굳은 얼굴을 본 제이가 역시, 라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지금은 강당 뒤편의 화장실이 여유로울 거야.”

소곤소곤.

엄숙한 얼굴로 소리를 죽여 속삭이는 제이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캐시가, 이내 와락 미간을 구겼다.

“아니거든?”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니 부정할 필요 없….”

“꺼져.”

캐시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새파란 눈이 오늘따라 조금 더 뾰족하게 세워져 있었다. 제이는 눈치는 없었으나, 생존 본능은 기가 막히게 발달했으므로 얌전히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 * *

첫 촬영은 짧았고, 무난하게 다섯 번의 재촬영 끝에 오케이 사인이 났다.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더욱 깐깐해지는 스티브 로이 감독의 성향을 고려하면 상당히 수월하게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촬영장의 분위기에 아이들의 과도한 긴장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의도한 거겠지.’

거의 맨 처음으로 도착한 도현이 촬영장에 왔을 때만 해도, 촬영장은 꽤 술렁이고 있었다. 정을 주었던 작품, 공간 그리고 사람들을 떠난다는 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쉽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과하게 긴장한 티를 내기 시작하자, 촬영장이 점차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배우들의 상태를 본 스티브 로이 감독이 무언가를 지시한 거 같았다.

덕분에 도현도 한시름 놨다.

아까 전 상태에서 공연을 들어가면 누구 하나가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칠 거 같았는데, 지금은 적당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현의 시선이, 카메라에 둘러싸여 클로즈업 샷을 찍고 있는 루카에게 닿았다. 한동안 루카가 위치한 곳에는 짧은 시선조차 두지 않던 도현이 가만히 루카의 연기를 응시했다.

초반에는 얼굴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밀어 촬영하는 걸 좀 부담스러워하거나, 종종 웃음을 터트려 NG를 내더니, 이제는 익숙해진 듯 카메라를 신경 쓰지 않고 연기에 빠져 있었다.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보조 출연자들을 보는 루카의 눈이 미약한 초조함으로 흔들렸다. 평소에 그 쨍한 색감만큼이나 사나움과 불량함으로 번뜩였던 눈이었기에 더욱 시선을 사로잡았다.

캐시는 자신만만하고, 거칠고, 세상에 무서울 거 하나 없어 보이는 소녀였지만, 동시에 아직 부모님의 사랑과 지지가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눈으로 계속해서 강당을 더듬는 루카의 연기는 그러한 캐시의 면모를 부각해서, 캐시 와일드라는 캐릭터를 더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려내었다.

상처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다. 그 모양조차 가지각색이었다. 도현은 캐시가 가진 상처는 강함과 오기가 딱지처럼 뒤덮여 있어서, 캐시의 친구들이 알아챌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캐시는 아주 단단한 영혼이었다. 자신의 상처는 스스로 감당해낼 수 있을 정도로. 극중에서 캐시는 상처가 아파 주저앉는 게 아니라 일어나서 덜 아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움직였다.

이 영화의 정체성은 음악 영화이면서 동시에 성장 영화였다. 캐시 와일드라는 아이가 상처받고 스스로 이겨내며, 그로 인해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였으니까.

루카가 이내 원하는 걸 찾지 못하고, 푸른 눈이 실망감에 물들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릿하게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내내 바라보던 무대 아래가 아니라, 무대 뒤편에서 소녀와 함께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았다.

얼굴에 천천히, 예의 그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오르고.

“컷!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났다.

* * *

툭.

누군가 등을 치고 가는 것에 실수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본 도현은, 멀어지고 있는 백금발을 발견했다.

‘응원인가?’

대충 격려나 응원, 그 비슷한 의미인 거 같은데… 도현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올라왔다.

헤레이즈가 맡은 마테오는 무대 아래에서 분한 낯으로 이를 갈며 무대를 볼 예정인데, 정작 본체는 이쪽을 응원하고 있으니 좀 재밌었다.

“촬영 들어갑시다! 멤버들은 자리 위치에 가서 서고!”

스티브 로이 감독은 루카, 도현, 브레디, 콜린, 주디스를 묶어서 멤버라고 불렀다. 밴드 멤버를 줄인 말인데, 처음에는 하나하나 이름으로 부르더니 어느 순간 저 지칭이 고정이 되었다.

아이들은 감독의 말대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브레디가 살짝 헤맸지만,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도현은 드럼 의자에 앉아 눈앞에 드리워진 붉은 암막 커튼을 보았다. 큐 사인이 울리고 저 암막 커튼이 걷히면, 그때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레디.”

전에 없는 긴장감이 촬영장을 감쌌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이 마지막 촬영이 되리란 걸.

아이들의 얼굴에 비장한 빛이 떠올랐다. 도현의 눈동자에 후련한지 아쉬운지 알 수 없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액션!”

촬영이 시작되었다.

도현은 암막 커튼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보았다. 사전에 주디스가 있는 곳까지 커튼이 열리면 시작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도현이 스틱을 바로 쥐었다.

첫 시작은 드럼.

시작도, 끝도 내가 맺는 것.

암막 커튼이 점점 더 젖혀지며, 무대 아래의 광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수가 끝나기 전에 도현의 팔이 위로 올라갔다. 도현을 보고 있던 앵거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넷.

치잉-!

크래시 심벌이 울리는 경쾌한 소리가 강당 안에 가득하게 퍼져 나갔다. 속이 시원해질 만큼 시원하고 맑은 소리였다.

그래, 그거야! 앵거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시작을 잘 끊었다. 진짜 공연이 아닌데도, 한순간 모든 이들의 주의가 저쪽에 집중되었다.

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을 비롯해서 바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까지.

그가 무대에 서본 횟수는 이제 셀 수조차 없었다. 그 정도로 무대에서 살다 보면 느낌이란 게 생긴다. 그런 그가 보았을 때,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이제부터는, 저 아이들의 시간이었다.

* * *

손이 가벼웠다.

스틱을 힘껏 내리치고 있는데도 별다른 힘이 들지 않았다. 키보드, 기타, 드럼의 소리가 섞여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콜린이 반 박자 정도 놓치긴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금방 궤도를 되찾았다.

브레디가 그걸 느꼈는지, 콜린을 쳐다보며 웃었다. 잘했다는 듯 칭찬의 미소였다. 촬영 기간 동안 콜린을 가르치면서 제법 진심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위치상 가장 뒤쪽에 있는 도현은 아이들의 모습을 전부 볼 수 있었다.

주디스가 키보드를 치며 즐거운 얼굴로 웃는 것도, 여전히 긴장한 얼굴이지만 살짝 상기된 브레디의 뺨도, 아까 실수한 건 까맣게 잊었는지 몸을 마구 흔들며 리듬을 타는 콜린도, 그리고 특유의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잡아채는 루카도.

목소리가 울렸다.

밴드 연습실에서 들었던 것과 같았지만, 달랐다. 탁 트인 강당에서 곧게 뻗어져 나간 목소리가 사방에 퍼져 나가 부딪혀 되돌아오는 감각은 꽤 소름 끼쳤다.

시작은 낮게.

허스키한 목소리의 매력이 배로 살아나는 낮은 멜로디의 노래가 귀에 꽂혔다.

이어.

다다단, 단!

도현이 강하게 베이스 드럼을 내리치는 것과 동시에 시원한 고음이 내질러졌다.

오랫동안 연습한 덕에 음정은 흔들림 없이 안정적이었다. 도현은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 루카의 시선이 어디에 가 닿았는지 보았다.

아마, 무대 아래, 한쪽에 서 있는 캐시의 엄마를 발견한 것이리라.

루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꽃피었다. 루카의 바로 위로 내려오는 조명의 불빛 덕에 그건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도현은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맥이 항상 자신을 보고 연기인데 꼭 진짜 같아서 무섭다 말했던 게 생각난 것이다. 그때는 그냥 과장해서 칭찬해 주는가 싶었는데….

그때 맥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도현은 사전에 얘기된 대로 스틱을 위로 던져 올렸다. 그날 애드리브를 시도한 이후로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틈날 때마다 연습해서, 이제 공중에 떠오른 스틱을 보고도 불안하지 않았다.

치잉!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고 내려온 스틱을 그대로 잡아챈 후 크래시 심벌을 강하게 내리쳤다. 팔이 꽤 크게 움직인 탓에 머리에 고정되어 있던 머리띠가 흔들리다가, 내리치는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띠가 뒤로 고정해주고 있었던 앞머리는 몸의 움직임에 따라 앞으로 흘러내렸다. 헤어 아티스트가 부스스한 연출을 한다며 옅게 컬을 넣었던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래에서 보고 있던 스티브 로이가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잘되고 있었는데…!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걱정과 아쉬움을 담아 카메라를 보던 스티브 로이는 한 가지를 발견했다.

'놀라지 않았어?'

예기치 못한 사고라 당황했을 줄 알았는데, 도현의 얼굴에는 한 점의 당황스러움도 없었다.

오히려 머리띠가 떨어져서 잘되었다는 듯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굳이 치우려고 하지 않고 상체를 더욱 큰 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현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앞머리가 흔들리자, 머리띠가 떨어진 것조차 의도한 것처럼 보였다.

스티브 로이는 아까까지 아쉬워했던 것도 잊고 넋을 놓고는 도현을 쳐다보았다. 저 아이에게는 머리띠가 있든 없든 그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거 같았다.

아니, 아니다.

머리띠가 떨어진 걸 좋아한 이는 도현이 아니라 제이 로빈이었다.

스티브는 짧은 실소 같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저건 순발력 같은 게 아니었다. 감독의 위치에 있으니 알 수 있었다. 저건 그냥 무대에 완전히 몰입해 버려서 나온 그림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도현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사실 머리띠가 떨어져 나간 것도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그런 사소한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이 순간이 즐겁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연기가 좋다. 연기하는 건 언제나 도현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처음에는 나를 버리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감각이 기꺼웠지만, 이제는 그것을 제외하고도 그냥 연기가 좋았다.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거, 내 경험과 감정을 기반으로 한 연기에 누군가 공감을 한다는 거. 그러한 것들은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음악도 좋았다. 형의 선호는 곧 도현의 선호였다. 사실, 도현이 의도적으로 자아의 주도권을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연기만큼 음악이 하고 싶어졌을 정도로 음악이 좋았다.

그 두 개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때.

문득 루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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