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마주하는 것 (15)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스티브 로이 감독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화면을 응시했다. 방금 찍은 장면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티브 로이의 믿음은 이루어졌다. 첫 번째 촬영에서 느낌이 왔다는 소리였다.
그가 몇 번째일지 모를 되감기를 했다. 촬영 첫 장면부터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스티브 로이가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해서 보았다.
불이 꺼진 어두운 무대가 서서히 드러나고.
치잉-!
드럼 소리와 동시에 조명이 켜졌다.
‘이건 정말 잘 나왔어.’
드럼이 처음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그가 보기에도 완벽했다. 속이 뻥 뚫리는 소리가 고조된 긴장감을 깨트리며 시작을 알렸다.
이후로 콜린이 반 박자 놓친 건 사실 NG 감이었지만, 브레디와 콜린의 시선 교환 덕에 성장, 청춘의 느낌이 강하게 났다.
신나게 연주하고 내려와서는 다 같이 모니터링을 할 때 실수한 장면이 나오자 콜린이 쩔쩔매며 그의 눈치를 봤지만, 스티브가 보기에 이 장면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 장면을 살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루카의 노래도.
주디스의 연주도.
심심해질 찰나에 허공에 스틱을 던졌다 잡아챈 도현의 퍼포먼스도 모두 그가 상상했던 그림보다 더욱 괜찮게 나왔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 저 부분.
밴드 멤버를 확인하듯이 뒤를 한번 돌아본 루카가 다시 정면을 보고 활짝 웃는 건 좋았다. 정말이지 거기까진 완벽한 그림이었는데.
- don’t care what the hell you say.
탁.
스티브 로이가 재생되던 화면을 멈추곤 여섯 번째로 이마를 짚었다.
정지된 화면에서 비속어를 내뱉은 루카가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뒤로 놀란 아이들의 얼굴이 한 화면에 잡혔다.
원래 가사는 ‘don’t care what you say’.
여기에 루카가 대담하게 욕을… 아니, 변화를 준 것이다.
물론, 이후에 재밌다는 듯이 웃은 주디스 외 아이들로 인해서 이조차도 연출처럼 느껴졌지만… 음, 그렇게 생각하면 또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런데 가사를 욕설로 바꾸면… 이거 가족 영화인데…?
스티브 로이의 머릿속에서 치열한 전쟁이 이루어졌다.
연주 장면은 스티브의 의견으로 인해서 원 테이크 방식으로 촬영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 정 못 쓰겠으면 필요한 부분만 재촬영해서 삽입해도 괜찮았다.
스티브 로이가 고민에 빠진 사이.
아이들의 분위기는 참 기묘했다.
정확히는, 도현과 주디스, 루카 그리고 헤레이즈 주변의 공기가 기묘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스티브 로이 감독은 루카가 자신의 밴드 멤버를 돌아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날 있었던 일을 아는 아이들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특히, 그 장면에서 루카와 눈이 마주쳤던 도현은 더욱.
도현은 조금 전의 촬영을 떠올렸다.
기분이 고양되고, 연기를 위한 연주를 넘어서 그 자체를 즐기게 된 순간.
루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대 아래서 반짝이는 푸른 눈을 마주치자, 처음으로 밴드 연주를 했던 순간이 겹쳐졌다. 도현이 그에게 가지고 있던 경계심이 풀리고,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던 결정적인 계기가.
그리고 다시 앞을 돌아본 루카는 거침없이 가사를 내뱉었다.
도현은 일순,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혹시 나한테 욕한 건가?
진짜로? 촬영 중인데…?
아니, 그냥 애드리브일 수 있잖아. 캐시 와일드가 했을 법한 행동이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설마, 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촬영 중에 그럴 리가…라고 생각되다가도 근데 루카가 그런 걸 신경 쓰던가? 하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놀라움이 전부였고, 그다음에는 헛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면, 루카는 첫 사전 미팅 날 때부터 거칠 게 없었다. 앞으로 함께 연기할 동료 배우인데 마음에 안 든다고 무시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니, 그동안 루카가 많이 눌렀구나 싶었다. 실제로 촬영이 진행될수록 브레디를 무시하던 기색이 줄어들기도 했다.
주디스의 눈동자가 루카를 봤다가 도현을 봤다가 아주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흔들리는 동공이 매우 당황스러워하는 거 같았다.
이상한 건, 헤레이즈에게서도 시선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혹시 헤레이즈도…. 도현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으나, 곧 그 생각을 접었다.
헤레이즈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그는 지금까지 모르는 척 굴었다. 정말 그때의 일을 알면서 그렇게 행동했다면, 앞으로도 제게 무언갈 말할 생각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다면 굳이 캐내기보다는 묻어두는 편이 나았다.
도현은 헤레이즈에게서 신경을 거두고 스티브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루카를 은근슬쩍 쳐다보았다.
그 개사가 정말 자신을 향한 건지, 아니면 그저 역할에 어울리는 애드리브를 한 건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루카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기보다…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오히려 안심됐다.
루카가 전처럼 돌아간 거 같아서.
그 일이 있은 후, 루카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가끔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일 때가 있었다. 루카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촬영을 마치자고 마음먹었으면서도, 무언가 변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었는데….
‘그래도 이제 괜찮나 보네.’
염치없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안도감이 차올랐다.
도현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침내 스티브 로이 감독이 결정 내렸다.
“일단, 촬영부터 다시 합시다. 어차피 여러 번 촬영하려고 했으니까 촬영을 마친 후에 회의를 통해 정하도록 하죠.”
그가 한 말에 촬영장은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콜린이 ‘또 해야 해?’ 하는 얼굴로 거멓게 죽었다. 아마, 유일하게 실수를 저지른 탓에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거 같았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브레디가 콜린에게 다가가 격려를 하는 걸 보면서, 도현은 조금 뻐근해진 어깨를 풀었다.
다시 한번 연주해야 할 때였다.
* * *
“크랭크업하겠습니다!”
짝짝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울렸다. 도현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열심히 박수쳤다.
주디스와 브레디는 촬영이 끝나는 게 아쉬운지 눈물을 보였다. 아이들이 훌쩍이자 덩달아 울컥한 얼굴의 콜린이 그들을 꽉 안아주었다.
스티브 로이는 그동안 촬영했던 배우들에게 한 명 한 명 인사를 건네고서는, 도현에게 다가왔다. 팔을 벌리는 그에게 도현도 팔을 벌려 그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감독님 덕분에 정말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거든요. 잊지 못할 촬영이 될 거예요.”
마지막 순간이니만큼, 도현은 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도현의 말에 스티브 감독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 감정 기복이 드물었던 어린 배우가 솔직하게 이야기한 게 의외롭게 다가왔는지, 그는 퍽 감동한 표정을 짓고는 도현을 다시 한번 끌어안아 토닥여 주었다.
“너를 캐스팅 한 일은 내가 이번 해에서 제일 잘한 일 중 하나라는 거 아니? 넌 항상 내가 생각한 것보다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어.”
그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감독과 배우로 다시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도현은 웃으면서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동의했다.
이후, 도현은 촬영장 내의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작별 인사 끝에 남은 인원은, 도현과 같이 연기했던 아역 배우들이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점심 테이블 멤버들이 한곳에 모였다.
도현은 아이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감상에 빠졌다.
사실 즐거웠던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브레디의 일면을 보았고,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마지막 한 주는 거의 최악의 상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분명히 즐거웠던 순간이 있었고, 그건 지금도 생생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브레디가 훌쩍이며 도현에게 말했다.
도현은 마음이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앞으로 볼 일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브레디에게서 보았던 그 눈빛이 다 지난 일처럼 느껴졌다.
“나도 고마웠어.”
도현이 웃으며 말하자 브레디는 어째선지 더 울컥한 듯 눈시울을 붉혔다. 도현은 한동안 브레디를 달래주어야 했다.
아이들과 차례로 인사를 나누다가, 루카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눈 인사는 짤막하고 간결했다.
그렇게, 촬영이 끝이 났다.
* * *
“인사 다 했어?”
“네. 오스카는요?”
“나도.”
오스카는 한 달 반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촬영장에 출근하면서 몇몇 매니저와 스태프들과 안면을 튼 모양이었다.
오스카가 도현을 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평소에도 참 나이에 맞지 않게 차분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촬영 마지막 날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물론 도현이 울 거란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좀 더 감정적인 반응을 보여줄 줄 알았는데. 오스카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돌아가려던 오스카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눈을 깜빡였다.
“도현, 친구가 너랑 할 말 있는 거 같은데?”
“네?”
인사는 아까 다 나눴는데.
대체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본 도현은 의외의 인물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바로 가야 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따라와. 잠깐 할 말 있어.”
도현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헤레이즈였다. 촬영장에서 내내 보았던 왁스로 뒤로 넘긴 머리카락이 아니라 차분하게 내린 앞머리라서 조금 낯설었다.
도현이 오스카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가 흐뭇한 얼굴로 급할 거 없으니 천천히 얘기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무래도 헤어짐이 아쉬운 아이들이 미련이 남아 그러는 줄 아는 거 같았다.
헤레이즈와 딱히 그런 사이는 아닌 도현이었지만, 정정하지 않는 게 나을 오해인 거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이즈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적당히 한적한 공간이었다. 멀리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이긴 해도 대화 소리가 들릴 것 같진 않았다.
멈춰 선 헤레이즈에 자연히 도현은 그와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도현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잠시 아래를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올린 헤레이즈가 입을 뗐다.
“나는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난데없이 말한 헤레이즈는 도현의 반응을 살피듯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잔잔한 검은 눈동자에 질린 얼굴을 했다.
“내가 아는 거 알고 있었어?”
“완전히 확신한 건 아니고… 그럴 수 있겠다고 짐작 정도만 했어.”
“어떻게?”
“아까 모니터링할 때 쳐다봤잖아.”
“아.”
헤레이즈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 들켰구나. 그동안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들켰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그렇다고 그걸 눈치채는 게 보통인가.’
헤레이즈가 가벼운 의문을 갖는 사이, 도현이 물었다.
“지금까지 숨겼으면서 왜 얘기하는 거야?”
“아까 들었잖아. 난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한다고.”
도현이 미간을 찡그렸다. 두 눈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있는 거 같았다. 혹은 그냥 헤레이즈의 말을 의심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헤레이즈는 진심이었다.
그날 좀 상황이 안 좋긴 했지만,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도현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주디스에게 말한 것도 루카의 뒷담을 했다기보다는 그냥 본인의 심정을 이야기한 것뿐이고. 도현은 제 입으로 루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고 못 박기도 했다.
그러한 도현의 태도에 루카가 상처받기는 했지만, 헤레이즈가 봤을 때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루카의 문제지 도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로 굳이 잘못한 사람을 고르자면 제멋대로 일을 추진한 아이들이었다. 도현과 루카는 그냥 입장이 달랐을 뿐이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언뜻 시비조처럼 보였지만, 목소리엔 정말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헤레이즈가 살짝 움찔했다.
원래는 그도 이렇게 말할 계획이 없었다.
그냥 거슬렸다.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처럼 가라앉아서는 죽은 눈을 하는 게.
‘이걸 어떻게 말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