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마주하는 것 (16)
“이야기는 다 했어?”
오스카의 물음에 도현이 긍정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도현의 표정에는 묘한 찝찝함이 어려 있었다.
‘결국 이유를 못 들었어.’
도현의 질문에도 헤레이즈는 딴청을 부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더니 얼렁뚱땅 다른 얘기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누가 봐도 대놓고 피하는 거였다.
당사자가 입을 열 생각이 없는데 캐묻는 건 도현에게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어영부영 넘어가서 어정쩡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왜 마무리가 다 이 모양이지.
뭐 하나 시원하게 마무리 지은 것 없이 하나씩 찜찜함이 남았다. 도현이 지친 얼굴로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찜찜함을 받아들인 도현이 조수석에 탑승했다. 그러면서 오늘 하루, 예상치 못했던 일이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다.
루카의 돌발적인 행동도 그렇고.
브레디에 대한 감정도 그렇고.
헤레이즈의 갑작스러운 발언도….
- 난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왜 그렇게 말했을까.
당시에는 당황스러움에 자세히 묻지 못했는데, 이제 와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그냥 위로의 의미였다고 생각해봐도 평소의 헤레이즈의 이미지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가 위로한답시고 굳이 도현을 따로 불러내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도현의 얼굴에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웃음이 올라왔다.
재밌는 일이었다.
일을 주도했던 주디스조차 눈치를 보면서도 도현이 잘못했다는 듯이 굴었다. 그날 이후로, 주디스는 도현을 흘끔흘끔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게 눈치 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글쎄. 도현이 느낀 건 달랐다. 주디스의 눈은 분명 도현이 루카에게 사과하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이유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었다.
그때 이후 주디스와 루카의 사이는 예전만 못해졌으니.
도현이 짐작하건대, 그 원망의 화살을 도현에게 돌리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죄책감이 드는지 어두운 낯을 했는데, 도현은 그 갈팡질팡한 얼굴을 보고 그저 침묵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대화도 몇 번 나눠보지 않았던 헤레이즈가, 그 일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가 내게 잘못이 없다고 한다.
도현은 이제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생각대로 된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많이 아쉬워?”
도현의 침묵을 아쉬움으로 이해한 오스카가 부드러운 투로 물었다. 종종 이렇게, 오스카는 도현을 아주 어린 동생 다루듯이 대했다.
실제로 그 정도의 나이 차이긴 하지만….
이럴 때면 그와 자신의 관계가 매니저와 아티스트가 아니라 형과 동생인 거 같아서 혼란스러움이 일었다.
형은 언제나 계약서로 묶인 관계에서 비즈니스 이상으로 나아간 적이 없고, 할 일만 하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형의 가치관과 도현의 경험이 상충하며 일어나는 혼란이었다.
오스카가 잘해주는 게 업무의 측면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씩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다.
“모르겠어요.”
나온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오스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도현은 또다시 생각에 잠긴 건지 미동 없이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스카는 초록불이 들어온 신호등에 다시 액셀을 밟으며 생각했다.
알고는 있을까.
항상 침착하고 야무지게만 굴다가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걸.
* * *
영화 촬영으로 인해 뭉쳤던 아이들은 여름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제각기 일상으로 돌아갔다.
8월 말에서 9월 초.
미국의 초등학교가 개학하는 시기.
한 주에 몇 번이고 마주쳤던 아이들과 뜨거웠던 조명, 바닷가의 파도 소리, 그리고 산타 모니카의 백사장은 모두 한여름의 꿈처럼 지나갔지만, 일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할!”
“…또 같은 반이야?”
헤레이즈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렇게 반응하면 내가 섭섭하잖아.”
사람 좋게 웃은 제이스가 할의 옆자리에 앉았다. 헤레이즈가 그의 팔을 흘긋 보더니 말했다.
“너 뭘 하고 왔길래 이렇게 탔어?”
원래도 바깥 활동을 워낙 많이 해서 밀색에 가까운 피부색이었는데, 방학 동안 대체 무얼 한 건지 거의 갈색이 되어서 왔다. 머리카락 색이랑 깔 맞춤한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가 방학 동안 수영 캠프 간다고 했잖아!”
그것도 잊은 거냐며 제이스가 헤레이즈를 잡고 징징거렸다. 헤레이즈가 질색하며 떼어냈지만, 그보다 제이스가 좀 더 질겼다.
“안 잊었어! 안 잊었다고! 너 저번 여름 방학에는 이 정도로 타서 오지 않았잖아!”
헤레이즈가 두 손에 두 발까지 다 들고 항복하고 나서야 제이스가 실실 웃으며 그를 놓아주었다.
“그때는 실내 활동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하루 종일 수영만 했거든. 야외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다 타버렸어.”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제이스의 눈이 재밌다는 듯이 빛났다.
“그런데 나 이번에도 걔 만났다?”
“걔?”
“작년에. 내가 수영 캠프에서 만났다는 애 있잖아.”
“아, 네가 수영 시합에서 졌다던.”
“배드민턴은 내가 더 많이 이겼거든! 왜 그런 것만 기억하는 거야!”
제이스가 억울한 낯을 했다.
헤레이즈가 이해할 수 없는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수영 선수가 될 거란 애가 배드민턴만 이긴 게 자랑인 걸까?
그 한심해하는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제이스가 웃음 지었다. 어딘가 통쾌하단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달랐단 말야.”
그 미소에 헤레이즈가 생각했다.
저 집요함의 화신한테 누가 또 걸렸구나.
워낙 세상에 어둠이 없다는 듯 환하게 웃고 다녀서 다들 제이스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지만, 그는 단연코 헤레이즈가 본 인물 중에서 가장 끈질겼다. 헤레이즈는 누구인지 모를 이에게 깊은 유감을 느꼈다.
“내가 이겼어. 두 번이나!”
“몇 번 시합했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초를 치는 헤레이즈의 반응에 제이스가 발끈했다. 헤레이즈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들어봐! 걔가 자기가 절대 질 일은 없다고 기고만장하다가….”
“알았으니까 가까이 오지 마.”
점점 몸이 이쪽으로 쏠리는 제이스에 헤레이즈가 그를 밀어내고 고개를 쭉 뒤로 뺐다. 그 격렬한 거부에 제이스가 항변했다.
“왜? 나 아침에 깨끗이 씻고 왔어!”
“넌 존재 자체로 더러워.”
“너무하잖아!”
또다시 시작된 제이스의 징징거림에 헤레이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쟤랑 일 년을 지내야 했다.
운동하는 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침에는 깨끗하다가도 쉬는 시간만 지나면 땀을 흘린 채로 돌아왔다. 그때마다 헤레이즈는 헛구역질을 하며 마스크를 꼈다.
분명 제이스 테일러는 헤레이즈의 기준치에 부합하는 인간형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소꿉친구가 되어 붙어 다니고 있었다. 그건 전적으로 거머리보다 질긴 제이스의 탓이었다.
왜 부모님은 쟤 옆집으로 이사를 와서 내가…. 헤레이즈의 인생이 잘못된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그때를 지목할 것이었다.
3년 내내 같은 반이 되어 붙어 다녔으니 이번만은 떨어지길 바랐는데….
헤레이즈는 촬영장에서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공기처럼 옆에 있었던 도현을 떠올렸다.
‘역시 묶어서라도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가 그리웠다. 진심으로.
* * *
“안녕! 방학 동안 잘 지냈어?”
“안녕. 잘 지냈지.”
“루카! 안녕!”
“응, 안녕!”
지나가는 아이들마다 소녀에게 아는 척을 했다. 소녀가 워낙에 발이 넓은 편이기도 했고, 어렸을 때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해 이름을 알린 소녀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녀, 루카는 촬영이 끝난 후 새로이 밝은 갈색으로 덮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조금 짧아진 머리카락이 가슴께에서 살랑거렸다.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보라색 브릿지가 사라지자 푸른색 눈동자가 더욱 도드라졌다. 부드러운 머리색이 인상을 누그러트린 탓에 한층 순해 보였지만, 불량아 이미지의 잘생긴 소녀에서 활기 있어 보이는 잘생긴 소녀 정도의 변화였다.
반에 들어가자 루카의 친구, 아이린이 달려와서 루카를 끌어안았다. 루카는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 상대를 마주 끌어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자리로 가서 앉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그 주위는 금방 아이들로 바글거렸다.
아이들은 저마다 방학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떠들었다. 아이린의 여행 이야기도 재밌었지만, 아이들이 가장 흥미로워한 건 루카의 촬영이었다.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루카! 네 계정에 나온 걔 누구야?”
“아! 맞아, 나도 봤어! 하트 머리띠!”
멈칫.
루카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아직 눈치가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루카의 심정도 모르고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역시 삭제할 걸 그랬나.’
그렇게 생각한 루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해? 루카는 도현의 눈치를 보는 건 조금도, 아주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걔랑 별로 안 친해. 그러니까 그 얘기 꺼내지 마.”
조금은 쌀쌀맞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도현과 관련해서 떠들었던 아이들은 조금 움찔하며 눈치를 봤지만, 곧 잊고선 다른 이야기로 떠들었다. 루카가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적응한 지 오래였다.
아이린이 별안간 볼멘소리로 말했다.
“루카, 너 연기 계속할 거야?”
“응? 왜?”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명백히 불만을 담은 목소리에 루카가 의아한 얼굴로 아이린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이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노는 시간이 너무 줄어들잖아. 우리 방학에 만나서 논 게 세 번밖에 안 돼! 세상에, 말이 돼? 세 번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듯이 흥분한 기색으로 따지고 드는 아이린에 루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적게 놀았는지 몰랐어.”
“이제 알았으니 안 할 거야?”
아이린이 조금 새침하게 말했다. 루카처럼 연예계 집안은 아니지만, 아이린은 사업가인 부모님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귀하게 자란 태가 나는 모습과 새침한 말투는 소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이제 촬영 끝났으니까 많이 놀면 되잖아.”
루카가 말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아이린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또 영화 같은 거 찍으면 이렇게 바빠질 거 아니야.”
아이린이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방학 동안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아이린에게 미안하기는 해도 이건 루카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안 돼.”
“왜?”
“내가 보란 듯이 이겨야 할 애가 있어.”
루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
본판이 워낙에 출중한 탓에 사악한 미소마저도 멋있었지만, 그걸 가까이서 본 아이린은 식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대체 누가 스위치를 누른 거야?’
아이린은 루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 소리는 그만큼 루카의 성질머리를 가까운 곳에서 봐왔다는 거였다. 비합리적인 이유로 누군갈 괴롭히는 행동은 하지는 않아도 한번 화나게 하면 말리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아이린은 작년 생일 파티 때 루카가 레기의 얼굴에 풀 스윙으로 케이크를 던져버렸던 걸 잊지 않았다.
루카는 참지 않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유감.’
아이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후, 누군지 모를 상대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러나저러나, 아이린은 루카의 친구였다.
* * *
탁, 탁.
진은 전속력으로 학교를 항해 달렸다. 멀리서 아빠가 위험하니 뛰지 말라고 외치는 것에 짧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다시 숨이 차도록 달렸다.
타닥!
“허, 허억! 나 많이 안 늦었지?”
“하나도 안 늦었어! 괜찮아!”
“하나도 안 늦긴 무슨! 십 분이나 지났잖아.”
다비드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는 것에 니콜라스가 곧바로 반박했다. 진이 숨을 고른 후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오늘은 개학식.
반 배정을 확인하기 전에 교문 앞에 모두 모인 상태였다. 다 같이 확인하러 가자는 진의 의견에 따른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가 이렇게 지각했지만.
니콜라스의 타박이 쏟아지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진,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진이 눈을 크게 떴다. 방학 동안 진은 네덜란드에, 도현은 촬영장에 있느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한동안 눈을 찌를 정도로 길게 길렀던 앞머리가, 눈썹 바로 아래 정도까지 깔끔하게 잘려 정돈되어 있었다.
긴 앞머리도 어울렸지만, 역시 도현은 단정한 게 제일 잘 어울렸다. 반듯한 복장과 단정한 머리 덕에 모범생인 태가 났다. 진이 알던 도현의 귀환이었다.
오랜만에 본 도현은 여전히 하얬고, 여전히 반짝반짝했다. 진을 볼 때마다 은은하게 짓는 엷은 미소도 여전했다.
“응! 오랜만!”
진이 활짝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