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17)화 (218/582)

제217화. 마주하는 것 (17)

“어어….”

진이 바보 같은 소리를 내었다.

“진짜? 정말로?”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여러 번 되묻기도 했다. 도현도 꼼짝없이 굳은 채로 게시판을 보았다.

“이럴 순 없어!”

의심의 단계를 거쳐 인정은 스쳐 지나간 진이 분노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반 배정은 제일 앞 칸에 진의 이름이 올라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다비드가 있는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 내려가도, 니콜라스의 ‘Ni’나 도현의 ‘Do’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른 반이라니!”

반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도현도 조금은 당황한 채로 게시판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다시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왜지?’

얼굴에 진심으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반 배정은 CogAT 테스트의 성적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은 모두 최고 등급 stanine 9을 받았다. 그래서 도현은 솔직히, 당연히 또 같은 반이 될 줄 알았다.

‘한 반에 몰아넣는 게 아닌 건가. 아니면 stanine 9을 받은 애들이 생각보다 많았을 수도….’

도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비드의 말이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 여기. 네 이름 있다. Do-hyun Lee.”

정말이었다.

제 이름을 확인한 도현은 빠르게 같은 칸에 있는 이름을 훑었다. 다 볼 필요도 없이 ‘N’으로 시작하는 이름부터 찾으면 됐다.

그리고.

“나도 있다!”

니콜라스가 외쳤다.

다섯 줄 정도 떨어진 곳에, 니콜라스 가비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힌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이라도 같은 반이 된 것에 도현이 반사적인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때, 니콜라스가 무언갈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담임 선생님이 해리인데?”

니콜라스의 말에 도현은 가장 상단에, 선생님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보았다.

[Harry class]

니콜라스의 말대로, 해리 선생님의 이름이 굵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선생님과 딱히 가까이 지낸 건 아닌데도 왠지 모를 반가움이 들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진은 여전히 순순히 납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실은 도현도 진과 떨어진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도현이 받은 충격보다 과하게 반응하는 진 덕분에 차분해질 수 있었다.

열심히 분통을 터트리던 진은 이내 체념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시무룩해진 진에 다비드가 쉬는 시간에 찾아가서 놀고, 점심을 같이 먹으면 되지 않냐면서 위로했다.

다비드가 진을 위로하는 사이, 도현은 니콜라스를 보았다. 4학년은 니콜라스만 같은 반이라니.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다 같은 반이 될 거라고 추호의 의심 없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낯설었다.

도현의 시선을 느낀 니콜라스가 문득 이쪽을 바라보았다. 생기 넘치는 에메랄드색 눈동자에 도현이 비쳤다. 니콜라스가 눈동자만큼이나 생동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일 년 동안 잘 지내자.”

“응, 나도 잘 부탁해.”

도현은 그를 보며 마주 웃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쩌면 니콜라스와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문득 들었다.

잠시 후.

도현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새로운 시작. 거기에 친구가 두엇 빠진 건 아쉽긴 하나 다비드의 말대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보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나 진에게 의지했던가?’

아이들은 도현이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왔다. 도현이 방학 동안 영화 촬영을 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간 거 같았다. 딱히 진이나 니콜라스 같은 아이들이 말했다기보다는 루카의 계정에 올라간 사진 탓에 이야기가 퍼진 거 같았다.

샌디에이고 델마.

여유롭고 부유한 동네지만, 동시에 조용한 곳이었다. 델마 아카데미에서 도현은 유독 튀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도현은 아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새삼스럽게 진의 빈자리를 느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진이 아이들과 도현 사이에서 중재를 해주었던 것이다. 도현은 지금껏 자신이 알게 모르게 진의 비호를 받아왔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니콜라스는 알아서 살아남으란 듯이 슬쩍 빠져 있었다. 니콜라스는 원래도 쏟아지는 관심을 즐길 줄 알던 진과 다르게 귀찮아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편이었다.

생각해보면 진이 특이한 경우였다. 같은 친구를 그 정도로 섬세하게 신경 써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도현은 지금껏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이 실은 당연하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이따가 보면 고맙다고 해야겠다.’

도현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할 진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루카는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어?”

“무슨 영화를 찍은 거야?”

도현은 직감했다.

지금부터는, 홀로서기 해야 할 거란 걸.

* * *

카페테리아 라운지.

4교시를 마치고 모인 진, 니콜라스, 다비드, 도현은 늘 앉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도현은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이 당연한 풍경이 왜인지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둥근 테이블이 아니라 직사각형의 테이블에서 여섯 명이 둘러싸서 밥을 먹었는데.

크랭크 업을 한 날 모든 걸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은편에서 루카가 웃으며 말을 걸고, 그 옆에서 헤레이즈는 반듯한 자세로 채소를 오물거리고, 왼쪽에서는 콜린이 장난을 치고. 그리고….

워낙 안 좋은 일이 많아서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금 드는 감정은 그리움과 언뜻 닮아 있었다. 도현이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가 놓았다.

“학교 오랜만에 오니까 좀 낯선 거 있지. 애들도 엄청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진이 도현을 쳐다보았다.

“넌 안 그래?”

도현이 진의 질문에 멋쩍은 듯이 말했다.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 다녀서.”

“…아! 촬영 장소가 학교였지!”

진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도현의 말에 다비드가 불쌍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방학에도 내내 학교에 있었다는 것에 동정심을 느끼는 거 같았다.

빨리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보라는 진의 재촉에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ATT 멤버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ATT가 뭔지 모르는 눈치인 니콜라스와 다르게 진과 다비드는 알고 있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ATT가 선생님이었다고? 그럼 코먼 영은? 코먼 영도?”

“응. 코먼은 내가 아니라 루카를 가르쳐 줬지만. 나는 앵거스한테 배웠어.”

“와….”

진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쑥스러움이 많고 무언가를 할 때 어색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 그냥 평범해 보이다가도, 이런 이야길 들을 때마다 좀 새롭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진이 빤히 쳐다보는 것에 볼을 긁적이던 도현은 방금 전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도현이 느닷없이 고맙다고 말하자 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뭐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씨익 웃었다.

도현은 그 반응이 너무 진다워서 조금 크게 웃었다.

* * *

4학년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니콜라스와 둘만 있는 상황에는 아직 좀 더 적응이 필요하긴 했지만, 두 사람 다 서로를 어색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금방 해결될 거 같았다.

의외로 니콜라스와 도현은 잘 맞았다. 진이 있을 때처럼 딱 붙어 다니지는 않았지만, 니콜라스는 종종 다른 친구들과 나가 놀고선 돌아왔고, 도현은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도 꼭 무언가 같이해야 할 일이 있으면 둘이 뭉쳤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그리고 지금.

“안녕하세요, 메리.”

“잘 왔어. 한 달 만인가?”

촬영 때문에 한동안 하지 못했던 상담을 받으러 메리에게 방문한 참이었다.

도현의 얼굴에 옅은 긴장이 스쳤다.

촬영이 끝난 후부터 개강한 이후로 계속. 도현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뒤로 갈수록 다른 문제가 터져 일이 복잡하게 되었긴 했지만. 모든 일이 끝난 후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본 결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그거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문제.

도현은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루다가 그런 꼴이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부모님에게 말할 용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찾은 해결책이 메리였다.

조언과 도움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면서 동시에 부모님에게 말을 꺼내기 수월해지기 위한 예행연습이기도 했다.

무슨 음료를 마실 거냐는 메리의 질문에 도현은 허브 차를 말했다. 메리가 도현을 위해서 코코아를 사다 둔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실제로 코코아를 마신 적은 별로 없었다.

도현은 이곳에 오면 늘 코코아보다는 허브 차를 마셨다. 첫 상담 때 허브 차에서 났던 향기가 인상 깊었는지, 상담실을 생각하면 은은한 허브 향이 자동으로 떠올라서였다.

메리가 타준 허브 차를 마시자 몸의 긴장이 풀렸다. 여러 번 반복되었던 행동은 이제 도현에게 있어서 일종의 준비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방학이 끝났지?”

긴장을 풀어주는 가벼운 대화가 오갔다. 신변잡기식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허브 향이 상담실 가득 퍼졌다.

스몰토크가 끝나갈 때 즈음.

가볍게 심호흡을 한 도현이 입을 열었다.

“메리, 저 한국으로 가려고 해요.”

말을 꺼낸 도현이 메리보다 더 놀란 듯 멈칫했다. 말하겠다고 생각했고, 말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으나 도현은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거야, 아빠가 미국에 오기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이 나왔다.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침묵한 메리가 도현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해 볼래?”

“…제 아빠가 한국에서 생활하시는 건 아시죠?”

메리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메리가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 퇴원하고 정기 검진을 위해 엄마가 미국에 남은 것. 6개월 후에 완치 판정을 받았던 것. 그러나 도현이 친구들이 있는 곳을 떠나기 싫어했다는 것. 그래서 부모님이 떨어져 살기로 결심한 것.

최대한 사감을 섞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만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의도대로 됐는지는 모르겠다. 메리는 그저 깊은 눈동자로 도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덕분에 도현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두 꺼낼 수가 있었다.

여름 방학 동안 아빠가 미국에 왔던 것. 그때 부모님께 이 결정을 말씀드리려고 했다는 것.

그러나 끝내 말하지 못했다는 것까지.

뒷부분은 이야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착하는 순간까지 고민했지만, 무슨 일이든 들어줄 것처럼 눈을 마주쳐 오니 자연스럽게 입을 열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거예요.”

말을 마친 도현이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등에 소파의 푹신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말하고 나니 후련했다.

당사자에게 말한 것도 아니고, 제3자에게 털어놓았을 뿐인데 아주 오랫동안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메리는 천천히 도현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는 거 같았다. 그녀는 늘 이렇듯, 무언가를 함부로 말하는 일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 도현이 그녀에게 마음의 장벽을 무난하게 허물 수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잠시 후, 메리가 입을 열었다.

“도현은, 한국에 가고 싶니?”

“…….”

분명 아까 이야기를 들었으니 도현의 심정을 짐작할 텐데, 직접적으로 묻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도현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가기 싫어요.

이미 다 알 텐데도, 그 한마디를 내뱉기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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