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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18)화 (219/582)

제218화. 마주하는 것 (18)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정적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 도현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궜다. 낯빛은 태연했지만, 잔을 쥔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손잡이 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메리가 테이블 중앙에 있는 쿠키를 도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슬쩍 메리를 본 도현이 쿠키 하나를 집어 오물거렸다. 덕분에 뻣뻣했던 공기가 조금 풀렸다.

도현이 다 먹은 걸 확인한 메리가 물었다.

“그럼 이렇게 바꿔서 물어볼게. 왜 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부모님이 피해를 받고 계시니까요.”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대답이 나왔다. 당연하다는 투로 말하는 도현에 메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도로 열었다.

“거기에 관련해서 부모님의 생각을 들어본 적이 있니?”

“…아니요.”

“너는 똑똑하니까 잘 알겠지. 지금 네가 판단한 건, 오롯이 너의 기준에서 이루어진 일이야. 그렇지?”

메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나, 아무런 근거 없이 판단한 게 아니었다.

도현은 너무 감정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부러 느릿하게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한국에 가고 싶어 하셨어요. 제게 직접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두 분이 전화 통화를 하는 걸 우연히… 엿들었거든요.”

엿듣는다는 게 떳떳한 일이 아니다 보니 말 사이에 떨떠름한 공백이 생겼다. ‘우연히’라는 단어에 유독 강세가 들어가 있었지만, 메리는 그런 사소한 부분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도현. 이번 여름 방학 내내 영화 촬영을 했다고 했지? 그럼 방학 동안 친구들과 만나서 논 적이 있니?”

“아니요. 방학 동안 보지 못했어요.”

갑작스럽게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하는 얼굴이었으나 순순히 대답했다.

“너는 친구들과 만나서 노는 걸 좋아하지?”

“네. 좋아해요.”

“그런데 영화 촬영을 위해서 친구들과 놀지 못하는 걸 감수한 거고?”

“…네.”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메리가 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도현의 반응에서 메리도 그걸 느꼈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도현은 충분히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아이였으니까. 오히려 혼자 생각하게 두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메리의 말은 이해했어요.”

메리의 생각대로, 도현은 조금 전과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약간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처음에는 자신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메리는 내가 아니라서, 메리는 그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 생각이 다 맞을까?

지금까지 도현은 타인을 파악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달 전이었더라면 그랬을 터였다.

을 촬영하면서 도현은 몇 번이고 예상 밖의 일을 겪었다. 다른 이를 관찰하는 능력도, 파악하는 눈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은 메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검은 눈동자에 혼란이 가시고 차차 깊게 가라앉자, 메리가 도현의 생각을 끊듯이 입을 열었다.

“도현, 너는 생각이 깊은 아이야. 그건 분명히 너의 장점이야. 너를 한층 더 배려심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주지. 누구든 그런 너를 사랑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을 거야. 나도 네가 굉장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걸.”

낯선 표현에 도현의 창백한 뺨에 부드러운 혈색이 돌았다. 깊게 가라앉던 검은 눈에는 다시 생기가 차올랐다.

사랑스럽다니.

예쁘다, 멋지다, 그런 표현은 들어봤어도 저렇게 몽글거리는 부끄러운 단어를 바로 앞에서 듣자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도현이 슬쩍 메리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메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도현. 그건 너의 장점이지만 동시에 네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기도 해. 너는 깊게 생각하고 판단해서 허투루 행동하는 법이 없지만, 네 안에서 모든 생각과 판단을 끝내버리기 때문에 너의 세계에 갇히기 쉽거든.”

메리의 말이 도현을 콕콕 찔렀다.

실제로 얼마 전에 그렇게 행동하다가 최악의 상황까지 간 전적이 있었으니까.

도현은 메리가 이토록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에 놀라는 한편, 속내가 낱낱이 까발려지는 기분에 당장이라도 자리에 일어나고 싶을 만큼 불편했다.

“도현, 내 생각에 너는 지금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어 있어. 부모님께 한국에 관련된 얘기를 꺼낸다고 해서 꼭 돌아가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건 소통을 통해 나올 수 있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지.”

하나의 결과.

도현은 살짝 얼이 나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항상 결과부터 생각했다.

말을 꺼냈을 때 나올 결과.

한국에 돌아가고, 친구들과 헤어질 미래의 모습.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숙제를 줄게, 도현. 이건 다음 시간까지 해서 나에게 검사를 맡아야 하는 일이야.”

“숙제요?”

“그래, 숙제. 학교 숙제 많이 해봤지? 그거랑 똑같은 숙제야. 숙제 내용을 알려줄게. 다음에 나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 부모님과 대화하는 거야.”

꽤 단호한 어투라 도현이 멍한 눈으로 메리를 쳐다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대화야. ‘한국에 가겠다’라는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대화.”

너의 생각을 말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들으면서 서로 소통하는 것.

메리는 도현이 ‘대화’라는 단어를 모르는 아주 어린 아이라도 된 것처럼 몇 번이나 강조하며 설명했다. 도현이 조금 질린 표정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알겠어요, 대화할게요. 통보가 아니라 대화요.”

도현이 백기를 흔들 때가 되어서야 메리가 방긋 웃었다. 심각했던 상황이 장난스러워진 것에 도현은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메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겁게 가라앉았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린 것을 보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 생각이 많은 소년은 우울하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면 특히나 더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너무 무거운 분위기보다는, 적당히 부드러운 분위기로 유도하는 편이 좋았다.

여기서 더 생각하게 두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으니 메리는 도현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돌아오며 도현의 주의를 끈 메리가 말했다.

“숙제는 다음 시간까지 해 오는 거로 하고. 촬영은 어땠는지 말해줄래? 궁금하거든.”

주춤.

허브 차를 입가로 가져오던 도현이 얼기라도 한 것처럼 일순간 동작을 멈췄다. 찻잔을 들어 올린 손이 무색하게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도로 테이블에 내려놓은 도현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메리를 담았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몇 번을 달싹이다가 다물기를 반복하는 입술에도 메리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꺼낸 말인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나올 모양인 거 같았다.

이윽고.

도현이 한숨처럼 말했다.

“저는 정말 한심한 인간이에요.”

“…오.”

서론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살짝 높이가 있는 소파 탓에 간당간당하게 바닥에 발이 닿는 조그마한 소년이 회한이 담긴 눈빛으로 털어놓은 말에, 메리는 잠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되었다.

* * *

심상치 않은 첫 마디로 메리에게 묘한 기분을 선사한 도현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메리는 도현의 이야길 들으며 문득 초반과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의 도현은, 웃는 얼굴과 예의 바른 말투로 ‘나는 너를 전혀 신뢰하지 않으며 너에게 말해줄 건 없다’라고 말했으니까.

물론 대놓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대충 해석하자면 그랬다.

솔직히 어린 내담자 중에서 도현 같은 경우는 처음 봐서 당황스러웠던 적도 많았다. 웃는 얼굴로 돌려 말하는 솜씨가 사회생활을 겪은 어른 못지않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 그럼 그때 속상했겠네.

이렇게 속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 글쎄요.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죠.

가면을 쓴 거 같은 잔잔하게 웃는 낯으로 저렇게 대답했다.

아동과 대화하는 건지, 사회를 겪을 대로 겪어 능구렁이가 된 어른과 대화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메리는 보호자에게 들어서 도현의 성장 배경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그 환경에서 저렇게 클 수 있는지 때때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병원에 입원한 게 아니라 어디 갇혀서 엄한 조기 교육을 받은 게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다행히 메리의 노력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아서, 도현은 어느 순간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여전히 성역은 존재하지만.’

조금의 틈도 내보이지 않는 영역.

그건 메리가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었는데, 주로 퇴원하기 전, 병원에서의 일이었고 또 하나는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길 원치 않는 일이었다.

지금 털어놓는 일도 둘 중 한 가지에 해당했다면 절대로 말하지 않았을 거란 걸 알았다.

그렇게만 보면 아직 먼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도현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도 정말 큰 변화였다.

아니, 성향이라기보다는.

‘트라우마라고 봐야 옳지.’

일 년에 두어 번 방문하는 무관심한 부모.

몇 번이고 바뀌었던 간병인.

배척 속에서 홀로 존재했던 경험.

그 속에서 소년은 애정, 소속감, 존중, 인정, 자아실현 같은 가치를 억압당하고, 제거당했다.

소년의 감정에 관심을 주는 이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감정을 억압한 채로 자라났다. 그때 소년이 연기라는 것에 눈을 돌린 건 큰 행운이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라도 감정을 분출하지 않았더라면 소년의 마음이 어디까지 무너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렇게 감정이 억압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 특징은 도현에게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지, 비스듬히 눈을 내리뜬 소년이 보였다. 검은 깃털처럼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눈 밑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는데, 메리는 그게 마치 소년의 마음속에 낀 먹구름처럼 느껴졌다.

촬영 때 있었던 일을 사감을 제외하고서 시간 순으로 나열한 도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메리는 끼어들지 않고 기다렸다.

도현은 무언가 말할 때 한 가지 습관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전달할 때는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만을 말하고 그다음에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였다.

방금 객관적 상황 전달을 마쳤으니 이젠 개인적 감상이 나올 차례였다.

메리의 생각대로 다시 입을 연 도현이 조곤조곤, 급하지 않게 말했다.

“처음에는 제가 왜 그러는지 몰랐어요. 왜 루카를 그렇게 멀리하고 싶은지… 그게 무슨 감정인지.”

감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자랐으니,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서툴렀다.

“한국 문제와 겹쳤을 때는…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루카가 저를 걱정해서 조언을 해줬는데 저는 오히려 루카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거든요. 그걸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걸 두려워하고.

“그래서 루카와 멀어지기로 했어요. 당시엔 루카가 저와 안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제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어요.”

격한 감정을 회피하지 못하게 되면 마음을 닫고 사람과 거리를 둔다.

“제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걸 누구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았고, 제 개인적인 감정으로 촬영에 지장을 주고 싶지도 않아서 최대한 평소처럼 행동했어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그럴 생각이었고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꾹꾹 눌러 참으며, 때론 감추기 위해서 오히려 친절하고 상냥하게 군다.

“그런데 제가 다 망쳐버렸죠.”

가벼운 자조 같은 목소리였지만, 메리는 검은 눈동자에서 깊고 어두운 혐오를 읽었다.

스스로를 향한 칼날이었다.

도현처럼 감정이 억압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반복적인 일상과 강렬하지 않은 감정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반대로 그 균형이 깨져버리면 트라우마가 자극되고 마는 것이다.

루카라는 아이가 던진 말은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기폭제가 되어, 기어코 도현이 지켜오던 균형을 깨트려버렸다. 그게 트라우마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고.

…그렇다 하더라도 도현은 그 정도가 심했다.

메리가 도현을 가만히 응시했다.

반듯한 자세와 비단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 도자기 같은 피부와 날카로우면서 앳됨이 어려 있는 단정한 이목구비까지.

부족할 거 하나 없어 보이는 외양이지만, 메리는 때때로 그 바닥이 어딘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공허한 속이 엿보였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들킨 것,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상처를 준 것,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촬영에 문제를 일으킬 뻔한 것.

도현이 말한 문제점은 모두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조차 죄악으로 여기고 있었다.

‘본인의 감정조차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은 확실히, 어딘가 비틀렸어.’

일반적으로 감정이 억압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존중받을 가치가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기도 한다. 그러니 도현이 저렇게 여기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도현에게는 그 일반적인 경우와 다른 한 가지 특수성이 있었다.

바로 환경적 변화였다.

과거에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의 환경에서 도현은 충분히 존중받고 있었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부모님, 그를 좋아하는 친구들,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과 객관적으로 봐도 놀라운 성과까지.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하는 건 무리더라도, 어느 정도는 치유되는 게 일반적인데….’

그런 상황에서 이 정도로 스스로에게 가혹한 기준을 세우는 건 메리가 모르는 어떠한 원인이 존재하리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대체 뭘까.

메리는 다시 천천히 생각을 돌려보았다.

일단, 가정 환경부터.

도현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었던 부모님도 태도가 변했고, 보호자에게 듣기로 도현은 그런 부모님에게 딱히 원망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도현과 대화할 때도 그 내용을 들어보면 현재 부모님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잠깐.

원망하지 않고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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