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마주하는 것 (20)
다른 아이들이라면 그저 어르고 달래도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만약 두 사람의 사이가 일반적인 가정과 같았더라면 서운함은 느끼더라도 금방 화해하고 웃고 떠들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애석하게도 도현은 그 두 가지 경우가 모두 아니었다.
서혜나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아득한 심정이 되었다가, 간신히 메리와의 전화 상담을 떠올렸다.
보통 아동 상담이 진행될 때 부모 상담까지 함께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반 상담까지는 아니더라도, 같이 상담 센터에 방문해서 각자 상담을 받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서혜나의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었는데, 그건 도현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네가 알리길 원치 않는 상담 내용을 알고자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도현은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아이들의 경우에 대입해서 생각하면 안 됐다. 도현은 그 비범한 성정답게 구두 약속 정도로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서혜나가 보았을 때 도현이 상담을 받아들인 건 서혜나의 약속을 믿은 게 아니라, 약속을 입에 담는 서혜나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성의, 혹은 제스처였다.
그렇다고 문서화된 어떠한 계약서를 작성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실 그걸 쓴다고 해서 도현이 경계심을 풀 것 같지도 않았다- 서혜나는 최대한 도현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도현이 보는 곳에서 메리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 대신에, 도현이 없을 때 종종 전화를 통한 상담을 받곤 했다.
직접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서 심층적인 상담보다는 가벼운 학부모 상담에 가까워 가끔은 이게 수다인지 상담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는데, 서혜나는 이 순간 메리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 도현은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에요. 자신의 감정이더라도 논리적이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요. 그런 경우에는 감정적 호소보다는 논리적인 설득이 훨씬 효과적이죠.
기억 속의 메리가 입을 열었다.
- 아, 하나 더.
- 절대 거짓말을 하시면 안 돼요. 그게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요. 도현은 우리 생각보다 더, 똑똑하고 섬세한 아이예요. 관찰력도 뛰어나서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을 조합해 상대를 파악하는 일에도 능숙하고요.
- 혜나 씨와 도현이 가장 먼저 쌓아야 할 건 신뢰 관계예요. 과거에 적절한 신뢰 관계를 쌓지 못한 만큼 더욱이요.
- 만약 상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걸 알게 된다면, 아이는 분명히 자신의 경계선 밖으로 밀어낼 거예요. 완벽하게 속일 자신이 없다면 시도하지 않는 걸 추천할게요.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그 수많은 조언과 당부가 없었더라면, 서혜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보다는 도망치기를 택했을 테니까. 그러나 주입식 교육 덕인가, 서혜나는 충동을 뒤로 하고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난 한국에 가고 싶어.”
바로 지금처럼.
시원할 정도로 순순한 인정에 도현의 눈썹이 휘었다. 조금 크게 뜨인 눈동자, 서혜나에게 고정된 시선, 움직임이 멈춘 손가락까지. 놀라움이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이걸 이렇게… 순순히?
도현은 본인이 말해놓고도 조금 황망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살짝 삐끗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지만, 그걸 이렇게 인정해 버리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래요.”
결국, 한참의 침묵 후에 나온 대답은 김이 빠진 듯 묘하게 힘이 없었다.
서혜나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 잔잔한 어조로 말했다.
“첫 몇 개월간은 정말 힘들었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남편과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데 마린느까지 미국에 기반을 마련해야 했으니까.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쳤지.”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도현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어딘가가 따끔따끔 아렸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잖아.’
지금이라도 대화를 포기하고 통보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서혜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재밌었지.”
도현은 정말이지,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원한다고 되었다면 도현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 로봇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 반응에도 서혜나는 비웃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쉬운 것보다 어려운 걸 선호해. 익숙한 환경보다 새로운 환경을 좋아하고, 안전한 길보다는 모험을 택하는 편이야.”
서혜나가 도현을 쳐다보더니 슬쩍 웃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네가 태어나지도 못했을걸. 내가 네 아빠랑 이탈리아에서 만났다고 말해줬지?”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탈리아에 가게 되었는지는 말 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니?”
다시 한번 고개가 끄덕였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가 솔직히 말해줬으니 나도 숨기지 않을게. 그때 나, 가출한 거야.”
“…네?”
“엄마의 집안은 좀 꽉 막힌 구석이 있었거든.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음, 내가 대학교 졸업까지 일 년 정도 남은 시점이었어. 취업 고민으로 이래저래 바쁠 때였지. 어느 날 부모님이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하시는 거야. 좋은 식당을 예약해 놓았다고. 엄마는 기뻤어. 그래도 자식이라고 생각은 하는구나. 좀 오랫동안 안 봤더니 이렇게 찾기도 하는구나, 싶었거든. 그런데 도착하니까, 거기 있는 게 부모님뿐만이 아니더라고.”
말을 하는 서혜나는 허탈해 보였다. 혹은 어이없어하는 거 같기도 했다.
“선 자리였어.”
“…….”
“사실 알고 있었어. 부모님이 내게 기대하는 게 그것밖에 없다는 걸. 그래도 내가 아득바득 노력하면 언젠가 봐줄 거라고 기대했지. 그래서 코피 터져가며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맞선 자리에 내보내지니까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 생각은 상관없이 저들끼리 착착 진행하는 웃기지도 않은 모습을 보면서 깨닫지 않기도 어려웠어. 내 노력이 그들에게는 닿지 못했다는 걸.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서혜나가 가벼운 한숨 같은 웃음을 짓고선 말했다.
“그래서 가출했어. 이탈리아로 말이야. 단순히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하고 싶지 않고 어디로든 먼 데로 가고 싶어서 대책 없이 간 거였는데… 홀로 타지를 밟는 순간 웃음이 났어. 아,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걸 바랐구나, 싶었거든.”
본 적 없음에도 그 모습이 또렷이 그려지는 거 같았다. 홀로 캐리어 하나를 들고 공항에 내려, 즐거운 듯 웃음을 터트리는 서혜나의 모습이.
“이탈리아어도 미숙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작정 와서 돈도 없고. 끝도 없이 막막하고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근데 정말, 미친 듯이 즐겁더라고.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어.”
서혜나는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은 편안했다. 도현은 홀린 사람처럼 그런 서혜나를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말해줄걸. 하지만 엄마의 입장도 이해해줘. 네가 아파서 미국에 남았는데, 미국에서 생활하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처음 듣는 가정사였다.
도현은 왜 이제껏 부모님한테서 가족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도현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못 느끼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부모님의 가족을 본 적이 없다는 건 사실 이상한 일이었다.
도현은 정말, 지구가 사실은 네모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믿기 어려운 표정을 했다.
도현에게 부모님은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일 년에 몇 번 와서, 잠깐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지는. 닿을 거 같고 잡힐 거 같지만 절대로 닿지도 잡히지도 않는 존재.
지금은 달라졌다고 해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 박힌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려웠다. 여전히 그때 느꼈던 거리감은 도현의 마음 깊숙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실은 신기루인 줄 알았던 게 실제로 존재하는 오아시스였다는 반전을 접한 기분이었다.
엄마도 사람이었구나.
누가 들었더라면 무슨 당연한 소리냐고 멍청하게 봤을 말이지만, 도현에게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제가…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본 적 없는 이유가 그럼….”
“음, 잠깐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남편을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허락 못 한다고 하시더라고. 그 남자랑 결혼할 거면 호적에서 나가라고. 그래서 이때다 하고 연을 끊었지.”
“아…, 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도현의 반응을 본 서혜나가 아차 싶었는지 슬쩍 덧붙였다.
“키워준 걸 완전히 나 몰라라 한 건 아니고, 매달 돈은 부쳐드리고 있어. 엄마 그렇게 불효자는 아니야.”
“…….”
그게 정답이 아니었는지 조금 식은 표정을 짓는 도현에 서혜나가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묘한 정적이 자리했다.
서혜나는 은근히 도현의 기색을 살폈다. 두 눈에는 좀 전의 장난스러운 기색은 지워지고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더라면.
과거가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도 가족에게 상처받았으면서, 그 아픔을 알면서 자신에게 상처 주었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느낄까 봐. 아니… 그건 핑계고 사실 그런 한심한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현은 거기에 관해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아니면 그게 기대조차 하지 않아서 나온 반응인 걸까.
서혜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도현은 천천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놀란 감정은 제쳐두고….
‘일단 즐거웠다는 말이 진실에 근접할 가능성은 커.’
그게 꾸며낸 거라면 배우는 도현이 아닌 엄마가 되어야 했다.
도현은 인정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엄마가 불행해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일 뿐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던 것과 별개로, 저 때문에 아빠랑 떨어져서 산 건 사실이잖아요. 같이 살고 싶어 하시는 것도 사실이고요.”
도현은 자신이 허점을 파고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핵심을 틀려던 걸 실패했으니, 서혜나가 당황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서혜나는 당황하지 않고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건 비밀인데, 아들.”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낮아진 목소리에 도현이 바짝 긴장했다.
방금까지 말한 것도 놀라웠는데, 저런 말을 할 정도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도현은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집중했다.
“나는….”
그녀는 웃음기가 쫙 빠진 진지한 목소리로….
“네 아빠보다 너를 좀 더 좋아해.”
비밀 이야기를….
……?
“네?”
“그러니까 아빠랑 떨어져 사는 게, 너랑 떨어져 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선택지인 거지.”
말을 한 서혜나가 별안간 눈을 마주치자, 도현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서혜나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진짜 비밀이니까 아빠한테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엄숙한 얼굴이었다.
“알았지?”
재촉하듯 되묻는 목소리에 도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모과를 생으로 씹어 먹은 사람처럼 떫었다. 일단 끄덕이긴 하겠는데, 지금 무슨 헛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도현이 혼란스러워 하는 틈을 타 시간을 확인한 서혜나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일단 저녁부터 차려야겠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재료 하나가 모자라더라고. 주변에 있는 마트 잠깐 다녀올 테니까 방에 올라가서 쉬고 있을래?”
“…네.”
얼떨결에 서혜나에게 휘말려 버린 도현은 방에 돌아오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방금… 뭘 한 거지?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쓸데없는 얘기를 한 것 같은 기묘한 기분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분명 시작은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아.”
도현이 탄식했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결국 한국에 가는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단 사실을.
…나 생각보다 멍청했던가.
【얼빠진 표정 하고는.】
“…덩어리 님?”
도현의 검은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떠졌다.
같은 시각.
마트 주차장에 주차한 서혜나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몇 번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몇 번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곧바로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네, 전화받았습니다.
“메리 씨….”
불러놓고선 침묵하자, 상대편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 도현이 숙제를 했나 보네요. 어떻게 반응하셨어요?
“저도 숙제를 했죠….”
- 오,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왜 그런 숙제를 주신 거예요? 메리 씨, 전… 도현이 원한다면 평생 미국에서 살아도 괜찮아요. 도현이 바라는 게 제가 바라는 거기도 하고요. 확고하게 제 생각을 전한다면 도현이 불안해하는 걸 덜어줄 수 있을 텐데 왜 아무것도 결론짓지 말라고 하신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대로 가면 한국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서 평생 살자고 말할 거 같아서 과거 이야기도 꺼내고, 진지한 분위기도 깨트렸다. 서혜나는 아직 그게 잘한 일인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도현이 원하는 대답을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왜….
- 그럴까 봐 말씀드린 거예요.
“네? 그게 무슨….”
- 잘 들으세요, 혜나 씨.
이어진 메리의 말에 서혜나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강조하듯이 다시 한번 말했다.
- 도현은 한국에 가야만 해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