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마주하는 것 (21)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서혜나가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려 괜히 화면에 뜬 이름을 한번 확인했다. 너무 상식 밖의 이야기라서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친구랑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친구랑 떨어트려 놓으라니.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말뜻을 고민해 보아도 혼란스럽기만 해서 결국 가장 간단한 방법을 선택했다.
“왜요?”
- 당황스러운 거 알아요, 혜나 씨.
침착한 투로 놀란 마음에 공감해주는 메리에 그녀는 조금 차분해질 수 있었다. 서혜나가 진정하길 기다리던 메리가 말했다.
- 혜나 씨도 알고 계시겠지만, 도현은 스스로를 통제하고 억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그건 일종의 트라우마 현상이라고 말씀드린 적 있죠?
“…네.”
- 트라우마는 단기간에 극복하기 힘든 문제예요. 자아를 형성해가는 시기에 생긴 것은 더욱이요.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평생에 걸쳐서 아이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겠죠. 그러나 극복하기 힘들다는 게, 좋아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메리는 담담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서혜나는 그게 꼭 그녀를 비난하는 말처럼 들렸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도현은 절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르지 않아요. 탐구욕이 뛰어난데 그 영역은 외부적인 요소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해서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죠. 그런데 도현은 알면서도 그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지 않고 있어요.
“알면서도… 극복하기 싫어한다고요?”
- 정확히 말하자면, ‘못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는… 혜나 씨, 당신이에요.
“저요…?”
서혜나는 바보같이 되묻고 말았다. 그만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메리는 그녀를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 거 같았다.
- 도현이 혜나 씨에게 갖는 감정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메리는 다시 한번 물었다.
- 그럼, 도현이 보호자에게 화를 내거나 탓을 한 적이 있나요?
“아니, 요.”
- 태어났을 때부터 아주 오랜 시간을 타지에 홀로 외롭게 둔 부모를,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느껴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아이가, 원망하지 않는 게 정상적인 일일까요?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도현이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성자가 아니고,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고작 10살이 된 어린아이일 뿐인데.
“……난, 저는….”
서혜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상하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초반에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는 아이에 초조함과 불안을 느꼈다.
그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는 일 년이 지나도, 여전히 원망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서혜나는 차차 거기에 익숙해졌다. 아침에 웃는 얼굴로 잘 잤냐는 인사를 하고, 같이 밥을 먹고, 티타임을 가지고, 때론 놀러 가고…. 몇 년간 꿈에 그리던 순간들이었다.
그 상황이 너무 좋아서, 도현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안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갔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도현이 착하니까, 원망하는 법을 모르니까, 이렇게 좋아질 만큼 강하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정신이 나갔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지?
역겨워.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려서, 반대쪽 손으로 손목을 쥐었다. 얼굴은 완전히 핏기가 가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해소될 길 없는 감정이 온몸을 파고들어 전기에 감전된 동물처럼 벌벌 떨기만 했다.
- 혜나 씨, 진정하세요.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어요. 제가 말씀드렸죠. 혜나 씨는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할 거고, 그건 쉽지 않을 거라고요. 도현을 위한다면 지난 과거를 후회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아야 해요.
메리의 말에 흐려졌던 시야가 차차 되돌아왔다. 메리의 말이 맞았다.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도현이었다.
“네….”
- 좋아요. 그럼 이제 계속 이야기할게요.
조금의 텀을 둔 메리가 말했다.
- 죄책감이에요.
“죄책감?”
- 네, 도현이 혜나 씨에게 갖는 감정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게, 죄책감이에요.
메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사실 저도 도현이 이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할 줄은 몰랐어요. 책임감이 강한 건 알고 있었는데… 자기애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성격이 이런 악영향을 미치고 있을 줄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뱉은 메리가 말했다.
-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이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러니까 결국, 도현은 죄책감 때문에 다른 감정들을 외면하거나 억압하고 있는 겁니다. 부모를 향한 원망이나 분노의 감정도 당연히 거기에 포함되겠죠. 자신은 그러한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나는 그동안 대체 뭘 했던 걸까.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숨이 막혔다.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무엇에 고통스러워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아이가 곁에서 웃는 게 좋아서….
정말 끝도 없이 이기적이었구나.
- 도현은 마치, 과거에 커다란 실패를 겪어본 사람 같아요. 전 가끔 도현이 감당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서 자신을 탓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그만큼이나 모든 일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고, 그 때문에 스스로가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 아이를 이루는 가치관 중에서 그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요.
과거, 도현의 삶은 단조로웠다. 간병인을 통해 아이의 생활을 전달받았으니 알고 있었다. 그런 도현에게 메리가 말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있다면….
서혜나가 정희성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체 그 남자와 도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을 자격이 없었기에 묻어두었던 의문이 다시금 가득 차올랐다.
- 도현이 무엇에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아이에게 있어서 죄책감은 감정을 가로막는 벽이에요. 전 그 벽을 부수려면 아이가 느끼는 죄책감의 원인을 없애야만 한다고 판단했고요.
“하지만,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을까요? 도현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게 친구들이에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헤어지게 되면 오히려 더 힘들어할까 봐….”
서혜나가 말끝을 흐리자, 메리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미국에 있으면 지금 당장은 정서적으로 안정될지 모르죠.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진전도 일어날 수 없을 겁니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와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게 해결되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 도현의 트라우마도 극복하기 힘들겠죠.
메리가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서혜나를 설득하듯이 조금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 혜나 씨, 잠시 힘들어할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한국에 가는 편이 도현의 성장에는 도움이 될 거예요.
“만약 더 안 좋아지면요? 그렇게 될까 봐 도저히,”
무서워서.
서혜나의 말이 멎었다.
하,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짧게 터져 나왔다. 말을 하려는 순간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녀가 지금 또다시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할 뻔했다는 것을.
서혜나가 눈을 감았다 뜨곤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이해했어요.”
- 갑작스러운 말이란 거 알아요. 당장에 결정하기 힘든 문제라는 것도 알고요. 그러니까 도현과 대화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메리 씨, 고마워요.”
서혜나의 말에 메리가 웃었다.
- 역시 가족인가 봐요. 모자가 똑같은 소리를 하네요. 천만에요. 이게 제 일이니까요.
전화가 끊기고, 서혜나는 운전석에 앉은 그대로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얼른 사서 들어가야겠네.”
지금 바로 사서 들어간다고 해도 평소보다 저녁 시간이 늦어질 거 같았다. 도현이 배고프면 안 되는데. 서혜나가 조금 조급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탁.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 * *
“덩어리 님!”
놀라서 안 그래도 큰 눈이 튀어나올 듯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둥글게 휘었다. 조금 전까지 혼이 나갔던 사람 같지 않은 변화였다.
“덩어리 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계속 절 보고 계셨죠?”
아까까지 있었던 일을 싹 잊어버린 듯 잔뜩 신난 강아지처럼 질문을 퍼붓는 도현에 덩어리가 진정하라는 듯이 도현의 주위를 뱅뱅 돌았다.
【진정해, 작은 인간아.】
덩어리의 말에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방 안이 급격하게 조용해졌지만, 덩어리는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까만 눈동자가 심히 반짝거렸다.
분명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왜인지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는 덩어리에 도현이 웃었다.
“이제 제 앞에 먼저 나타나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작은 인간은 덩어리가 먼저 모습 좀 드러냈다고 이토록 기뻐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덩어리는 그런 도현이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알았으면 가끔은 모습을 드러낼 걸 그랬나.
한국에 있을 때야 쉴 새 없이 덩어리를 찾아대고 현실 세계 사람들보다 덩어리한테 의지하려고 굴어서 단호하게 말했다지만, 지금은 나름 독립적으로 변한 거 같으니….
이런.
지금 자신이 수많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인 작은 인간에게 마음이 약해져서 물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덩어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끝없는 세월 중에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을 지켜봤을 뿐인데, 이렇게 물들어 버리다니.
도현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였다. 아무튼, 큰 인간이나 작은 인간이나 조율자를 심란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덩어리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도현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
조용히 하랬더니 진짜 가만히 있었다.
【물어봐도 돼. 대신 하나씩!】
덩어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물었다.
“그동안 계속 제 곁에 있었어요?”
【…물어볼 게 그거냐?】
“그럼요?”
도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이거 말고 뭐를 물어봐야 하는지 진심으로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덩어리의 빛이 반사되어 유독 별 가루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의문을 담고 있었다.
【보통 왜 나타났는지… 아니, 됐다. 그래, 계속 보고 있었어.】
입매 끝이 말려 올라가 있는 편이지만 그와 별개로 도현은 차가운 느낌이 강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턱선, 평소에 짓는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 탓이었다. 커가면서 골격이 잡혀갈수록 그런 느낌은 점차 강해졌다.
그런데 지금, 차가워 보였던 인상이 순식간에 활짝 피었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극적인 변화였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작은 소년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미소였다. 그리고 그건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가끔은 나타나야겠네.’
덩어리한테도 효과가 있었다.
다만, 덩어리는 외적인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꽁꽁 얼어버린 물처럼 평소에 별다른 미동 없이 굳어 있던 영혼이 웃는 순간 부드럽게 일렁이며 빛난 탓이었다. 살랑살랑거리며.
그걸 보고 어떻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덩어리는 결국 인정했다.
이 작은 인간이 유일하게 특별하다는 사실을.
조율자로서 실격인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