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마주하는 것 (22)
덩어리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가 도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한숨을 쉬는 모양새에 도현이 갸웃했다.
【아무튼, 내가 왜 왔냐면.】
“온 게 아니라 그냥 모습을 보인 거잖아요. 계속 있었으니까.”
【…….】
“…죄송해요. 계속 말해주세요.”
【크흠! 그러니까, 내가 왜…, 아이씨, 됐고. 작은 인간아, 네가 큰 인간들에게 죄책감을 가지는 건 알겠는데 한 가지 잊은 게 있는 거 같지 않으냐?】
“네?”
눈이, 아니 그냥 얼굴이랄 게 없는데도 한심해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도현은 조금 뻘쭘해져 뺨을 매만졌다.
【한국 말이야, 한국!】
“한국이 왜…, 아.”
미적지근한 감탄사에는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쯧쯧. 덩어리가 한심함을 가득 담아 혀를 찼다.
“형의 기억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아가 단단해진 다음에… 가야 한다고 하셨죠. 맞아요, 그렇게 말해 주셨는데.”
도현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그걸 왜 잊고 있었지? 한국에서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여태껏 까맣게 잊었다는 사실이 어이없었다. 한번 떠오르니, 무엇이든 쉽게 잊어버리는 법이 없는 특출 난 기억력 덕에 어제 있었던 일인 양 생생하게 기억나서 더욱 그랬다.
【다행히 완전히 잊은 건 아니구나.】
“…….”
도현이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세상에. 나 그럼 지금까지 뭐 한 거지.
도현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저 진짜 멍청한 거 맞나 봐요.”
【갑자기 웬 자학이야?】
“그냥요…”
푹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까만 눈에 둥둥 떠다니는 빛 덩어리가 비치었다. 몇 번 망설이듯이 우물거리던 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한국에 가면 안 되는 거예요?”
【흠. 거기에 관해서 할 말이 있어서 말이지.】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곧바로 안 된다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덩어리가 도현을 살펴보듯이 오른쪽 위에서 둥둥 떠 있다가 왼쪽 아래로 내려가서 둥둥 떠 있다가 하며 주위를 떠다녔다. 도현의 까만 눈이 덩어리를 쫓았다.
【그게 안 되긴 안 되는데….】
“?”
【괜찮을 것도 같거든.】
검은 눈동자가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아까까지는 멍청하게 군 것을 자학했으면서, 한국에 가도 괜찮다는 소리를 듣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마음인데 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아가 단단해져야 한다고 했잖아요.”
무언가 더 말하려던 도현이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눈이 놀라움을 담아 동그랗게 뜨였다.
“그럼 혹시 제가 이제…!”
【아니, 그건 아니고.】
“…….”
칼같이 나온 대답에 도현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럴 리 없단 건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저렇게 단호하게 말하니까 좀 서운했다.
도현의 마음도 모르고 덩어리는 말을 덧붙였다.
【한국에서 네가 그렇게 위태로웠던 건 네가 아직 자아를 확립하지 못해서도 있지만, 영혼이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상태여서도 있어. 지난번 겨울 기억나지?】
도현이 조금 불퉁히 말했다.
“…입원했던 때요?”
【그래, 그때. 그때도 영혼이 아직 완전히 동화된 상태가 아니라서 일어난 일이었지. 물론 네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지만 말이다.】
거기까지만 말해도 도현이 말뜻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뚱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불안하게 일렁였다.
“영혼이,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소리인가요?”
불안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든, 눈가를 파르르 떨고 있는 소년을 본다면 그가 무심한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물기는 없었다. 덩어리는 그 하얗게 말라붙은 표정이 더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직, 완전히는 아니야.】
“…아.”
반사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지은 도현을 보았음에도 덩어리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도현이 무슨 심정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년.
고작 백 년 남짓 살아가는 생명체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이 지났음에도 도현은 여전히, 때때로 깊게 가라앉았다.
홀로 있을 때면 꽤 자주, 그랬다. 울 것같이 어둑한 눈을 하고선 건조한 얼굴이었다. 차라리 울면 무언갈 덜어낼 수도 있을 텐데, 마음속에 담아둔 그 어느 것도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메마른 표정을 했다.
더 생각하면 울라고 눈이라도 찌르고 싶어질 거 같아서 덩어리가 입을 열었다.
【아직 불안정하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동화가 진행된 상태야. 특히 그때, 네가 저번 겨울에 아프고 난 후에 더 단단하게 결합되었거든.】
어쨌든 아직은 아니란 소리였다.
표정을 정돈한 도현이 필요한 질문을 했다.
“그럼 이젠 한국에 가도 괜찮은 거예요?”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지. 너무 애매한 상태라서….】
잠시 고민하던 덩어리가 말했다.
【지금은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란다. 영혼의 상태만 본다면 꽤 긍정적이지만 언제나 변수를 상정해 두어야 하니까.】
덩어리는 심적으로 혼란스러울 도현을 위해 빙빙 돌려 말했지만 도현은 금세 요지를 파악했다.
“제가 준비가 덜 됐다는 거네요. 저 그래도 나름 잘 지냈던 거 같은데, 아직도 제가 불안하세요?”
【작은 인간, 그거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지?】
짙은 불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도현이 애매하게 덩어리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건 덩어리에게 의도와는 다른 확신을 준 거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이른 것 같구나.】
단호함이 깃든 음성이었다.
덩어리 님이 걱정하는 것 같길래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건데, 어째 불신만 더 쌓였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싶다가도 계속 옆에서 봤으면 그럴 만하겠다, 싶어서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화되는 속도로 봤을 때 지금까지 걸린 시간만큼만 더 지나면 괜찮겠어. 그때쯤이면 네가 한국에서 헛짓거리를 해도 영혼에 큰 타격을 입지는 않겠구나.】
“지금까지 걸린 시간이면….”
대략 이 년 정도.
도현은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이 년 후면, 딱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였다.
도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때쯤이면 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가 들기도 했고.
한동안은 부모님의 희생을 더 요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해지는 한편, 정확한 시기가 정해졌다는 생각에 왠지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결심했다. 그때가 되면 꼭 가기로. …일단, 부모님과 대화해야겠지만.
‘말을 꺼내보고, 만약 두 분이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힘들 것 같으면….’
그때는 위험을 감수해야지.
도현이 결심을 마쳤다. 결정하고 나니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아까와 달리 표정이 좋아지자, 그걸 보고 있던 덩어리도 덩달아 마음을 놓았다. 아무튼, 이렇게 작은 주제에 뭘 그렇게 복잡하게 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말을 하던 도현이 우뚝 멈췄다.
아래층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던 탓이었다. 도현이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있었다.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떠나려는 기색에 도현이 눈이 흔들렸다. 도현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사라질 거예요?”
【큰 인간도 왔으니, 그래야지.】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요?”
덩어리를 올려다보는 눈에 간절한 빛이 차올랐다. 일순 덩어리를 구성하는 빛이 흔들리는 듯싶었으나, 덩어리는 꽤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나보다 현실 세계의 사람에게 집중하라고 했잖아.】
타박 어린 말에 도현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덩어리를 끈질기게 바라보는 게, 붙잡는 걸 포기하지 않은 눈치였다.
【…흠, 크흠. 그, 너무 그렇게 풀 죽을 거 없어! 가끔, 아아주 가끔 이렇게 나타날 테니까.】
“…정말요?”
【아주 가끔!】
“약속한 거예요?”
【내 말 들었냐?】
“네, 가끔이라면서요.”
【…그래.】
도현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며 고운 호선을 그렸다. 그, 루카인지 뭔지 하는 인간 앞에서나 그렇게 웃지. 덩어리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에 또 봐요.”
여전히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산뜻했다. 덩어리는 가끔 나타나겠다고는 했으나 이렇게 선선히 보내줄 줄은 몰라 조금 놀랐다.
잠시 도현을 보던 덩어리는 그대로 알갱이로 변하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도현은 덩어리가 사라진 허공을 한참을 보다가, 아래층에서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도현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미적거리고 있는 사이 집에 돌아온 엄마가 홀로 저녁 준비를 마쳐버린 거 같았다.
돌아왔을 때 인사도 안 했는데.
도현이 황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일 층으로 가자, 맛있는 냄새가 훅 풍겨왔다. 스튜로 정했는지, 토마토를 넣어 만든 스튜가 있었고 스튜를 활용해서 만든 라자냐까지 놓여 있었다.
“죄송해요.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도현은 서혜나가 요리할 때 홀로 놀고 있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옆에서 의미 없이 얼쩡거리거나, 재료 세척을 돕곤 했다.
도현의 말에 서혜나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서 자리에 앉으란 듯이 의자를 빼내어 주었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 서혜나가 말했다.
“스튜가 좀 진하게 됐길래, 라자냐도 만들어봤어. 괜찮지?”
“네, 잘 먹겠습니다.”
메리가 내준 숙제를 하고 나면 심란해져서 음식을 소화하기 어려울까 봐 국물 있는 음식이나 스튜를 말한 거였지만, 도현은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식사 시간에는 좀 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좀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를 모두 마치고 정리까지 끝냈을 때.
“도현아.”
서혜나가 도현을 불렀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도현을 보던 서혜나가 말했다.
“거실에 가서 이야기할까?”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거실로 향했다. 두 사람은 아까 전 이야기를 나눴던 때처럼, 똑같은 자리에 앉았다.
서혜나는 무언갈 상당히 망설이는 눈치였다. 정확히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도현은 그 표정에서 낯익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 모습이 불과 얼마 전의 자신의 모습과 똑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래서 부모님이 날 말렸구나.
왜 궁금할 텐데도 굳이 모르는 척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거 같았다. 도현은 말을 돌리는 대신 먼저 이야길 꺼내기로 했다.
“원래는, 아빠가 계셨을 때 한국으로 가겠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
서혜나의 놀란 눈이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그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한 차례 이야길 꺼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고민한 나머지 감정이 일부분 낡아버린 것일까.
생각보다 더 담담하게 말이 나왔다.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까 겁이 났어요. 한국이랑 미국은 많이 머니까, 혹시 친구들과 멀어질까 봐서요. 자주 만나지 못하면 소홀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도현아….”
서혜나의 눈이 일그러졌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이 되돌아와 잠시 멈칫한 도현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은… 아직은 제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거 같아요. 그냥, 뭐든지요. 하지만 제가 이럴수록 엄마 아빠는 힘들어지시겠죠.”
도현의 말이 길어질수록 서혜나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한국에 가기 싫다고 해서 그런 거겠지, 도현은 서혜나의 표정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너무 오래 만지작거려서 닳았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또다시 따끔, 아려왔다.
지금부터 할 말을 좋아하진 않겠구나.
그냥 지금이라도 당장 한국에 가겠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영혼이 위태롭다는 것도 결국 내 문제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덩어리의 당부가 떠오르자 한 번 정도는 말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덩어리를 떠올린 도현은 용기가 조금 샘솟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도현이 서혜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서혜나의 갈색 눈동자가 쉼 없이 떨렸다. 엄마의 동요에 도현은 덩달아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했다.
“초등학교 졸업한 후에 가도 괜찮을까요?”
“도현아, 나는… 어?”
따끔따끔, 자꾸만 속이 아려와서 도현은 서혜나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을 포기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얼마나 양심 없어 보일까.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맞는 말이야. 지금까지도 이렇게 미국에서 버티면서 피해를 줬으면서 만족할 줄도 모르고.
아, 안 되겠다. 지금이라도 실언이었다고, 당장이라고 가겠다고 말해야….
다급히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뗀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마주한 도현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래!”
“…네?”
서혜나가 웃고 있었다. 아주 후련한 얼굴로, 환하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