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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23)화 (224/582)

제223화. Xmas Movie (1)

휙휙-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제 앞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손을 흔들어 대는 니콜라스에도 도현의 눈에는 한 점의 의문조차 없었다.

그 빤한 시선에 니콜라스가 손을 내리고 투덜거렸다.

“뭐야. 왜 아무것도 안 묻는 거야?”

그거야 네가 자주 그러니까.

말하면 삐질 게 분명하니 도현은 빙긋 웃으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원하던 대답을 얻었음에도 묘하게 찝찝했다. 초록색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은은하게 웃는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자 푸우, 하는 한숨을 내쉬곤 툴툴대는 어투로 말했다.

“아침부터 자꾸 멍하니 있잖아. 나 심심하다고.”

심심해, 심심해, 심심해! 니콜라스가 도현의 어깨를 붙들고 탈탈 흔들어 대며 외쳤다.

“그, 으븝, 너 친구들이랑,”

“오늘은 안 놀 거야!”

“이, 일단 놓고….”

간신히 풀려난 도현이 고개를 털었다. 니콜라스의 손에 강제로 머리가 흔들린 탓인가,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움이 가신 도현이 물었다.

“왜? 친구들이랑 평소에 잘 놀았잖아.”

“그런 게 있어! 화초를 기르려면 때론 무언갈 포기할 때가 생기는 법이지.”

말해놓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니콜라스의 어깨가 으쓱 솟아올랐다. 도현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다음 쉬는 시간에도 니콜라스는 심심하다고 불평하면서도 도현의 옆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쫑알거리는 니콜라스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노트를 내밀고 나서야 좀 조용해질 수 있었다.

“고개 조금만 더 왼쪽, 아니, 오른쪽! 그래, 거기서 움직이지 마!”

니콜라스가 원하는 대로 자세를 잡아주고 나서 도현은 도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지난 주말.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하루에 불과했을 날. 그러나 도현에게는 많은 것이 바뀐 순간.

‘아직도 믿기지 않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한 일인데도, 생각하면 할수록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자꾸만 낯설었다. 이제 더는 한국에 가는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그것보다 더욱 어색했다.

그건 정말 기묘한 감각이었다.

늘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에는 초조함과 압박감, 그리고 죄책감이 응어리져 있었다. 그건 그 일상이 길어질수록, 빛 아래 그림자가 드리우듯이 점점 짙어졌다.

그림자가 몸의 일부로 느껴질 만큼 익숙해졌는데. 이젠 문득 발밑을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아, 역시 낯설다.

도현은 엊그제 저녁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졸업 후 한국에 가겠다는 말을 꺼내고, 곧바로 후회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몰염치한 말이라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도현은 말을 철회할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엄마가 안도한 얼굴로 웃으며, 그야말로 도현의 발언을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영영 미국에서 살 줄 알았는데 이 년 후에 가겠다고 하니까 기뻐한 건가 싶어서, 두 분이 원한다면 더 빠른 시기에 가도 괜찮다고 슬쩍 말을 꺼내봤다. 하지만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졸업할 때 정도가 좋겠다고 말했다.

기뻐하는 그 얼굴에 도현은 어리숙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게도, 엄마가 왜 기뻐하고 안도하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면서 그저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란 것에 안심하고 말았다.

그 후로 도현은 엄마와 길고 긴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길 할 때도 있었고, 깊은 속내를 꺼내야만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대화를 상기하던 도현의 사고가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튀었다.

‘아빠한테도 말해야 하는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아직 이장혁에게 그날 나눈 대화를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현이 직접 말하길 원해서였다.

언제 말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이번 주 안으로 이야기를 꺼내볼 생각이었다. 이미 꺼낸 얘기라고 해도 조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기도 하고….

“쓰읍! 움직이지 말라니까!”

“…응, 미안.”

갑작스레 깨진 상념에 움찔, 놀란 도현이 순순히 사과했다.

도현의 시선이 니콜라스에게 가 닿았다. 뙤약볕에서는 언뜻 금발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형광등 아래에서는 지푸라기를 닮은 갈색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보였고, 스케치하느라 내리뜬 눈이 다시 치켜 올라가자 선명한 녹색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눈.

초록빛 바다를 닮은 저 눈을 보면 항상 생각나는 순간이 있었다.

처음으로 수영을 했던 날.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돌고래처럼 수영하던 니콜라스. 그때 비산하던 물방울과 물방울 사이로 내비치던 초록색 눈동자는 영영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도현이 니콜라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니키나 애들한테도 말해야 할 텐데.’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별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으니, 도현은 이별이 다가오기 전에 준비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검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드러났다.

지금은 말고, 조금 나중에.

* * *

도현이 슬쩍 벽면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분침이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그건 니콜라스도 같은 생각인지, 아까부터 도현의 교과서에 ‘밥! 바압!’ 하며 낙서를 해대고 있었다.

다만, 도현과 니콜라스는 점심시간을 기다리는 이유가 달랐다. 니콜라스는 정말 순수하게 밥을 향한 열정이라면 도현은 밥을 먹으며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좋아서였다.

그걸 입으로 말하면 진을 제외한 아이들이 소름 돋은 얼굴로 질색할 걸 알기에 혼자 생각할 뿐이지만.

“자, 얘들아.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반짝!

죽어가던 아이들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해리는 방금까지 데친 시금치처럼 시들거리던 아이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걸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좀 남았으니까 집중해봐. 중요하게 전달할 내용이 있으니까.”

탁탁.

해리가 칠판을 치며 시선을 모았다. 꿈나라로 기절해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해리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도 이제 4학년이잖아? 언제까지 저학년처럼 살 수는 없지.”

“에엑.”

몇몇 아이들이 우는 소리를 냈다.

니콜라스의 얼굴도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미국의 교육 방식이 자유롭다고들 하지만, 부유층 혹은 사립학교의 학구열은 어디에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3학년까지는 자유롭게 놔두는 편이어도 4학년쯤 되기 시작하면 아이들에게 공부시키는 학부모들이 한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해리의 말에 반사적으로 ‘공부해야지’라고 말하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질겁하는 것도 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4학년이니 4학년답게… 클럽에 들어야겠다!”

해리가 꺼낸 말은 아이들이 예상한 레퍼토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아이들이 각자 재잘거리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죽어 나가던 표정은 완전히 갈아 치운 후였다.

도현은 아이들을 보며 자신의 반 아이들이 연기에 꽤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관찰하던 도현의 시선이 옆자리에 닿았을 때, 도현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장담컨대, 도현은 저토록 기뻐하는 니콜라스를 근래 들어서 처음 보았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양, 니콜라스가 말을 쏟아냈다.

델마 아카데미의 수영부는 캘리포니아에서 꽤 알아주는 곳이라는 것, 수영부에 들면 이제 교내 대회는 물론 다른 학교와 시합을 할 수 있다는 것, 학교 간 경쟁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둬 성적을 내면 도 대회나 시 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

도현은 신이 나서 떠드는 니콜라스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니콜라스가 수영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자세하게 알아보고 있다는 것까진 모르고 있었다.

‘대단하네.’

문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네모난 병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었고 영혼의 안정화를 위해 본능적으로 그 일에 매달렸다지만, 니콜라스는 아니니까.

수많은 기회와 수많은 선택지가 펼쳐져 있는데 그중 하나를, 이렇게 망설임 없이 선택해서 이토록 확신에 찰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너도 같이 수영부 들래?”

“아니.”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매정할 정도로 재빠른 거절에 니콜라스가 아쉽다는 표정을 했지만, 도현은 단호했다.

벨벨벨- 벨벨.

때마침 벨 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이 제각각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의 재촉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도현은 문득 해리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지만, 그가 손짓하는 걸 보고 우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도현이 니콜라스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한 후 해리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교탁 앞으로 다가온 도현에 해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점심 먹고 잠깐 교무실 좀 들를 수 있을까?”

“교무실에요?”

“응. 줄 게 있어서.”

“네, 알겠어요.”

뭘까 궁금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해리가 도현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며 이제 친구랑 점심 먹으러 가라고 얘기했다.

돌아온 도현을 보고 니콜라스가 뒤편에 있는 해리를 흘깃하더니 물었다.

“뭐래?”

“점심 먹고 교무실 들르라고 하셨어.”

“교무실? 너 뭐 사고 쳤어?”

불과 일주일 전에 복도에서 공놀이하다가 불려간 자의 질문이었다.

“…….”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냐. 가자.”

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앞장섰다.

니콜라스가 그 불손한 눈빛은 뭐였냐며 도현의 목에 팔을 걸었다. 결국 웃음이 터진 도현과 니콜라스는 카페테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아웅다웅하며 걸어갔다.

“여기!”

먼저 자리를 잡아놨던 진이 번쩍 손을 들었다. 도현과 니콜라스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진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너희도 그 얘기 들었어?”

“클럽?”

“어! 그거!”

진의 반도 똑같이 공지가 나간 거 같았다.

“너희는 어디 들어갈 거야?”

“나는 수영!”

니콜라스의 대답에 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진의 시선이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직 잘 모르겠어.”

“역시 정하기 어렵지. 나도 아직 고민 중이야. 사실 모의재판이랑 주식 투자 클럽만 아니면 다 괜찮을 거 같기도 해.”

음, 그건 나도 좀.

그가 보기에도 두 곳은 굉장히 피하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도현이 진의 의견에 공감했다.

“아, 바이올린 클럽도 있던데. 거긴 어때?”

막 생각난 듯 묻는 진에 도현이 고민의 여지 없이 고개를 저었다.

“바이올린은 괜찮아.”

형의 지식을 체화시키는 것도 아직 아득하게 멀었을뿐더러, 초등학교 바이올린 클럽에 자신이 끼기엔 좀 위화감이 클 것 같았다.

도현의 머릿속에 초등학교 수업에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끼어서 같이 배우는 그림이 뭉실뭉실 떠올랐다. 도현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상상을 멀리 치워낸 도현이 화제를 자신에게서 돌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다비드는?”

“난 축구.”

“축구?”

심드렁하게 답하는 다비드에 도현이 의외란 시선을 보냈다. 축구가 다비드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비드는 어느 모로 보나 스포츠 소년이었으니까. 점심시간에도 항상 운동장에서 뛰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도현이 의외인 부분은, 다비드가 진과 같은 클럽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도현이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반이 달라지니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좋은 일인가.’

다비드는 너무 진에게 붙어 다니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도현은 고개를 주억이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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