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Xmas Movie (2)
“아, 도현아. 왔구나.”
단정하게 교무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곧바로 해리 선생님이 손을 흔들며 반겼다. 도현은 여러 번 와서 익숙해진 해리 선생님의 자리로 향했다.
“밥은 잘 먹었어?”
해리가 책상 앞, 조그마한 간이의자를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 도현은 그 의자에 앉으며 긍정했다.
자리에 앉은 도현은 해리가 책꽂이에서 무언갈 꺼내는 것을 보며 가만히 기다렸다.
스윽.
“이건….”
몇 장으로 구성된 종이의 가장 상단에 있는 글자를 확인한 도현이 반응을 보였다.
“작년 AMC 8 기출 문제야.”
AMC.
정식 명칭은 American Mathematics Competitions.
미국에서 실시하는 권위 있는 수학 경시 대회라는 것 정도는 도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 저번에 분명….”
도현이 말끝을 흐렸다.
지난번, 해리 선생님이 수학 올림피아드 반을 권유했을 때 도현은 촬영에 의한 불성실한 참여를 이유로 들어 거절했다.
그런데 촬영 일정이 빨리 끝나 버려,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지금. 왠지 모르게 허풍을 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바쁜 척한 거로 보이려나.
물론 촬영 일정은 언제든지 다시 생길 수 있는 일이지만, 한가한 지금 입에 올리기엔 조금 민망했다.
도현이 애매하게 말을 끊자,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해리가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물론 네가 저번에 거절했었지. 나도 그 이유를 납득했고 말이야. 하지만, 꼭 올림피아드 반에 들어오지 않아도 이렇게 기출 문제를 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니?”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그럼.”
해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해리를 쳐다보며 머뭇거리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이러면 선생님이 번거로우시잖아요.”
“그다지 수고롭지도 않은 일이야. 그리고 도현, 너는 내 반 학생이잖아. 내가 책임지고 챙기는 게 당연하지.”
도현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도현의 얼굴을 살피던 해리가 잠깐 고민하더니, 옅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보아하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같네. 그럼 이렇게 말해볼까. 나는 너를 다른 아이들과 차별된 방식으로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어. 너는 학교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잖니.”
“! …그,”
“부정하지 않아도 돼. 널 탓하거나 혼내는 게 아니니까.”
도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해리의 말은 진실이었다. 도현은 학교 수업, 그러니까 예체능 분야를 제외한 학교 수업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친구들과의 교류가 아니었다면 그 쓸모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최대한 수업 시간에 집중했는데….
“오, 나에게 그렇게 미안한 표정을 지을 이유가 전혀 없단다. 네가 학교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 네가 특별한 아이라서야.”
“제가 특별하다고요?”
“그럼. 아주 특별하지.”
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학생을 향해 말했다.
“너는 수업이 싫은 게 아니라,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이 너무 쉽고, 모두 아는 것들이라서 그런 거잖아. 맞지?”
단순한 일이었다.
고등학생이나 성인쯤 되는 이들을 데려다가 초등학교 수업을 들으라고 앉혀놓으면, 한두 번은 재미로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게 주 5일, 장기간 지속된다면 누구든지 지루함과 권태를 느끼고 말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 CogAT 시험을 기준으로 반을 나누며, 학생기록부에 Talented&Gifted 표시를 해두며 특별히 관리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해리의 반은 CogAT에서 고득점을 획득한 아이들로 구성되어, 다른 반보다 조금 더 심화된 내용을 배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적당한’ 정도로는 부족한 유별난 아이들이 있는 법이었다.
“종종 너처럼 특별한 아이들이 있단다. 그런 아이들에게 평범한 수업은 인내해야 할 괴로운 시간이 될 뿐이지. 하지만 이곳은 학교고, 나는 네 담임 선생님이야. 나는 네가 학업에 흥미를 느끼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지.”
도현의 시선이 책상 위에 곱게 놓인 시험지로 향했다.
도현이 무언갈 거절하거나, 부담스럽게 느낄 때마다 메리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그게 내 일인걸요’라고 말하곤 했다. 때로 그녀는 어른들의 일을 너무 빼앗으려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현은 여기서 적당한 반응이 끈질긴 거절이 아니라 수긍이라는 걸 알았다.
“언제까지 풀면 될까요?”
긍정의 속뜻이 담긴 질문에 해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에게는 한 치의 이득도 없는 일일 텐데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이번 주 내로만 풀면 돼. 처음이니까 시간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풀어. 혹시 모르는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니까 걱정하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돼. 애초에 AMC 8은 7, 8학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시험이라서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해.”
“7, 8학년이요?”
도현이 되묻자 그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해리가 친절하게 말했다.
“AMC 8 지원 자격이 8학년 이하의 학생이거나 14.5세 이하의 아이들이거든. 주로 중학생들이 응시하기는 하지만, 최저 연령 제한이 없어서 선행 학습을 하는 초등학생들도 많이 응시하는 시험이야. AMC 8은 괴랄한 문제로 아이들을 곤경에 빠트리기보다는 수학에 흥미를 가지는 걸 목적으로 하는 시험이라서 그렇게 난도가 높지 않아.”
그는 덧붙여서 시험은 총 25문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뒤의 다섯 문항은 성적을 가르는 선별 문제로 풀기 어렵겠지만, 앞의 스무 문항은 도현이라면 조금만 공부해도 충분히 풀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은근히 추켜세우며 살살 구슬리는 게 도현이 마음을 바꿔 먹을까 봐 걱정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도현은 딱히 문제 수준을 걱정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경청하고 있다고 느꼈는지, 해리는 본격적으로 시험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출제 범위에 대해 들은 도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시험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한 정수론, 기하, 측정, 수와 연산, 분수와 소수, 비율과 비례식, 확률과 통계, 논리는 원래라면 초등학교 4학년인 도현이 알 리 없는 과정이었다. 다만 도현은 그 일반적인 경우에서 좀 벗어나 있었을 뿐.
“혹시 아예 모르는 개념이 있으면 풀지 말고 별표를 쳐도 돼.”
“그건 괜찮아요.”
모든 문제에 별표를 쳐도 괜찮다며 도현을 안심시키려던 해리는 담담한 대답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제 와 보니, 시험지를 보는 도현의 눈은 전혀 겁을 먹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재밌어하는 거 같은데.’
해리는 조금 떨떠름하게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이 수학에 흥미가 있는 건 알았는데, 수학 경시 대회 시험지를 보고서 장난감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빛낼 줄은 몰랐다.
해리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도현 같은 경우는 단연코 처음 보았다.
‘애가 좀 비범하긴 했는데.’
도현은 그냥 한눈에 보기에도 남달랐다. 단순히 수업 시간에 질문하면 틀리는 법이 없고, CogAT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기함을 토해서가 아니었다.
또렷한 눈빛을 마주하고 조금만 대화해 본다면, 이 아이가 남다르단 것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리는 종종 저 정도는 돼야 저 나이 때부터 한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사양하더니, 신이 난 발걸음으로 시험지를 가지고 돌아가는 동그란 뒤통수에 해리는 웃고 말았다.
* * *
종이 뭉치를 들고 복도를 걷던 도현은 창문 너머 교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델마 아카데미의 점심시간은 상당히 넉넉하게 주어지는 편이라, 아직도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떡하지.’
교무실에 가기 전, 아이들은 도현에게 잔디밭에 가 있을 테니 그쪽으로 오라고 말했다.
도현의 시선이 손에 들린 종이 뭉치로 향했다.
* * *
“…그거 뭐야?”
다비드가 설마,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을 하면서도 두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수학 경시 대회 기출 문제지.”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잔인했다.
다비드는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사람인 양,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도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다비드가 왜 저러는 거냐고 묻는 무언의 행위였지만, 도현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면 다비드나 다른 아이들이나 동일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그, 그걸 왜 가져온 거야, 도리?”
진이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도현은 왼손에 들린 시험지와 오른손에 들린 볼펜을 번갈아 본 후 고개를 들었다.
“그거야, 풀려고?”
“누가 점심시간에 잔디밭에서 수학 문제를 풀어! 너 미쳤어?”
기어코 참지 못한 다비드가 소리쳤다. 평소라면 다비드의 말에 시비를 걸었을 니콜라스조차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현은 당당했다.
“다비드, 너는 축구하러 갈 거잖아.”
이번에는 진과 니콜라스를 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뒹굴거나, 낮잠 잘 거고.”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옆에서 조용히 문제 풀고 있는 거뿐인데, 괜찮지 않아?”
“전혀.”
“아니.”
진과 니콜라스가 곧바로 부정했다. 특히 니콜라스가 도현의 한쪽 팔에 달라붙어 옆에서 끔찍한 수학 문제를 푸는데 어떻게 잠을 자냐며 징징댔다.
아까 살짝 문제를 봤는데 별로 복잡하지 않았다고, 그렇게 싫어할 필요 없다고 헛소리를 하는 도현을 다비드가 질린 눈으로 응시했다.
쟤는 참… 평소에 보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가 싶다가도 이렇게 마이페이스처럼 굴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별명 중에 너드가 있었지.
워낙 관심이 쏠리는 타입이라, 도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 과정에서 도현을 지칭하는 수많은 호칭이 생겨났는데, 가장 최근에 생긴 게 너드였다.
첫 시작이야, 쟤가 배역을 준비한답시고 앞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주구장창 체크무늬 남방만 입고 다녀서 생긴 거긴 하지만… 이렇게 보니 가장 잘 어울리는 별명이 아닌가 싶어졌다.
다비드가 고개를 저었다.
사각, 사각.
볼펜이 움직일 때마다 종이 밑에 깔린 잔디들이 눌리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내었다.
정답, 85.
답을 표시한 도현이 뻐근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옅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도현을 붙들고 늘어지던 니콜라스와 수학 문제를 보면 두드러기가 난다던 진이 양옆에서 꿀 같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날씨도 좋고.
바람도 불고.
딱 기분 좋은 따뜻함이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도현이 다시금 시선을 내려 다음 문제를 확인했다.
21번.
생각 없이 문제를 풀다 보니 어느새 몇 문제가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지막 다섯 문항이 제일 어렵다고 했지.’
도현이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집에 가서 풀어도 될 걸, 이렇게 반에 들러서 필기구를 가지고 나와 바로 펼친 건 문득 든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라는 호기심.
도현은 대체로 겸손한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객관화하지 못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사회적 시선을 고려해 별로 티는 내지 않지만, 자신이 평균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나는 평균과 다르구나’라는 걸 아는 정도지, 일반적인 기준에서 얼마나 다른지까지는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AMC는 도현의 눈에 자신의 위치를 객관화하기 아주 유용한 지표로 보였다.
총명한 눈동자가 스물한 번째 문제를 읽어 내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