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Xmas Movie (3)
“으음.”
해리가 경악과 난감함, 동시에 묘한 납득을 담은 시선으로 책상에 놓인 종이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종이의 오른쪽 상단에는 ‘Do-hyun Lee’라는 글자가 성정을 꼭 닮은 단정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해리가 그 밑에 숫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25/25]
본인이 써놓고도 의심스러운 시선이 숫자를 향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러나 이미 세 번이나 확인 작업을 거친 후라 더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만점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아까 했던 생각 같긴 했지만, 머릿속에 절로 드는 생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순히 만점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물론 그것만 해도 차고 넘치게 놀랍긴 하지만….
가장 비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건, 해리가 이 시험지를 도현에게 준 게 바로 오늘 점심시간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전, 수업이 끝난 후.
해리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도 모르는 문제가 있거나 시험지를 다 풀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는 말을 빼먹었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평소처럼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도현에게 말했다. 그러자 가방을 싸던 도현의 단정한 손길이 뚝 멈췄다.
‘아, 그거.’
해리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쯤은 난감함을 띠고 있었다. 반 박자 정도 흘린 도현이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미 다 풀었는데요.’
해리는 아이들을 대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비단 아이뿐만 아니라, 해리라는 사람 자체가 대화를 능숙하게 이끌어 나가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멍청하게 서 있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잠시 해리의 낯을 살펴보던 도현이 지퍼를 거의 다 잠갔던 가방을 느릿하게 열었다. 언뜻, 반듯하게 접힌 흰 종이가 보였다.
‘…지금 드릴까요?’
짧은 회상을 끝낸 해리가 다시금 시험지를 들춰보았다.
차라리 집에 가져갔다가 다음 날 가져왔으면 부모님한테 물어보거나 풀이를 참고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분신이라도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내내 성실하게 수업을 들었으니까.
찍었다거나, 단순히 운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간단한 문제-사실 이것도 간단하다고 하기엔 수식을 이용한 계산이 필요했다-를 제외하고 좌표나 도형을 그려서 풀이해야 하는 문제들은 빈 여백에, 그대로 풀이집에 실려도 될 것 같은 완벽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으음….”
해리가 앓는 소리를 냈다.
똑똑한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좀, 범주 밖의 일이 아닌가.
도현은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봐야, 친구들이 장난칠 때 받아주는 것 정도일까. 정도를 넘지 않고 가볍게 하는 수준이라 해리는 눈감아 줄 때가 많았다.
해리가 이렇게 도현에게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신경 쓰고자 하는 건 비단 선생님으로서의 의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루함이 담긴 눈동자나, 심드렁한 표정을 보면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한데, 도무지 수업 시간에 다른 개별 행동을 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법이 없다.
애써 집중하려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있을까. 일단 해리는 불가능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수업 시간에 다른 행동을 하기는커녕, 선명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내내 해리에게 집중했다.
그 소리는, 도현이 문제 풀이에 할애한 시간이 밥 먹고 면담까지 마친 후 조금 남았던 점심시간이나, 5교시와 6교시 사이의 쉬는 시간이 전부란 뜻이었다.
“해리 선생님, 무슨 일 있어요?”
“아, 줄리아.”
막 커피를 타서 자리로 돌아가던 참인지 한 손에는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믹스커피 특유의 냄새가 코로 흘러 들어왔다.
“줄리아, 줄리아가 재작년에 도현의 반이었죠?”
“도현? 네, 그랬죠.”
줄리아의 눈이 흥미로 차올랐다.
또 도현이 뭔가를 해낸 걸까.
짧은 시간. 줄리아가 도현의 담임을 맡으며 깨달은 것은, 어떤 사건이 있거나 누군가 범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을 때 그 원인은 대부분 도현이라는 사실이었다.
“도현이 왜요? 그가 뭘 했는데요?”
“들으면 깜짝 놀라실걸요.”
줄리아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도현이 하는 일 중에 놀랍지 않은 게 있긴 했나요?”
“그건… 그렇네요.”
해리가 얼떨결에 긍정했다. 생각해보면 도현은 전적이 상당히 화려했다.
그의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차치하고서라도, 전설로 길이 남을 음악 수행 평가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전시회 수준을 뛰어넘었던 벽화, 테마파크 수준으로 만들어버린 유령의 집과 만장일치로 일등을 외쳤던 축제 연극까지.
굵직한 사건들만 꼽자면 그랬고, 그 사이사이 있었던 일들, 그러니까 대학 교수였다면 감동의 박수를 치며 A+를 날렸을 피피티 발표라든지, 정치를 하는 건지 중재를 하는 건지 모를 말솜씨나 대처라든지, 소소한 일까지 늘어놓으면 한참은 걸렸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냥 평범하게 도현이 도현한 것 같은데?
벌이는 일마다 범상한 게 없었던 전적을 떠올리자, 해리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충격이 가시고 납득과 인정이 찾아왔다.
해리가 한층 여유로워진 얼굴로 물었다.
“줄리아는 도현이 천재인 걸 알고 있었어요?”
“물론이죠.”
아, 역시.
줄리아의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해리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려던 찰나였다.
“그는 뛰어난 배우지만, 동시에 천재적인 예술가의 혼을 가지고 있어요! 전 아직도 도현이 처음으로 그렸던 그림이 잊히지가,”
“잠, 잠깐만요. 그림이요?”
해리가 다시금 물었다.
“수학이 아니라요?”
“수학이요?”
두 사람이 물음표가 띄워진 낯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해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줄리아가 입을 벌렸다.
“세상에….”
줄리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똑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데요. 그는 겨우 10살이잖아요!”
경악 섞인 감탄에 해리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덧붙였다.
“작년 AMC 8에 35만 명이 지원했고, 상위 1%의 평균이 22.9점이었어요. 도현이 푼 것과 같은 문제였죠. 그리고 도현은 그 문제를 고작… 길어봐야 삼십 분의 시간 동안 풀어서 만점을 받았고요.”
말하고 나니 더 비현실적이다.
걘 대체 뭐지?
생각하면 할수록 미스터리한 느낌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 * *
개학 후, 하루하루는 빠르게 흘러갔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 음, 아닌가? 도현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한 서혜나가 갑자기 즐거운 얼굴로 전학을 가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순간, 한국 얘긴가 싶었지만 얼굴에 장난기가 그득해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도현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서혜나가 자랑스러움과 대견함이 가득한 기색으로 말했다.
‘해리 선생님이 너를 영재 학교에 보내고 싶다고 하시더라.’
그건 정말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이야기라서 도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볼살이 덜 빠진 쪼그만 아들이 어이없는 얼굴을 하는 것에 서혜나가 참지 못하고 끅끅 웃어댔다.
웃음이 멈추고, 진정한 그녀가 해준 말에 도현은 곤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커서 분명 위대한 과학자나 수학자가 될 인재라며, 좀 더 도현과 같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 시설에 들어가 맞춤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는 소리에 곤란하지 않기도 어려웠다.
왠지 최근에 틈만 나면 기출 문제를 들이밀더라니.
그냥 풀 수 있어서 푼 것일 뿐인데, 그게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대단하게 보였나 싶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너는 영재 학교 가고 싶은 생각 없어?’
‘저는 이대로가 좋아요.’
도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기 가면 네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들을 수 있을 텐데도?’
‘그래도요.’
그 완고한 거절에, 서혜나는 권유하는 것을 그만두고 수긍했다. 도현이 친구를 두고 전학을 갈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했고.
천재성 때문에 학교를 바꾸었어야 했다면, 도현은 이미 연기 학교나 예술 전문학교로 옮겼어야 했다.
대화가 끝나갈 때쯤, 서혜나는 도현이 질리도록 들었던 말을 또다시 꺼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배우든, 과학자든. 무슨 길이든지 엄마랑 아빠는 응원할 테니까.’
전적인 신뢰가 담긴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도현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다가, 어물어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과학자가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왜?’
‘저는 그 정도로 뛰어나진 않은걸요.’
도현은 진심이었다.
다만, 도현의 말을 들은 서혜나는 상당히 묘한 얼굴을 했다.
‘네가 그러면 그런 거겠지….’
그러면서 짓는 표정이 ‘얘 기준으로 뛰어난 건 아인슈타인 정도 되나? 아니면 에디슨?’이라는 게 눈에 훤히 읽혔다.
더없이 진심이었던 도현은 억울해졌다.
도현이 수학 경시대회 기출 문제를 별 어려움 없이 풀 수 있었던 건, 도현 자체의 소프트웨어가 꽤 괜찮은 성능이어서도 있지만, 그보다.
‘중학생 문제를 못 푸는 게 더 이상하잖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도현은 10살짜리 어린이인 동시에 28년을 산 성인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처음으로 기출 문제를 푼 날.
그 어렵다던 뒤의 다섯 문항을 풀면서 도현은 깨달았다.
중학생 수준으로 고안된 문제를 못 풀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구나, 라는 걸.
형은 어린 나이부터 바이올린에 미쳐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업을 놓아버린 적은 없었다.
중학교 때는 수석이나 차석을 놓친 적이 없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성적이 좀 떨어지긴 해도 여전히 전교권 내에서 놀았다. 그런데 그걸 못 풀 리가.
도현의 수학적, 논리적 사고력과 희성의 지식이 이루어낸 시너지는 굉장했다.
도현이 생각하기에 그건 일종의 편법이었다. 그러나 설명할 길이 없으니, 해리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장차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과학자가 되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최근 행동하는 것을 보건대, 해리의 상상 속에서 도현은 이미 노벨 과학상 정도는 받은 거 같았다. 어쩌면 이미 도현의 수상 소감까지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현의 얼굴에 체념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이 이상야릇한 상상 대신, 다른 걸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꽤 여러 일이 있었다.
일단, 도현은 독서 클럽에 들어갔다. 이유는 그 클럽이 가장 자율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정해진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정이 상당히 유동적이었다. 달마다 독후감을 두 개 이상 제출해야 했지만, 월말까지 자유롭게 쓰면 되었다.
사서 선생님을 도와서 하는 도서관 봉사 활동도 클럽 활동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한 학기에 일정한 시간만 채우면 되는 일이라 가능한 요일과 시간을 고르면 되었다.
거기서 도현은 가산점을 주었다.
새로운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촬영 일정을 피해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독서는 도현의 취미이자 오랜 친구이기도 했으니.
다시 생각해도 훌륭한 결정인 거 같아 도현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며칠 전에는 도현의 생일이었다. 도현은 저번 생일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을 부르지 않고 친밀한 몇몇-진, 니콜라스, 다비드, 할리, 브라운-을 불렀다.
맥도 불렀으나 그는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사실 정말 바쁜 건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사이가 소홀해진 건지는 좀 애매했다.
어쩌면 머리가 크고 나니 어린아이들이 모인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게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랐다.
예상보다 한 사람 정도가 적긴 했어도 나름대로 즐거운 하루였다.
다만, 생일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 날 학교에 가자 가방에 다 넣지도 못할 만큼의 선물을 받아서 소소한 곤혹을 치루기도 했고, 생일 선물을 준 아이들 중에 아일라가 포함되어 있어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챙김을 받은 생일은 처음….
지잉-
한창 그날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데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열자, 화면이 반짝이며 발신인의 이름을 띄웠다.
[리암 호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