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27)화 (228/582)

제227화. Xmas Movie (5)

“…나 좀 긴장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잔뜩 굳은 안색이나, 갈증이 이는지 자꾸만 물을 마시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도현이 헤더의 팔을 토닥여 주자, 헤더가 도현의 손을 덥석 낚아챘다.

“아무래도 네 기운을 받아 가야겠어!”

“뭐?”

도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헤더는 진지했다.

결국 어정쩡하게 웃음을 멈추며 헤더가 만족스러워할 때까지 가만히 기를 빼앗기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돌아다니며 아이 한 명 한 명을 도닥이고, 간식을 나눠주던 해리가 헤더와 도현의 자리 앞까지 다가왔다.

이제는 도현을 보면 자동 반사적으로 흐뭇한 미소가 떠오르는 해리에, 도현은 떨떠름한 눈빛을 했다.

그런 도현과 반대로 넉넉한 표정을 지은 해리가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너희 둘이라면 잘할 거야. 너희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환상적인 애들인지 내가 다 알거든.”

그 말은 앞서 다른 아이들에게 응원차 했던 말과 비슷했지만, 진심이 꽉 차 있다는 부분이 좀 달랐다.

헤더는 똑똑한 아이들을 모아놓은 올림피아드 반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편이었고, 도현은… 그냥 말할 것도 없었다.

해리의 진한 시선을 받은 도현은 미동 없이 은은하게 웃는 낯으로 되받아쳐 주었다. 이제 이 정도로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해리 선생님… 원래 이러셨나.’

속에 가지고 있었던 선생님의 이미지가 갈수록 와장창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뭐… 이것도 학생을 위하는 마음의 일환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이들을 태운 버스는 달리고 달려, 인근의 주립 대학에 도착했다.

AMC 시험은 시험장으로 등록된 시설이나 대학에서 주로 시험을 응시했다.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은 처음 와보는 대학교의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건 헤더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라, 안경 너머의 눈을 생기 있게 빛내고 있었다. 방금까지 긴장으로 죽어가던 사람 같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도현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이렇게 금방금방 기분이 바뀌는 걸 보니 어린 나이가 맞구나 싶었다.

해리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시험을 보기 위한 절차는 빠르게 끝났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

델마 아카데미처럼 학교 단위로 시험을 보러 온 무리가 눈에 띄었다. 도현은 그들을 가볍게 눈으로 훑었다. 다들 평균 신장이 20cm 정도는 큰 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AMC 8은 중학생까지밖에 응시하지 못하니, 아마 AMC 10과 12도 동시에 시험이 진행되는 거 같았다.

이쪽을 발견한 몇몇은 상당히 귀엽다는 눈빛을 보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저 정도 눈높이라면 아이들이 아장대는 오리 떼 정도로 보일 법도 하니.

그때였다.

“무슨 생각 해?”

“어?”

“역시, 시험 문제 생각 중이지?”

수학 올림피아드 반에 합류하면서 조금 친해진 아이였다.

“…응, 그랬지.”

도현은 양심에 찔렸지만, 저런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보고 도저히 오리 떼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답에 왠지 더욱 눈을 빛내는 아이에, 도현은 양심이 아파왔다.

“으으… 나 잘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양심에 찔리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도현이 화색하며 재빨리 말했다.

“잘할 거야.”

그 대답에도 불안했는지 재차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도현이 한 점 거짓 없는 눈동자로 긍정했다.

애초에 진심이었다.

어째선지, 어느 순간부터 헤더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도현에게 모르는 문제를 질문하기 시작했는데, 눈앞의 아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도현이 문제를 알려주며 파악한 실력으로 보면 고득점은 무리더라도 15점까지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리고 AMC 8은 6학년 이하의 학생들에게 한해서 15점 이상을 받은 아이들에게 Merit Certificate라는 상을 수여했다.

수상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잘하는 게 맞으니까.

도현이 확신을 담아 대답하자 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곧 신이 나 친한 친구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나도 잘할 것 같아?”

“상은 탈 수 있을까?”

“…….”

도현은 잠시 데자뷔를 느꼈다.

분명 전시회를 준비할 때도 이랬던 것 같은데….

그때와 똑같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서는 일일이 대답해준 도현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멀어지는 아이들을 보곤 지친 표정을 했다.

“왜 나한테 물어볼까?”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을 들은 헤더가 도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폭 한숨을 쉬었다.

“…심심했나 보지.”

대강 돌아온 대답에 도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금방 납득하고는 자세를 반듯이 했다.

쟨 대체 뭘 납득한 거야.

헤더가 그런 도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길고 길었던 안내 방송이 끝났다.

도현은 지시에 따라 시험지를 펼쳐보았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에서 종이가 펄럭이며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항은 총 25개.

주어진 시간은 40분.

전략을 짜 왔는지, 맨 뒷장으로 넘겨서 뒤의 문항부터 풀이하려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긴장감이 가득한 공간 속.

도현은 물끄러미 시험지를 응시했다.

눈에 띄는 외모에 절로 눈이 가서 은근히 주시하고 있던 시험 감독관이 속으로 혀를 찼다. 시작부터 포기인가.

저런 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나이도 어려 보이니, 딱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부모 때문에 억지로 끌려왔나 보지.

그리 생각하는데.

가만히 있던 팔이 움직였다.

간결한 동작으로 무언가를 체크하고선 다시 정지. 그리고 반복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문제를 찍는 줄 알았다. 아니면 장난을 치는 거거나.

그러나 잠시 후.

그는 그 생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까만 동공이 일정한 속도로 문제를 읽어 내리고 있었고, ‘잠깐’이라고 불러야 할 짧은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팔이 움직였다.

영원히 반복될 것 같던 동작에 변화가 생긴 건 후반부에 이르러서였다.

거침없이 답만 표시해 나가던 것과 다르게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풀이를 시작하려는 건가 해서 이번에는 좀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슥슥, 그림을 그린 후 곧바로 답을 체크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그러니까 저 아이, 지금까지 암산한 거야?’

터무니없다.

저 아이만큼 두뇌 회전이 뛰어난 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AMC는 명실상부한, 가장 권위 있는 수학 경시대회이니 온갖 곳에서 한 끗발 한다는 수학 천재, 영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런 천재, 영재들도 시험에서 암산하지는 않는다. 할 수는 있지만, 그것보다는 필기해서 기록을 남기는 편이 더욱 확실하고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실력에 대한 확신인가, 아니면 단순히 치기인가.

시험관은 어느새 흥미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도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좀 일찍 끝날 거 같은데.’

톡, 톡.

펜 끝으로 책상을 작게 치며 짧은 고민에 빠졌다.

처음 풀었을 때도 잔디밭에서 이십 분, 쉬는 시간에 오 분 정도 할애해서 풀었던 시험이었다.

그걸 두 달 가까이, 해리 선생님이 마르지 않는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제공해준 기출 문제를 풀고 난 후인 지금이야, 더 말을 얹을 필요가 없었다.

앞의 문제들을 빠르게 암산으로 풀어내었던 도현은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선 속도를 늦췄다.

너무 빨리 끝나도 좀 그러니 적당히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도현의 시선이 다음 문제에 닿았다.

커다란 원 안에 작은 원들.

도현의 눈이 슬쩍 그 밑의 선택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안 돼. 슬쩍 팔등으로 선택지를 가렸다. 답을 알 것 같아서 문제였다.

도현은 천천히 머리를 비웠다.

암산하지 말고, 천천히 풀자.

잠시 후.

경건한 눈빛으로 문제를 읽어 내렸다.

도형의 생김새에서부터 알아봤지만, 원의 성질 문제였다. 도현은 차근히 해리 선생님의 설명을 떠올렸다. 원의 성질은 단골로 등장하는 문제라서 여러 번 칠판에 풀이하며 강조했던 거라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원이 여러 개 등장하는 기하 문제에서 생각해야 할 원리는 네 가지.

첫째, 원의 중심 연결.

둘째, 원은 어디나 반지름의 길이가 똑같다.

셋째, 합동인 도형 확인.

넷째, 보조선을 그어 피타고라스 방정식 사용.

도현은 해리 선생님이 평소 풀이해주던 방식대로 천천히 도형을 그려가며 문제를 풀었다. 다 풀고 고개를 들어보니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검은 눈에 뿌듯한 빛이 차올랐다.

훌륭한 시간 끌기였다.

그 뒤도 마찬가지였다. 값을 알 수 없는 문자는 네 개인데 방정식은 세 개인 상황에서 성실하게 좌표를 그려가며 답을 구하는 등 도현은 훌륭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시간이 이십 분 정도 남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성과였다.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다.

보람찼다.

* * *

대체 4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이들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려 있었다. 누가 보면 40분이 아니라 40년 정도의 생명이 빠져나간 것 같을 정도였다.

“괜찮아?”

도현이 마시지 않아 남겨두었던 제 몫의 음료수를 헤더에게 넘겨주자, 헤더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음료수를 마신 헤더가 고마움의 눈길을 보냈다. 단순히 오렌지주스가 싫어서 마시지 않았던 도현은 그저 웃었다.

헤더가 다 마신 음료수 뚜껑을 닫더니 지친 낯으로 말했다.

“시간 분배를 잘못해서 마지막에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도현은 헤더가 늘어놓는 푸념을 들어주었다. 문제는 풀어야겠고, 시간은 없고, 답은 안 나오고, 심장은 너무 빨리 뛰고, 초조해지니까 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요약하자면 힘들었다는 소리였다.

“이번 시험 문제 어려웠어?”

평서문이 아니라 의문문이었다. 도현이 쳐다보자, 무어라 생각했는지 헤더가 말을 덧붙였다.

“아니, 너 보니까 꽤 오래 풀길래.”

“아.”

“원래 금방 풀잖아. 역시, 이번 시험 어려웠던 거지?”

헤더의 얼굴에 희망이 감돌았다.

도현은 짧은 고민에 빠졌다.

하얀 거짓말과 유쾌하지 않을 진실 사이에서 잠시 갈팡질팡하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다 어려웠던 거 같아.”

“…괜히 기대했네.”

헤더가 한숨을 내뱉었다.

도현이 당혹스럽게 쳐다보았다. 왜 그런 반응이지? 그런 생각이 훤히 보였다. 헤더가 어깨를 으쓱했다.

도현은 대체로 알기 어렵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다섯 살 어린 동생보다 읽기가 쉬웠다.

올림피아드 반에서 도현은 아이들이 어렵다고 문제를 가져올 때마다 친절하게 풀어주었다. 자신은 끙끙 앓던 문제를 도현이 시원하게 풀어내자 자괴감을 겪는 아이들에게, 자신도 이 문제는 좀 어려웠다며 웃으며 도닥여 주었다.

방금 표정과 똑같이 말이다.

얄미움에 잠시 뾰족한 눈매로 도현을 노려보던 헤더가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에 힘을 풀었다.

사실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잘난 거야 진즉 알고 있었고.

그렇게 매번 열심히 도와줬는데 화가 날 리가 있나.

다 차치하고서라도 헤더는 도현이 좋았다. 아일라 사건을 겪으면서 헤더는 도현에게 일종의 동지애와 동경을 느꼈다.

그때 보여줬던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당당한 태도도 그렇지만, 평소 모습도 그랬다. 또래와는 궤를 달리하는 어른스러운 성격에 사실 헤더는 남몰래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뭐, 그와 별개로 가끔 끔찍하게 눈치 없긴 하지만. 씩 웃은 헤더가 도현의 팔을 툭 치며 물었다.

“됐다. 그보다 24번 답 뭐야? 역시 4번이지?”

“음… 3번인데.”

“뭐? 진짜?”

좌절하는 헤더를 보던 도현이 살살 웃었다.

“사실 4번 맞아.”

“…야!”

분노한 헤더가 도현의 팔을 후려쳤다. 아픈지 헤더의 눈치를 보는 도현을 보며, 헤더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른스럽다는 말은 정정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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