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28)화 (229/582)

제228화. Xmas Movie (6)

내부 시사회 당일.

웨일 픽처스 본사.

스티브 로이 감독이 긴장을 떨쳐내지 못한, 그러나 은근한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의 촬영부터 기획에 참여했던 직원들, 그 직원의 친구와 가족들, 영화의 관계자 및 배우들, 투자자와 영화 평론가를 비롯해 각 영화 매체의 인사들까지.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내부 시사회장은 혼잡했다.

“지난번 작품도 감명 깊게 봤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기대되는군요.”

매체 베노우더의 편집장, 브렌든 도미닉이 사람 좋게 웃으며 스티브 로이와 악수했다. 스티브 로이 또한 반가운 얼굴로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브렌든 도미닉은 과거, 삼 년 전에 개봉했던 스티브 로이의 작품에 대단한 호평을 써준 적이 있었다. 혹평이 대다수였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곧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스티브 로이의 얼굴엔 자신감이 떠올라 있었다.

경영진은 편집 기간이 극도로 짧으며 충분한 퀄리티를 만들어내기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티브 로이는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니 오늘 성과로 보여줘야 할 것이었다.

중요한 날이니만큼 두려울 법한데도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자신 있으니까.’

의도한 그림대로, 아니 그보다 더 괜찮게 나왔다. 단순히 머릿속으로 그렸던 상상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움직이는 건 정말 놀라운 기분이었다.

그때, 스티브의 눈이 흔들렸다.

알랜 멘젤!

저 멀리서 매 같은 눈을 번뜩이며 걸어오는 남자는, 삼 년 전 그의 영화를 ‘필름이 아까운 쓰레기’라고 제일 먼저 나서서 혹평했던 영화 칼럼가, 알랜 멘젤이었다.

그의 칼럼이 나간 이후 우후죽순 쏟아졌던 혹평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쓰렸다. 친우들과 술자리에서는 예술을 감상할 줄은 모르고 트집 잡기밖에 못하는 비관론자라며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여전히 그 일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왔다.

스티브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디, 이번에도 혹평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도전적인 눈빛을 읽었는지, 아닌지 모를 알랜이 스티브와 눈을 마주치고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스티브도 그를 보며 미소를 장착했다.

그 시각.

도현은 멀리서 보이는 북적거리는 내부 시사회장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이 많네요?”

“아무래도 웨일 픽처스가 작은 제작사는 아니니까. 그리고 은 나름 정성 들여 투자한 작품이기도 하고.”

도현이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때는 내부 시사회는 고사하고, 주연 배우인 도현조차 완성본을 베니스 영화제에서 처음 봤다.

‘그때 진짜 간단하게 한 거구나.’

도현이 뒤늦은 깨달음을 얻고 있을 때.

“아. 그냥 가자니까.”

“이런, 스위티. 네 친구 아니니?”

“아니, 어차피 이따 볼….”

남자와 실랑이하던 루카가 입을 다물었다. 루카의 아빠, 맷 하퍼가 도현을 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꼬마 신사로구나. 만나보고 싶었단다!”

반갑다고 말하는 맷 하퍼와 다르게 도현은 조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꼬마 신사’라는 묘하게 부끄러운 호칭 때문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맷 하퍼의 뒤에서 불똥이 튈 만치 강렬하게 노려보는 루카였다.

“하하… 네, 반가워요. 도현 리예요. 도현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내 딸의 친구는 모두 내게 소중한 이들이나 다름없지. 너도 나를 맷이라고 부르렴.”

“맷, 여기는 제 매니저인 오스카예요.”

도현의 소개에 맷 하퍼와 오스카가 인사를 나눴다. 맷 하퍼의 명함을 잘 챙기며 오늘도 매니저로서의 업무를 까먹지 않는 오스카였다.

“너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더구나. 오늘 일정을 듣고 많은 이들이 네 이야길 꺼냈지. 그들은 하나같이 네 칭찬을 하던데, 오늘 보니 그 이유를 알겠어. 배우로서의 너를 얼른 보고 싶어질 정도야.”

맷 하퍼의 말에 오스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누가 봐도 설레어하는 얼굴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도현은.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차분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에 맷 하퍼가 흥미로운 눈빛을 했다. 맷 하퍼는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거물이었다.

아역 배우라면, 아니 굳이 아역까지 가지 않아도 신인 배우들은 그의 눈에 띄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편이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가 아무리 유명하든, 눈앞에 있는 건 그의 반절도 오지 않는 작은 어린애였으니까.

그러다 문득 침묵이 내려앉은 걸 느끼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너희 인사 안 나누니?”

질문을 던진 맷 하퍼가 뭘 생각했는지 대답도 듣지 않고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영화계의 거물, 맷 하퍼는 어디 가고 거기엔 그냥 딸바보만이 있었다.

“내가 눈치 없이 끼어 있는 건가? 오, 아빠는 딸의 인간관계에 오지랖을 부리는 눈치 없는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잠시 친구랑 얘기 나누렴. 난 여기 오스카 씨랑 대화하고 있을 테니.”

루카의 부정에도 맷 하퍼가 귀엽단 얼굴을 하고선 흐뭇하게 말했다. 루카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촬영 내내 도현이란 아이의 칭찬을 들었던 맷 하퍼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안녕.”

두 사람이 조금 간격을 벌리자,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안녕.”

다행히 루카는 도현의 인사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도현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고 있었고, 루카는 이글거리는 눈을 애써 가라앉히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건대 멱살을 잡아 올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는 것 같았다.

그 영원히 얼어 있을 것 같았던 침묵을 깨준 건, 다름 아닌 헤레이즈였다.

“…너희 지금 뭐 하냐?”

황당한 얼굴의 헤레이즈에 도현은 그만 안도의 탄식을 내뱉을 뻔했다.

“너도 왔어?”

“…그럼 오지 안 와?”

“아….”

도현이 멍청하게 굴었음을 깨닫고 눈을 감았다 떴다. 아까의 맹렬한 추위 때문에 뇌가 얼었던 게 분명했다.

“오랜만이네.”

“뭐… 그렇지.”

헤레이즈는 찜찜한 눈으로 도현과 루카를 번갈아 보면서도 나름대로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안녕, 헤레이즈.”

루카가 태연하게 인사했다.

제3자의 등장으로 북극의 새벽보다 추웠던 공기가 조금 녹아내렸다. 그사이 맷 하퍼와 오스카도 슬슬 대화를 끝내고 이쪽으로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함께 시사회장으로 향했다. 말을 건 죄로 루카와 도현의 사이에 끼게 된 헤레이즈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이내 처지를 완벽히 이해했는지 거멓게 죽은 낯을 했다.

“오! 함께 왔군요!”

스티브 로이 감독이 그들을 발견하고선 반겨주었다.

왁자지껄 화기애애해진 사이.

콱!

헤레이즈가 도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대화를 나누는 모양새였다.

“감히 네가 날 방어막으로 써?”

몰려오는 분노를 참는 듯, 발음을 씹으며 말하는 헤레이즈에 도현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너도 그 분위기 봤잖아.”

소심하게 변론해 보았지만, 헤레이즈의 화만 돋운 거 같았다. 경멸의 빛을 띠는 청회색 눈동자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작게 말했다.

“일부러 말 걸어준 거 알아.”

“…그건,”

할 말이 없었는지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결국, 헤레이즈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테일러 개자식 때문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헤레이즈는 속 터진다는 표정만 지을 뿐 입을 열진 않았다.

다행히 뒤늦게 나타난 주디스가 그들의 위치를 확인하곤 기겁한 낯으로 루카를 끌고 사라져서, 관람 내내 샌드위치처럼 끼어 고통받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진 않았다.

* * *

분위기가 정리되고.

모두 관람석에 앉고 나자 시사회장의 불이 꺼졌다.

내레이션으로 시작된 영화는 놀라우리만치 흡입력이 있었다. 방학 동안 얼굴을 맞댔던 헤레이즈조차 루카의 목소리가 이토록 매력 있었나 하고 놀랄 정도였다.

헤레이즈는 스크린에 빠질 듯이 영화를 보다가도, 제가 등장하는 장면이면 종종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은 아직 익숙지 않아서 어색했다.

그와 반대로 옆자리에 앉은 도현은 시종일관 차분해 보였다. 헤레이즈도 치솟는 부끄러움을 내리누르고선 스크린에 집중했다.

‘오….’

헤레이즈는 몇 번이고 속으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촬영 때 대부분 모니터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니 전혀 다른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때 조각조각 났던 장면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리고 화면으로 보니 생각보다….

‘쟤가 별로 눈에 안 띄네.’

물론 종종 시선을 잡아끌고, 유독 도현이 나오는 부분만 나오면 시간 감각을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촬영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가 홀로 얼마나 세트장을 압도했는지.

편집에 대해 잘 아는 게 없는 헤레이즈지만, 스티브 감독이 도현의 존재감을 중화시키려고 노력한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그의 노력은 꽤 빛을 발해서, 다른 인물들이 묻히는 느낌이 없었다. 여전히 제일 눈길을 끄는 건 도현이어도 그가 모든 주의를 독식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걸 얘가 모를 리가 없는데.

‘…기분 나빠 보이진 않고.’

오히려 불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었다. 헤레이즈는 그에게서 신경을 끊고는 도로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었다.

영화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어.’

거의 넋을 놓은 채로 영화를 보고 있던 헤레이즈가 속으로 탄성을 흘렸다.

장면이 삭제됐다.

편집하면서 내용이 많이 잘리고 바뀐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촬영분이 버리지 않고 쓰였기 때문에, 잘린 부분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흘긋.

헤레이즈가 곁눈질로 도현을 확인했다.

‘놀라지도 않네.’

헤레이즈가 속으로 생각했다.

삭제된 게 자신의 분량인데도,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관람하고 있어서 괜히 나만 신경 쓰는 건가 싶었다.

‘뭐, 원래 예정된 내용이 아니라 그런가.’

삭제된 건, 스티브 로이가 즉흥적으로 추가했던 장면. 정확히는 도현이 축제 날 영업을 하고 다니는 부분이었다.

그 부분이 생략되고 속도감 있게 축제 준비부터, 공연까지의 과정이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

“!”

놀란 표정을 짓던 헤레이즈는 이내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 * *

상영이 끝난 후.

스티브 로이는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크린에서 하나둘씩 시선을 떼기 시작하는 면면들이 밝았다. 언뜻 들리는 대화에서도 긍정적인 표현이 오가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말 그대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스티브 로이는 웨일 픽처스 경영진들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무언가 말하는 그들의 표정은 일단 부정적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긴장이 풀리자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시장이 언제나 작품의 완성도와 직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반응을 보면 시장 반응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스티브 로이는 피곤한 기색을 지우곤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오, 스티브! 이번 영화는 아주 멋졌어요.”

말을 걸어오는 인사에 스티브가 웃음을 매달며 대답했다. 지금 웃고 있는 이곳의 인물들이, 조금 있으면 펜이라는 칼을 들고 스티브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에겐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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