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Xmas Movie (9)
지윤정이 입을 살짝 벌렸다.
방금 무슨 일이 지나간 거지?
일단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꿈과 희망만 가득한 아이용 영화는 아닌 거 같았다. 초반부터 파격적인 전개였다. 몰아치는 속도 덕분인지, 흡입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너무 취향 저격이었다. 앳된 목소리로 시니컬하게 말하는 게 귀여웠는데, 놀랍게도 은근히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나이 차가 몇인데!
그사이,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분주한 앞마당이 훤히 보였다. 이사를 하는 건지 이삿짐센터의 트럭에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카메라가 뒤로 멀어지며 창가에 기대고 선 캐시가 화면에 들어왔다.
캐시는 몸을 앞으로 뻗어 구경하다가, 이삿짐센터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엄마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자 황급히 몸을 물렀다.
재빨리 문을 등지고 침대에 앉은 캐시가 기타를 들고 기타 줄을 퉁겼다.
똑똑-
“키티, 들어갈게.”
풀썩.
멜라니가 키티의 옆에 앉았다. 침대가 가라앉아 몸이 옆으로 쏠렸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기타 줄만 퉁겨댔다.
“키티, 새 방은 어때. 마음에 드니?”
“…….”
“여기 주변 경치도 되게 좋더라. 이따 엄마랑 같이 산책할까?”
“…….”
“…키티, 엄마랑 말 안 할 거야?”
멜라니가 부드러운 어조로 어를 때였다. ‘여기 좀 내려와 보셔야겠는데요!’ 아래에서 부르는 소리에 멜라니가 몇 번 더 캐시의 애칭을 부르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엄마 아래 좀 내려갔다 올게.”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딸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캐시가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푸욱!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진 캐시가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그 상태로 턱을 들어 올려 침대 머리맡에 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아. 지윤정이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거기 있는 건 찢어진 걸 덕지덕지 붙여놓은 포스터였다.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모든 게 쓰레기가 되어도 현실은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딩, 딩.
캐시가 눈을 감고 배 위에 올린 기타를 퉁겼다. 기타 소리가 멀어지며 화면이 어두워졌다.
* * *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 알겠지, 키티?”
“…….”
묵묵부답인 캐시에 캐시의 새로운 담임 선생님, 페니가 당황한 낯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멜라니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페니에게 말했다.
“하하, 전 일 때문에 이제 가볼게요. 캐시 잘 부탁드려요.”
“네, 네! 물론이죠!”
멜라니가 상냥히 인사한 후 교무실을 나갔다. 아이와 둘이 남은 페니가 캐시를 쳐다보았다.
“캐시? 이제 선생님이랑 같이 갈까?”
“꼭 그래야 하면요.”
…그럼 안 갈 거니? 페니는 묻지 못할 질문을 속으로 꿀꺽 삼키고선 어색하게 웃었다.
평범치 않은 캐시의 언행에 오혜은은 웃었지만, 지윤정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아이답지 않게 툭툭 내뱉는 말과 시니컬한 어투가 재밌으면서도, 포스터를 보던 표정이 잊히지 않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탓이었다.
페니와 캐시는 복도로 나왔다.
카메라가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담다가, 그들을 앞질러 복도를 따라 이동했다. 때마침 문을 열고 반에 들어가는 아이를 따라 카메라가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왁자지껄한 교실 안.
지윤정의 눈에 맨 뒷자리에 앉은 소년이 들어왔다.
밝은 금발을 뒤로 넘긴 채 책상 위에 거만하게 발을 올린 소년.
‘잘생겼잖아?’
어린데도 그 싹이 벌써 푸릇푸릇해 보였다. 그건 오혜은도 마찬가지인지, 작은 목소리로 ‘쟤 잘생겼지 않아?’ 하면서 속삭여왔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시끌벅적한 교실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책상에 올린 발을 까딱거리던 소년도 빛과 같은 속도로 단정히 앉았다.
또각또각.
앞문을 통해 들어오는 페니의 뒤에 작은 신형이 따라붙었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조리 쏠렸다.
몇몇 아이들이 헤- 입을 벌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보라색 브릿지부터 규정 위반이 분명한 교복, 치마에 달린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은색 체인과 목의 초커까지.
파격적으로 등장한 캐시는 저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하는 면면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움찔 떠는 아이들에 코웃음을 치는 캐시를 보며, 모든 관객들이 캐시가 범상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부터 우리 반이 된 친구야. 자, 캐시. 친구들한테 인사해볼까?”
“제 자리는요?”
“…캐시?”
그걸 캐시의 반 아이들이 깨닫는 것도.
“저, 아, 안녕…!”
“꺼져.”
“힉!”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 나 무시하는 거야? 나한테 이러지 않는 게 좋을걸? 이 반에서 생활하려면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아.”
“시끄러. 음악 소리가 잘 안 들리잖아.”
첫날부터 적을 만든 캐시의 화려한 행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테오와 사이가 최악으로 치달은 캐시는 학교생활에서 번번이 그와 부딪쳤다. 매번 소란이 일면 그 자리에는 캐시가 있었다. 페니가 이마를 부여잡는 횟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편입 일주일 후.
캐시는 기어코 사고를 쳤다.
“선생님! 선생님! 캐시 와일드가 마테오를 때렸어요!”
“뭐?”
우당탕!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교무실에서 쉬던 페니가 한껏 당황한 얼굴로 뛰쳐나왔다.
도착한 급식실.
범인은 어디 가고, 잔뜩 부은 볼을 잡은 마테오가 새빨간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페니는 그만 질린 낯으로 비명을 삼켜냈다.
* * *
“선생님! 학교에서 폭력 사태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대체 학생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교감 선생님….”
페니가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교감은 여전히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휴스 씨가 학교에 항의했어요. 아들이 그런 얼굴이 되어 집에 왔으니 당연한 일이죠!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하, 알아보고 말고 할 게 어딨어요? 분명 그 애, 그 이상한 애가 잘못했겠지!”
“네?”
“소문이 자자한 아이더군요. 복장도 불량하고 태도도 불성실하고… 세상에 그 보라색 머리라니! 나는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처음부터 그 애가 문제아인 걸 알아봤지!”
“그래도 일의 전후 관계는 알아봐야죠, 교감 선생님. 캐시가 정말 잘못한 일이라면… 제가 책임지고 징계를 내리겠습니다.”
교감은 그녀를 못마땅한 얼굴로 보다가, 이내 더 대화하기도 싫다는 듯 손을 휘적였다.
연신 허리 굽혀 사죄한 페니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교감실을 나왔다.
이후, 장면이 전환되었다.
페니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캐시에게 호통을 치거나 질책을 하기보다는, 침착하게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때리고 싶어서 때렸어요. 그러면 안 돼요?”
“캐시.”
“됐으니까 퇴학을 때리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요.”
“캐시, 캐시!”
붙잡을 새도 없이 캐시가 교무실을 제멋대로 나갔다.
캐시 와일드는 그녀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인 듯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마음이 쓰이는 과거에 동정심과 연민이 들었지만, 갈수록 행동이 도를 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은 행동은 그저 비호감만 불러일으켰다.
지윤정도 캐시가 마음에 든 것과는 별개로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캐시가 혼란스러운 거야 알지만, 무조건 반항하거나 비협조적으로 구는 행동들은 확실히 눈살이 찌푸려질 법했다.
그때였다.
휘리리릭, 테이프가 감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영상이 빠른 속도로 되감아졌다.
관객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윽고.
화면이 일정한 시점에서 멈췄다.
‘이 장면은….’
지윤정은 금방 캐시가 편입한 첫날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페니의 옆에 선 캐시가 사나운 눈으로 반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페니가 캐시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전에 봤던 장면과 같은 장면이면서, 어딘가 달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담담한 독백이 울렸다.
이때의 나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엄마한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으니까.
캐시 시점이구나! 단번에 그 사실을 알아챌 만큼 인상적으로 남은 목소리였다. 관객들은 흥미롭게 눈을 빛내며 스크린에 집중했다.
그러나.
장면이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터 우리 반이 된 친구야. 자, 캐시. 친구들한테 인사해볼까?”
“제 자리는요?”
“…캐시?”
엄마가 원하는 대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첫인상?
캐시가 심드렁히 말했다.
“제 자리요.”
망하라지.
“어, 저, 저기인데….”
선생님의 아련한 음성을 무시하고, 옆자리 짝의 인사도 산뜻하게 씹어 먹은 캐시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후 상황은 동일하게 흘러갔지만, 시점이 달라진 것만으로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캐시가 눈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마테오를 찡그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캐시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기에 마테오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리지 않고 음악 소리에 뭉개져서 들렸다.
단언컨대, 이 일은 분명 마테오의 잘못이었다.
이어폰을 꼈으면 대화하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기본 아닌가?
그것도 모르는 게 머저리였다.
참고 참던 캐시가 결국 짜증스럽게 이어폰을 뺐다.
“시끄러. 음악 소리가 잘 안 들리잖아.”
그러니까 난 잘못하지 않았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관객들은 하나씩 깨달았다. 이때는 정말 안 들렸다는 것과 이어폰은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캐시의 의사 표현이었단 것, 그리고.
언제나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 * *
그날 이후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사실상 그날이 전학 첫날이었으니, 처음부터라고 하는 게 나을 수도.
뭐, 이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괴롭힘당하는 당사자의 독백이라기엔 상당히 시니컬한 말투였다. 묘하게 덤덤한 느낌이 중성적인 목소리와 어울려 귀에 확 꽂혔다.
화면이 전환되며 캐시가 자잘한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주로 캐시만 따돌리거나, 험담하거나, 조롱했는데, 반응하지 않기엔 신경 쓰이고 반응하기엔 애매한 정도였다.
그러나 분명히, 상처받기에 충분한 행동이었다. 캐시는 상처받은 눈을 하는 대신 이를 드러냈다.
페니가 달려와 말릴 찰나면,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캐시는 굳이 하나하나 일러바치지 않았다. 그저 지루한 눈으로 페니의 잔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결국, 캐시는 제일 나쁜 아이가 되었다.
관객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이거… 혹시.
무언갈 짐작한 지윤정이 오혜은의 팔을 툭, 건드리려던 때였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급식실이었다.
관객들은 직감했다. 이제 그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었다.
그리고.
퍽!
관객들이 헙, 놀랐다.
고의적인 부딪힘에 휘청거린 캐시가 넘어졌다. 손에 들렸던 식판은 당연하게도 엎어진 채였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은 캐시의 스타킹에도 튀어 있었다.
“아, 미안. 그러니까 앞을 잘 봐야지.”
마테오가 비웃듯 말했다.
저건 좀… 심하지 않나? 오혜은도 마찬가지인지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지윤정은 한 가지 사소한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장면이 진행되었을 때, 교무실에 있던 캐시의 스타킹이 더러웠던 걸 기억해낸 것이다.
어느새 관객들은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캐시를 보고 있었다. 아까 속으로 욕을 했던 것에 대한 반동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중요한 건.
마테오가 내 인내심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
캐시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야, 돼지야. 이렇게 많이 먹으니까 그렇게 살이 찌지.”
“나, 난 돼지가 아니라 엘비야…!”
“그래 엘-피그. 꿀꿀해봐, 꿀꿀.”
마테오의 조롱에 주변 아이들이 엘비를 비웃었다. 수치심에 귓불까지 달아오른 엘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내가 가져간다. 네 다이어트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응?”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캐시가 마테오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당황한 마테오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후 벌어질 일을 아는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곧이어.
“먹는 거 가지고 지랄 떨면 안 된다는 거 못 배웠어?”
쿠당탕탕!
마테오가 말 그대로 ‘날아갔다’.
주먹을 날린 손목을 탈탈 턴 캐시가 얼빠진 채로 뺨을 부여잡은 마테오를 향해 비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다.
난 받은 걸 돌려준 것뿐이니까.
후득.
마테오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음, 조금 많이 돌려준 것 같긴 하지만.
난리 난 급식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다. 캐시는 그들을 뒤로한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급식실을 빠져나갔다.
그래서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던가.
‘불행하게도’라고.
툭, 툭.
스타킹에 묻은 파스타 면을 털어낸 캐시가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그 악랄해 보이는 미소는 소녀와 무척 매력적으로 어울렸다.
아, 덧붙이는 걸 깜빡했다.
당연히 불행한 인물은 내가 아니라, 마테오였다.
태연하기에 더욱 인상적인 목소리였다.
‘와….’
지윤정은 감탄사 말고 내뱉을 게 없었다. 캐시 와일드는 정말 비범했다. 진심으로 본받고 싶은 멘탈이었다.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오혜은도 약간 넋이 나간 얼굴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몇몇 관객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더는 눈살을 찌푸린 채 캐시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 * *
화면이 어두웠다가 밝아졌다.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엄마 아빠는 나를 키티-새끼 고양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세상이 나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작다는 걸 알 정도의 나이는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잘못이 있든 없든 그 약해빠진 놈이 내 연약한 주먹에 날아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벌을 받으리란 걸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내가 벌벌 떨며 후회했냐고?
아니.
난 오히려 한 가지 호기심이 생겨났다.
교무실 안.
제집 안방인 양 소파에 편하게 앉은 캐시를 보던 페니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녀는 그사이 오 년은 늙은 모습이었다.
“캐시, 왜 싸운 거니?”
퇴학당하면 엄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내레이션이 나오자마자 관객들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건 지윤정이나 오혜은도 마찬가지였다. 오혜은은 입을 떡 벌리기까지 했다.
캐시가 심드렁히 말했다.
“걔가 짜증 나게 해서요.”
“캐시!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야 해.”
“때리고 싶어서 때렸어요. 그러면 안 돼요?”
“캐시.”
엄하게 타이르는 말투에 캐시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날씨를 변화시킨다는 말을 아는가?
나는 이 작은 날갯짓이 어떤 폭풍으로 변해서 돌아올지 궁금해졌다.
“됐으니까 퇴학을 때리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요.”
“캐시, 캐시!”
그래서 시험해 보기로 했다.
캐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선생님을 무시하고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관객들은 더는 캐시란 아이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들이 했던 모든 생각을 뛰어넘었으므로. 폭력적인 행동 이면에 있었던 동기와 생각들은 예상할 수 없었기에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충격은, 저도 모르게 편견 가득한 눈으로 캐시를 보았던 이들의 허물을 한 겹, 한 겹 벗겨내었다.
캐시가 관객의 마음에 깊이 박힌 순간이었다.
닫힌 문을 허망하게 보고 있던 페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눈에는 짙은 실망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구니?”
“저… 선생님.”
교무실 문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아이를 본 페니가 의아한 눈을 했다.
“엘비, 무슨 일이니?”
오, 내가 불러온 폭풍이 완전히 다른 궤도로 갈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연극조의 대사 뒤에, 전조 없이 한 문장이 더 따라붙었다.
뭐,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소리다.
화면이 그대로 점멸했다.
* * *
이윽고 다시 밝아졌을 때는.
핑, 피융!
슈팅 게임으로 추정되는 게임이 스크린에 가득 찼다. 미사일이 날아가는 효과음과 뿅뿅대며 사라지는 비행기들은 단숨에 분위기를 전환했다.
잠시 후.
카메라가 점점 뒤로 멀어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곧게 뻗은 손가락이었다. 이어 실없이 올라간 입매, 주근깨가 들어찬 뺨, 두꺼운 안경,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차례대로 보였다.
어깨까지 움직여가며 열정적으로 게임을 하는 소년은 얼마나 즐거운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 실없는 웃음에 관객들은 무의식적으로 따라 웃었다. 그만큼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약간 이상하기는 하지만.
관객들은 소년의 등장으로, 조금 전까지 캐시를 향한 안쓰럽고 안타까운 감정을 순식간에 잊었다. 오롯이 현재의 화면에만 집중했다.
등장만으로 이루어낸 일이었다.
…도현이다!
오혜은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안경이 화면에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오혜은이 감격에 찬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얼굴이 미묘해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흐히히… 우앗! 이얍!”
도현이… 맞지?
미리 포스터로 본 비주얼이긴 하지만, 영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보니 저 이죽대는 입매 탓인지, 연신 괴상한 효과음을 내는 목소리 탓인지 상당히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말… 그냥 게임 폐인 같았다.
아, 아니야. 이런 불경한 생각을!
오혜은이 고개를 털었다.
딸칵, 딸칵, 딸칵.
얼마나 신나게 게임기를 조종하고 있었을까.
소년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게임에 몰두한 소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적의 비행기를 격추하는 데만 온 집중을 쏟아붓고 있었다.
“야, 너.”
“허억!”
불에 덴 개구리마냥 펄쩍 뛴 제이가 동전을 넣은 기계처럼 반사적으로 말을 쏟아내었다.
“선생님, 이건단순한게임기처럼보이겠지만사실고도의계산식을통해서 미사일궤적의변환식을구하는과학탐구용…”
제이의 말이 길어질수록 관객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고도의 계산식, 미사일 뭐?’ 하는 표정이었다.
오혜은만이, ‘우리 도현이 랩 시켜도 잘하겠네’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도 씹지 않고 단어를 뱉어내는 게, 재능이 보였다.
“……?”
줄줄 뱉어내던 말이 뚝 멎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모양새였다.
제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휴우….”
동그랗게 벌어진 입이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이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제스처였다.
그렇게 안심하는가 했던 제이가 도로 바짝 굳었다. 품에 게임기를 꼭 껴안고 최대한 의자 바깥쪽으로 몸을 무르는 게, 누가 봐도 캐시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 경계에 캐시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안 뺏어 가.”
“…정말?”
되물으면서도 어투가 영 꺼림칙한 게, 불신이 그득그득하게 느껴졌다.
슬쩍 웃는 캐시에 제이는 경계심을 더욱 끌어모았지만, 그 경계심도.
“맞고 믿을래, 그냥 믿을래?”
“그냥 믿을게.”
거대한 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제이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관객들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조화인지, 눈이 보이지도 않는데 바짝 긴장한 꼬리나 축 처진 귀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캐시에게 완전히 몰입하고 있던 관객들은 이제는 제이에게 초점을 두고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짧은 등장만으로 마음을 얻어낸 제이였다.
관객들이 어쩐지 이상하지만 귀여운 괴짜 소년을 온기 서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처억!
캐시가 난데없이 괴상한 포스터를 꺼내, 제이의 책상에 박력 넘치게 내려놓았다. 한쪽 팔을 책상에 기대고 있는 자세까지 완벽했다.
제이가 물음표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화면이 제이의 책상에 놓인 요란한 포스터를 보여 주었다가, 제이의 시점처럼 초점을 위로 올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캐시를 비추었다.
캐시가 선언했다.
“너, 내 록 밴드에 들어와.”
…갑자기?
당황스러울 정도의 급전개에 관객들의 표정에 하나같이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만 못 따라가는 거 아니지?’라는 의문이 담긴 오혜은의 눈빛에 지윤정이 지긋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도 그래.
모두 제이와 같은 심정이 되어 황망히 캐시를 쳐다보았다.
그런 의문을 해소해주듯.
휘리리릭!
다시 한번 영상이 되감겼다.
그리고.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이었다.
캐시의 목소리가 극장 안을 채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